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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의학2 (24-28) - 헤르만 바빙크 본문

신학하다

개혁교의학2 (24-28) - 헤르만 바빙크

이참리 2020. 5. 20.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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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하나님의 불가해성

 

[161] 신비는 교의학의 핵심 요소다. 왜냐하면 교의학은 유한한 피조물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무한한 하나님 자신에게 집중하기 때문이다. 교의학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까닭은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교의학 전체의 유일한 교리이자 독점적 내용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가장 미약한 이해는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무한히 초월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가지성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신론을 보여준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 제거될 수 없는 의식을 가지며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어떤 지식을 가진다고 전제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한 사실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 계시로 인해 하나님은 인격이며, 의식을 가지고 자유롭게 의지를 지닌 존재이며, 세상에 갇힌 것이 아니라 자연 위에 높이 들린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162] 인간의 철학적 사고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절대성을 강조한다. 브라만교도에게 하나님은 이름도 속성도 없는 알 수 없는 존재이며, 코란은 알라를 매우 인간적인 형태로 묘사하지만,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이러한 묘사를 영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속성조차 부인한다. 헬라 철학도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불가지성을 가르쳤다. 또한 영지주의는 최상의 신과 세상 사이를 절대적으로 분리시켰다. 자연, 이스라엘,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아이온들(aionen)에 대한 본질적 계시만 나타난다. 그러므로 선천적이든 획득된 것이든 자연신학이란 존재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계시 신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최상의 신은 피조물이 결코 가까이 갈 수 없다.

 

이러한 하나님의 불가해성과 그의 본질에 대한 불가지성에 대한 가르침은 또한 기독교 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자신을 완벽하게 알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 피조물들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어떤 이름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질을 알려 주지 않는다.

 

[163] 위 디오니시우스에 의하면, 그 어떤 개념, 표현, 단어도 하나님의 본질을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특이한 은유적 이름들로 지칭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한편으로 이름이 없으며, 다른 한편으로 많은 이름을 지닌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에 근거해서 인정한 하나님의 긍정적인 이름들조차 하나님의 본질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부정적 신학이 긍정적 신학보다 더 선호된다. 부정적 신학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을 초월한 분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모든 부정과 모든 긍정, 모든 주장과 모든 부인을 초월한다.

 

스콜라주의는 하나님의 본질 자체가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다는 교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안셀무스는 그 이름들이 하나님의 본질을 단지 비유적으로만 지시하고, 그의 본질에 대한 상대적 속성들은 진술될 수 없으며, 절대적 속성들은 질적 의미가 아니라, 단지 본질적 의미에서만 진술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스콜라주의가 더 발전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불가해성에 대한 진리는 배후로 사라졌다. 신론은 갈수록 더 확대되어 전개되었다. 하나님의 실존, 이름들, 위격들, 속성들이 아주 세밀하고 자세하게 전개되어 하나님의 불가해성에 대한 여지가 남지 않았다.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다른 것들과 나란히 하나의 일반적 속성이 되어 광범위하게 그리고 변증법적으로 취급되었다.

 

[164] 신학이 이러한 신적 존재에 대한 불가지성의 진리를 거의 잊었을 때, 철학은 다시금 그것을 상기시켰다. 칸트는 감성이 시공간의 형태들을 선험적으로 수반하고, 지성이 오성의 범주들을 선험적으로 수반하듯이, 이성도 선험적으로 종합적 원리들을 포함해야 한다. 이로 인해 이성은 세 가지 초월적 관념들, 영혼, 세계, 하나님을 형성한다. 하지만 이 세 가지 관념들은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없고, 단지 주관적으로만 이성의 본성에서 도출된다. 그래서 이 관념들은 우리의 지식을 증대시키지 않고, 규제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하나님, 영혼, 세계가 존재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보게 한다. 따라서 심리학, 우주론(목적론) 그리고 신학은 결코 학문이 아니다. 순수이성 비판은 부정적 결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이제 실천이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 관념들의 실재를 수용하게 만든다. 만일 지성과 의지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는 단지 하나님에 대한 실천적 지식이지 결코 사변적 지식이 아니다. 신 관념은 존재하지 않는 형이상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학에 속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신앙론]에서 하나님은 우리 실존의 원천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절대적 작인으로서 우리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절대 의존감정의 내용일 뿐임을 말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의 불가지성 교리는 갈수록 점점 더 현대의 의식 가운데 침투했다.

