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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 - 보편성을 추구한 신학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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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 - 보편성을 추구한 신학자

이참리 2020. 5. 1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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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덜란드 교회의 역사와 분리 교회

 

1815년 빌럼 1세가 네덜란드 국왕으로 등극을 하고 1816년에 ‘네덜란드 교회 치리 정관’을’ 선포하며 교회를 재조직하였다. 즉, 교회의 치리권을 왕이 임명한 교회위원회로