 

[165] 이러한 불가지론의 근거는 먼저, 모든 인간적 지식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그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주체와 객체는 상호 의존적이다. 사물들과 그 속성들이 비로소 실존하게 되는 것은 그것들이 누군가의 인식과 관련될 때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인식과 독립된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결코 말할 수 없다. 우리가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주어진 순간에 우리에게 그와 같은 것으로 비쳤다는 사실이다.

 

철학과 신학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적절하다고 확신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은, 주관적으로는 인간의 지각 능력의 제한성이 지적되었고, 객관적으로는 모든 신 개념이 종속되는 내적인 자기모순이 지적되었다. 전자는 칸트가, 후자는 피히테가 지적했다.

 

인간은 감각적 인식에 매여 자기 생각의 재료를 항상 가시 세계로부터 도출한다. 그는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고 비가시적 사물들의 세계로 오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시공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유는 그 본성상 서로 대립하고 서로 제한하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전제하기에, 주체와 객체 그 어느 것도 절대적일 수 없다. 따라서 절대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란 모순이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생각하고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항상 둘 중에 하나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절대적인 것을 유한한 것의 범주인 아래로 끌어내려 그 안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이며 제한적인 인간 존재로 만들거나 아니면, 우리가 우리 사유로 모든 시공간의 제한을 초월하고자 시도하여 유한한 피조물과의 모든 유사성을 제거할 경우, 우리 사고는 다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개념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166]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불가지성 교리를 상당히 동의하고 승인할 수 있다.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름도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어떤 정의도 하나님을 묘사하지 못한다.

그러나 비록 성경과 교회가 불가지론의 전제들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위대성을 확신했을 지라도, “완전한 지식이란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당신이 그를 알 수 없는 분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분으로 아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하나님은 피조물들 거운데 자신을 계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전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이 신비는 이해될 수 없고, 단지 감사함으로 인정될 뿐이다.

 

우리의 지식이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 안에 기초를 두고, 오직 하나님으로만 존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바로 무한자로서 그 지식의 대상과 내용으로 하기 때문이다. 만일 절대적인 것이 모든 제한을 배제하고 모든 규정이 부정이라면, 하나님을 인격성으로 언급하는 것은 잘못일 뿐만 아니라, 그를 절대자, 유일신, 선, 본질적 존재 등으로 부르는 것도 잘못이다. 그러나 인격성은 신의 절대적 존재와 모순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자의식이 자기 존재와 마찬가지로 풍성하고 깊고, 무한하다는 사실을 내포한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했다면, 얼마나 작든 간에 우리가 관찰하고 알 수 있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지성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손으로 만든 작품들에 자신을 계시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실상 불가지론은 고대 영지주의의 오류에 다시 빠지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불가지론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가지론은 사실상 단지 19세기 형태와 이름을 지닌 무신론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가지론은 대부분 무신론으로 나가지 않고, 알 수 없는 분의 실재를 여전히 주장한다. 그래서 불가지론은 내적 모순을 겪는다.

 

25. 하나님의 가지성(선천적 지식)

 

[167]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오로지 계시에 그 기원을 둔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들 가운데 계시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역시 불가능하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자신의 미덕을 펼쳐 보인다면, 하나님의 가지성 또한 더 이상 거부될 수 없다. 그러나 피조물들 안에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할 수는 없다. 유한은 무한을 포괄할 수 없고, 성자 외에는 아무도 성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이 가지성을 폐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전제하고 확정한다.

 

세상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무대라는 사실은 사실상 거부할 수 없다. 성경은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선지자들과 사도들, 특히 자신의 아들 자체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했고, 이제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다. 성경에 의하면 온 세상은 피조물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이기도 하다. 절대적인 의미에서 무신론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하나님의 부재로 여겨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이 될 수 없고, 반드시 반신의 피조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무신론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실제적인 무신론이 있다. 하지만 의식적인 이론적 무신론은, 설혹 있다 하더라도, 절대적 의미에서 드물다. 절대적 의미에서 절대적 능력에 대한 부인으로서의 무신론이란 거의 생각할 수 없다. 무신론과 유물론은 거듭 범신론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최상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참된 신을 부인하는 그 순간, 그는 스스로 거짓된 신을 만든다. 이렇게 종교란 인간 본성에 아주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는 이를 아주 분명하게 말해 준다.

 

[168] 모든 인간은 가장 어릴 때부터 단지 물리적 세계만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 비가시적 세계도 의식한다. 이것들은 출생 시에 주어져 인간 본성에 내포된 본유관념처럼 여겨진다. 본유관념론은 헬라 철학에 그 뿌리를 둔다. ‘도대체 인간이 배운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라는 사유에 관한 것이었다.

 

본유관념론은 데카르트에 의해 촉진되었는데, 그가 맨 처음 이 용어와 관념을 사용하였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이 이원론은 그의 이원론, 즉 영혼과 육체 사이의 이원론과 연관되었다. 지성적 지식은 감각적 인식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후자는 단지, 우리 정신이 본유적 능력을 통해 표상과 개념들을 형성하는 계기만을 제공할 뿐이다. 지식은 자기 자신의 원칙, 즉 본유관념에서 나온다. 이 본유관념 가운데 신에 관한 관념이 가장 대표적인데, 이것은 소위 “자신의 작품에 새겨진 예술가의 표식”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해하는 이 관념들의 본유란 영혼의 본성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 관념들을 산출하는 힘, 능력, 성향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관념들은 우리 정신에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본유관념론은 학습과 학습 능력은 선행 지식이 이미 어떤 방식으로 우리 정신에 있다는 것을 전재한다. 경험은 단지 우연한 진리인 견해만을 제공하는 반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는 오로지 인간 정신 자체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다. 그런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보편적 승인에 의해 증명된다.

 

[169]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학이 이 본유관념론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아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은 본유관념론을 강경하게 거부했다.

 

스콜라주의 전체는 본유관념론을 만장일치로 거부했다. 스콜라주의는 본유관념론과 달리 사물의 본질이 지성적 지식의 실재적 대상이라고 가르쳤다. 모든 지식은 감각적 인식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감각적 인식이 사물을 볼 때, 지성은 그 사물에서 보편적 개념을 추상화하고 실로 일차적으로 소위 본유적관념을 도출할 가능성을 가진다. 따라서 본유적관념은 지성에 의해 완성된 형태로 수반되지 않고, 지성의 특성과 일치하여 가시적 사물에 대한 관찰로부터 도출된다. 이것은 신 관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사물의 실체가 아니라 그 원인이기에, 하나님의 존재와 미덕들은 관찰과 사유를 통해 하나님의 작품들로부터 어느 정도 알려질 수 있다. 따라서 본유지식이 단지 언급될 수 있는 것은 유한한 것에서 무한한 것으로, 구체적인 것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오르려는 자연적 성향이 우리 지성 안에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가능하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처음부터 자연신학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 칼빈은 일반 은혜와 특별 은혜를 구별했고, 전자와 관련하여 죄인 가운데 여전히 남아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칼빈은 신성에 대한 감각이 자연적 본능에 의해 인간 정신에 심겼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종교의 씨앗’이라 부르고, 이를 통해 종교의 보편성을 설명했다. 하지만, 선천적 신학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본유관념론은 푸치우스에 의해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1) 데가르트는 관념이라는 용어를 색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왜곡했다. (2) 데카르트는 본유적 신 관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마하지 않았다. 즉, 그것이 선천적 신학에 속하는지 아니면 획득한 신학에 속하는지, 또는 그것이 능력인지 활동인지, 참된 실재인지 의도적 실재인지 등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3) 데카르트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 얻은 지식의 가치와 확실성을 무시했다.

 

[170] 우리는 왜 기독교 신학이 그렇게 본유관념론을 거부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이 빠지게 될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만일 사람이 태어날 때 이미 자신의 정신에 완전히 선명하고 분명한 지식을 갖고 태어난다면, 그는 세상으로부터 독립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완전히 순수한 지식을 산출할 수 있어서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 가운데 주었던 계시가 없어도 살 수 있다. 더 나아가, 본유관념론으로 인해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격이 벌어진다. 그래서 가시적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 즉 신적 생각의 구체화가 결코 아닌 것이다. 영원한 진리들, 지성적 지식이 가시적 세계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인간은 이 진리들과 지식을 오로지 자기 성찰과 기억을 통해서, 즉 세계와 분리되어 자기 자신의 영혼의 삶으로 물러날 때 발견한다.

 

그러나 세계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미덕들을 반영하는 거울이며, 하나님의 생각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칼빈은 “세상의 지극히 작은 곳에서조차 최소한 하나님 자신의 어떤 영광의 광채가 나타나지 않은 곳이란 없다.” 기독교 신학은 이것을 이해했기에 만장일치로 본유관념론을 거부했다.

 

[171] 우리가 보기 위해서는 객관적으로 태양 빛을 필요로 하듯이, 또한 주관적으로도 눈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이 실제로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배우고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그들이 배울 수 있는 능력, 소질 그리고 기질을 수반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지식의 씨앗들은 본성적으로 인간 안에 내재한다. 모든 지식은 공리인 보편 원리에서 출발한다. 모든 지식은 신앙에 기초한다. 모든 증명은 결국 논증의 원리를 전제로 한다.

선천적 지식이란 인간이 직접적으로 하나님 자신에 의해 충분한 지식을 갖추었기에 더 이상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용어는 인간이 단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어떤 의식적인 선명하고 참된 신 지식을 도출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심겨진, 천성적, 본유적’ 등의 용어들은 인간이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신 지식이 인간 자신으로부터 자연적으로, 학문적 추론 없이 생겨난 것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우리 내부의 타고난 원리들을 통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한, 신 지식은 우리 안에 있는 본유적인 것이라고 불린다.”

 

26. 하나님의 가지성(획득된 신 지식)

 

[172] 선천적 신 지식과 획득된 신 지식은 서로 대립되지 말아야 할지라도, 의심 없이 둘 사이는 구별된다. 이 구별은 종종 전자는 인간에게 본유적이고 자기 자신의 존재로부터 생기는 신 지식을 가리키는 반면, 후자는 외부로부터, 세상의 관찰로부터 전자가 증대되고 확장되는 가운데 인간의 소유가 되는 신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모든 지식은 외부로부터 인간 의식에 들어온다. 선천적인 것은 단지 지식에 관한 능력일 뿐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선천적 신 지식과 획득된 신 지식보다 선행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권능과 신성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며, 인간 외부만 아니라 내부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은 이런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인상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영원한 존재에 대한 어떤 인식과 지식을 획득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선천적 신 지식도 인간 내부와 외부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영향 하에서만 발생하며, 따라서 항상 획득된 지식이다. 하지만 선천적 신 지식의 경우에 그 계시는 인간의 의식에 작용하여 거기에 인상과 관념을 신장시킨다. 획득된 신 지식의 경우에 그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에 의해 숙고된다. 즉 그의 지성이 일하기 시작하며, 그의 반성이 일깨워지고, 발고 선명한 의식으로 추론과 증명을 통해 피조물로부터 하나님에게 오르려고 추구한다. 즉 신앙은 신학에 오르고, 선천적 지식은 획득된 지식으로 완성된다.

 

선천적 신 지식과 획득된 신 지식은 특별계시의 토대 위에 있다. 자연에서 얻은 신 지식은 말씀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실재에서 출발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인정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성경은 분석하거나 논증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손이 행한 사역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드러나지 않은 곳이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의 증거와 계시로서 호소한다.

 

[173] 종교개혁은 자연신학을 그 증명들과 더불어 전수받았으나, 이것을 신앙에 관한 교리 이전에 취급하지 않고, 신앙에 관한 교리에 포함시켰다. 칼빈은 종교의 씨앗을, 비록 모든 사람에게 제거될 수 없이 심겨졌을 지라도, 질식될 수 있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하다. 하지만 개신교 신학은 곧 합리적 방법을 취했다. 자연신학은 참되고, 학문적인 증명 가능한 신학이 되었고, 이에 반하여 계시신학은 점점 더 뒷전으로 물러가 마침내 안전히 사라졌다. 증명은 종류별로 나뉘어 자세하게 구별되었다. 형이상학적 증명은 세상의 움직임, 인과관계, 우연성을 근거로 구별되었고, 물리적 증명은 우주의 조화, 질서, 목적 그리고 태양, 달, 별들, 불, 빛, 땅, 등과 같은 구체적인 피조물들에 기초하여 구별되었다. 역사적 증명은 보편적 승인, 사회 예술, 학문, 계시, 예언, 기적에 근거하여 구별되었고, 도덕적 증명은 양심, 자유, 도덕, 심판, 보상과 질병 등에 근거하여 구별되었고, 마지막으로 수학적 증명도 구분되었다.

 

칸트는 증명들을 엄격하게 비판하고, 여기서 이론적 이성은 반드시 분명하지 않다고 결론지어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 뒤에 칸트는 신의 실재를 다시금 실천이성의 공리로 확립하려 애를 썼다. 헤겔은 그 증명을 인간 정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증거로 높이 평가하고, 따라서 특히 존재론적 증명에 큰 가치를 부여했다. 우주론적 증명은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왜냐하면 만일 신의 실재가 세상의 실재로부터 증명되어야 한다면, 모든 지푸라기가 신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정당하게 말해지기 때문이다. 목적론적 증명은, 모든 목적을 부인하는 다원주의 영향 하에서, 세상의 질서와 목적에서 나온 증명으로 종종 뒤로 사라졌다. 윤리적 논증은 자연에 대립한 정신의 자율성을 문화 전체와 특히 도덕적 의식과 생활 가운데 드러내는데, 단지 도덕적 세계 질서의 실재만 증명하든지, 혹은 인격적 하나님의 실재도 증명한다. 보편적 승인에서 비롯된 논증은 종교에 대한 역사적, 심리학적 그리고 철학적 연구를 통해 모든 의심의 여지없이 수립된 인간의 종교적 본성에서 자신의 가장 주된 설득력을 도출하고 신의 실제, 계시 그리고 가지성을 전제한다. 결국 이 모든 증명이 귀결되는 것은, 유물론과 범신론이 세계 문제를 풀 수 없고, 이 모든 세계의 기원, 본질 그리고 목적은 오로지 유신론의 관점에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174] 우주론적 논증과 목적론적 논증은 세계 전체로부터 출발하여 그 기원으로부터, 혹은 그 목적으로부터 신에게 이르려고 시도한다. 존재론적 논증과 윤리적 논증은 인간의 본성, 즉 각기 그 이성적 본성과 도덕적 본성 위에 수립되었다. 그리고 보편적 승인의 논증과 역사적 신학적 논증은 역사에 기초하여 인류의 일치된 증거와 역사로부터 신의 실재를 결론짓는다.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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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신학에서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이런 논증들이 증명이라고 불리는 것은 안타가운 일이다. 하나의 증명에 의존한다는 것은 실재에 의존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지적인 원인은 본질적 원인과 절대로 동일하지 않다. 마치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신앙은 그 증명들에 기초하고 그 증명들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 반대가 오히려 맞는 말이다. 그 어떤 실재도 오로지 증명을 근거로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증명이 더 명확하고 선명하게 밝힐 수는 있으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실재에 관해 확신하는 최종적 근거는 아니다. 이 확신은 신앙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우리 의식의 자발적인 증거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증명들은 증명으로서 신앙의 근거들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산물이다.

 

27. 하나님의 이름들

 

[178] 하나님이 자신의 계시 가운데 자신에 관해 우리에게 알릴 수 있는 모든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시되었다. 이름이란 그 이름을 지닌 자의 표지로서, 누군가가 자신을 드러내고 알릴 수 있는 어떤 속성을 따라 지명하는 것이다. 이름과 그 이름을 지닌 자 사이에는 연관이 있고, 그 연관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지닌 자 자체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편에서의 계시로서, 능동적이고 객관적 의미에서 공표된 이름으로 전면에 부각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외부로 계시하는 미덕들이나 완전과 일치한다.

 

자연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구체적으로 사람에게 지향한 것이므로,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는 언어는 인간의 언어이며, 하나님이 사용하는 표현은 인간적 표현이며, 하나님이 나타내는 모양은 인간적 형태이다. 그래서 성경은 전체가 신인동형론적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자신을 낮추어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씀하고 그들에게 나타난 것은 이미 창조와 더불어 시작된 그의 은혜이다. 성경에서 신인동형론은 훨씬 더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인간에게 그리고 피조물들에게 어울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도 적용되어, 특히 “인간의 부분들, 신체들, 감각들, 감정들, 행동들, 인간에게 속한 것들과 연관된 것들”이 적용된다.

 

[179] 하나님이 자신의 계시 가운데 스스로를 일컫는 이름들은 사유의 독특한 어려움을 수반한다. 하나님은 불가해한 분이고 모든 유한한 존재들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그의 이름들 가운데 모든 유한한 존재에게 내려와 피조물들처럼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율배반을 직면한다. 하나님은 한편으로 이름이 없다 할지라도, 다른 한편으로 많은 이름을 갖는다. 우리는 무슨 권리로 이 이름들을 하나님에 대해 사용할 수 있는가? 우리는 무슨 권리로 그 이름들이 모든 피조물 위에 무한히 높이 계시며 우한에 의해 포함될 수 없는 하나님에게 속한다고 생각하는가? 전 피조세계는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무한한 격차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피조된 작품이며 하나님과 연관된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하여 주어진 현재 모습 그대로 완전히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피조계의 언어로 말할 수 있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 신인동형론의 정당성은 하나님이 직접 자신의 피조물 안에, 그리고 그들에게 내려와 피조물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계시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오히려 신인동형론 언어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언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신인동형론의 정당성을 반대하는 자는 원칙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들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한다는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거기서 더 나아가 반드시 창조를 부인해야 할 것이며, 결국 하나님과 세상, 무한자와 유한자 사이의 영원한 이원론 외에는 남지 않을 것이다.

 

[180] 그래서 이러한 이름들의 정당성이 수립되었다면, 그 가치는 무엇인가? 그 지식은 모든 면에서 유한하고 제한된다. 하지만 그 지식은 부정확하고 거짓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물들의 내적 본질, 사물 자체를 관찰하지 못한다. 우리는 현상들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본질을 추론한다. 우리는 영적인 것들을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없고, 다만 물질적인 것들을 통해서만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비가시적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모든 언급은 은유적, 상징적, 시적이다. 이것은 종교와 신학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성경에서 모든 천상의 것들은 우리에게 지상의 색조와 색채로 그려진다. 하나님 자신이 창조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고, 그리스도의 인성으로 우리 가운데 거했다. 이러한 인성은 분명히 그의 신성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 인성 자체는 그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의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로 거했다. 따라서 두 가지는 서로 매우 잘 조화되는데, 한편으로 그것은 부적합하고, 유한하고, 제한된 지식인 반면, 동시에 참되고, 순수하고, 충분한 지식이다. 하나님의 이름들은 추론하는 이성, 즉 사람의 주관적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추론된 이성 즉 계시에 나타난 객관적 이성의 산물이다.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회피해야 한다. 첫째는 신비적 관조, 혹은 논리적 사고를 통해 본질적, 실질적, 적합한 지식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단지 이상 가운데서만 보았다. 본유관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거울로 보듯 희미하게 보고, 믿음으로 행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적합한 지식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모사신학이다. 이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를 지시하기 위한 피조물의 이름이 불가피하다고 여기고 그 가운데서 단지 시적인 상상의 산물인 상징들로만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신학의 이러한 견해는 견지될 수 없다. 상징은 언제나 영적 진리를 가리키기 위한 감각적 대상이나 감각적 행위인 반면, 신학은 그 자체로 그런 상징들을 취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실재들을 다루어야 한다. 의식, 의지, 거룩 등이 하나님에게 부여될 때, 아무도 이것을 상징적 의미로 이해하지 않는다.

 

28. 하나님의 이름들의 분류

 

[181] 성경은 하나님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르지만, 결코 추상적인 신 개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또한 결코 하나님의 한 속성을 희생시키면서 다른 속성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와 세상의 존재를 서로 동일시하는 범신론에 반하여, 하나님은 고유한 본성을 지니며, 세상과는 구별된 독립적 존재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론적 실재와 경륜적 계시를 분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더욱 대립시키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한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구분이 지어졌다. 하나님의 어떤 속성이 모든 피조물들과 즉각적으로 구분되는가? 무엇이 하나님의 본질의 주요 개념인가? 우리는 신론에 있어서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이런 맥락에서 학자들은 각각의 속성은 하나님의 본질 자체라는 것을 물론 인정했지만, ‘그 모든 속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본질을 가장 원리적으로 가리키고, 그래서 그로부터 다른 속성들을 도출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질문을 제기했다. 플라톤적 철학은 이미 그 주된 개념을 존재 가운데서 추구했고, 필로는 이것을 ‘여호와’와 연관시켰고, 따라서 하나님을 자주 ‘존재하는 자’, ‘존재하는 것’이라 불렀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기독교 신학에 전수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거듭해서 최상의 존재, 최고의 진선미 등으로 묘사했고,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여호와’라는 이름에 호소했다.

 

[182] 개혁파 신학자들은 초기에는 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의 정의를 수용했다. 그들은 자존성 혹은 독립성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을 독립적인 존재로 묘사했다. 다른 한편으로, 소시누스주의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소시누스주의는 모든 형이상학적 질문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하나님의 뜻[의지] 만을 강조했다. 신 지식이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종교는 모든 신비를 잃고 외적 종교적 행위로 흡수되었다. 이러한 차가운 윤리적 신 개념에 대항하여 다시금 철학 진영의 반작용이 있었다. 스피노자는 존재 관념으로 회귀하여 하나님을 “유일하고 무한하고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실체, 절대적 무한 존재, 절대 제일의 내재적 원인”으로 여겼고, 최상의 행복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사랑, “지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다시 말했다. 쉘링은 단지 정신적인 것, 종교와 도덕만 아니라, 객관적 자연도 고려하였다. 자연은 가시적 정신이며, 정신은 비가시적 자연이다. 이 둘 가운데서 모든 대립을 초월한 절대자에 대한 지속적이고 유기적인 계시를 보는데, 무한자와 유한자, 하나님과 세상, 단일자와 전체의 일치이다. 헤겔은 이 체계를 논리적 관념론으로 변환했다. 자연과 역사는 관념의 논리적, 필연적 전개이다. 모든 것이 합리적이며, 모든 것은 생각이 구체화된 것이다. 따라서 이성은 절대적 실체이며, 하나님 자체이다.

 

독일에서는 리츨의 신칸트주의가 사색적 중재신학에 대항하여 등장하였다. 리츨은 종교가 법적 관계라는 것을 부인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정의와 은혜 사이에 그 어떤 이원론도 도입해서는 안 된다. 종교는 도덕적 관계이며, 기독교는 “완전히 영적이며 절대적인 도덕적 종교”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사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사랑에서 출발하여 그 개념으로부터 모든 것, 창조, 섭리, 구속, 칭의를 도출하기를 애써야 한다.

 

신학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만족할 만한 묘사를 그려내기 위해 힘들게 씨름하고 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자, 절대적 존재, 절대적 실체 혹은 주권자, 무한한 영, 절대적 인격성 혹은 아버지, 사랑, 인격적이고 전능한 사랑의 의지, 선 등으로 정의된다. 하나님의 모든 미덕들의 일치와 조화에서 출발하여 이것을 끝까지 견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신학의 지속적인 소명은 성경의 본을 따라 하나님의 모든 미덕들을 동시에 존중하는 것이다.

 

[183] 기독교 신학은 항상 이 소명을 의식했다. 그것은 하나님은 단순하며, 즉 모든 복합을 추월하며, 따라서 그의 본질과 그의 속성들 사이에 그 어떤 실제적인 구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쳤다. 각각의 속성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다. 기독교 신학은 이 ‘하나님의 단순성’ 교리를 통해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속성들을 분리하여 독립시키려는 위험을 방어했다. 한편으로 범신론이나 일원론의 위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다신론이나 다원론의 위험이 다가왔다.

 

신학이 하나님을 본질로 언급할 때, 이 개념을 얻는 것은 추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반대의 추가를 통한 것이다. 즉 피조물들 가운데 발생하는 모든 완전함은 절대적 의미에서 하나님에게서 비롯되고, 그를 절대적인 실체, 모든 존재의 총체, 가장 순수하고 가장 단순한 실제로 생각함으로써 이런 개념을 얻는 것이다. 신학에서 하나님에게 속한다고 여겨지는 존재는 동시에 가장 풍성하고, 가장 완벽하며, 가장 철저하고, 가장 확정적이고 구체적이며, 절대적으로 단순한 존재다.

 

[184]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들 사이의 구별을 거부할 때, 이는 하나님의 ‘본질’을 부인하거나, 신론에서 이 용어의 사용을 금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기독교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본질적인 모든 것을 제거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속성 가운데 순수한 존재, 절대적 실체라는 사실을 가능한 한 강하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유신론적 철학자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인격성의 개념에서 출발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들이 취한 태도는 범신론적 신 개념을 물리치기 위하여 올바른 것이었지만, 그 외에 신적 본질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추천할 만한 것이 아니다. 첫째, ‘인격’이라는인격’ 용어는 삼위일체론에서 특정하고 고유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본질에 사용되는 인격성이란 용어는 하나님을 단일 인격으로 이해하고, 세 인격을 부당하게 취급하기 때문이다. 셋째, 추상적, 현대 형식적 인격성의 개념에서는, 그와 같은 하나님을 인간과 구별하는 것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질을 사랑으로 그 출발점을 삼는 것도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미 인격성, 의식과 의지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나, 오로지 모든 속성들이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의미에서만 그렇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본질을 묘사함에 있어서 자존성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이러한 일방성을 회피하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그 절대성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지시하고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과 구별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절대성은 올바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절대성은 추상을 통해 획득된, 모든 내용을 빼앗긴, 가장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참되고, 유일하고, 무한히 충만한 존재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절대적 존재, 즉 단지 스스로 자존하는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고대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견해와 묘사를 출애굽기 3장 14절에 주어진 것처럼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에 연계시켰다. 하나님의 유일성,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차별성과 절대적 초월성이 성경 전체를 통해 전면에 부각되었다.

 

[185] 각각의 속성이 그 본질 자체이므로,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속성들이 구분될 수 없을지라도, 속성들 사이의 구별이 실재에 그 어떤 기반도 두지 않는 단지 유명무실하고 주관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속성들의 구별은 하나님의 단순성과도 상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단순성은 하나님을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로 가리키지 않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생명의 절대적 충만 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피조물들 사이에 연간 때문에, 하나님은 이처럼 다양한 속성들로 등장하고, 이처럼 다양한 이름들로 일컬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피조물들 안에는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유비가 있다. 그 이름들은 하나님을 단지 사물들의 원인으로 지시할 뿐만 아니라, 미약하고 부족하나 신적 본질에 대한 어떤 개념을 제공한다. 비록 그 이름들 가운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항상 동일한 본질이지만, 각각의 이름은 진실로 무한한 충만 가운데 있는 그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간략하게 설명해 준다. 하나님의 본질을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이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이름들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한 인상을 우리에게 주기 위한 것이다.

 

[186] 점차적으로 그 이름들은 하나님, 주 등의 칭호와 명칭으로 제한되었다. 그 다음에 삼위일체론은 완전하고 고유한 용어로 취급되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묘사하려는 시도는 자연히 어떤 속성(지존성, 인격성 등)을 전면에 내세우고, 때때로 이 속성을 심지어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이름하에 다른 속성들 이전에 취급하려는 필연성을 수반했다.

 

스콜라주의는 사람이 신 지식에 이르는 세 가지 방법을 말했다. 부정의 방법, 탁월함의 방법, 원인의 방법. 이 세 가지 방법은 최근까지 교의학에서 인정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지식인 이 세 가지 방법들이 고안되기 이전에 이미 오랫동안 존재했었다.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탁월함의 방법과 원인의 방법은 실재적으로 단 하나이며, 그래서 함께 부정의 방법에 대한 긍정의 방법으로서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지식의 방식은 존재의 방식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실재에 있어서 일차적인 것은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원형이며, 절대적이며, 완전한 것이다. 피조물 가운데 유래한 것이며, 상대적이고, 제한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실상 피조물 가운데 있는 것을 따라 불려진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이 절대적 의미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따라 일컬어진 것이다. 성경은 철저히 신론적이며,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도출한다함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방식으로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에게 이른다. 우리는 피조물에게서 보게 되는 그 모든 불완전함과 제약들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피조물들에게서 관찰되는 그 모든 완전함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에게서 기인한다고 여긴다.

 

[187]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가진 지식은 올바른 지식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그 지식이 부적절하다는 것, 즉 거짓이나 틀린 것이 아니라, 유비적이고 모형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구분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항상 존재한다. 한편으로, 부정적, 비공유적, 정태적, 절대적, 형이상학적이라고 불리고, 다른 한편으로, 긍정적, 공유적, 역동적, 상대적, 심리학적이라 일컬어진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일컬어질 수 있기 때문에, 취급상의 순서가 필요하다. 한편으로, 그것들 가운데에는 나중에 특별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지적되고, 구체적으로 칭호와 명칭의 이름들로 성격이 규정된 것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신적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의 삼위에 속하고, 속성들, 관념들, 관념적 특성들, 개인적 특성들, 상대적 속성들 이라는 특별한 이름으로 지시되며, 삼위일체론에서 논의되는 속성들은 고유한 자리를 차지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초월성’과 ‘세상에 대한 연관성’을 동시에 주장한다. 그래서 두 그룹의 속성들이 어떤 이름으로, 즉 부정적 혹은 긍정적, 정태적 혹은 역동적, 비공유적 혹은 공유적 등으로 지시되는가 하는 질문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개혁파 신학자들이 사용했던 마지막 이름들 [비공유적 혹은 공유적]은 다른 것들보다 선호되는데, 이는 그것들이 기독교유신론을 안전하게 지켜 주고, 동시에 범신론과 이신론의 오류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이 지음 받은 형상과 모양은 자연히 적절하고 거의 보편적으로 차용된 구분을 제공한다. 첫째,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며 영임을 드러내는 속성들이 있다. 둘째, 신적 존재가 완전히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속성들이 있다. 셋째, 그 존재의 윤리적 본성을 가리키는 속성들이 있다. 넷째, 하나님이 우리 앞에 주, 왕, 주권자로서 활동하는 속성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구분은 더 나아가 인간에게 새겨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충만한 찬란함으로 다시금 우리를 대면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킨다. 오로지 그의 피조물들 가운데 나타난 계시 외에 신 지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항상 유비적이고 모형적일지라도, 우리는 그 계시를 통하여, 또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경배를 받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참되고 순수한 지식을 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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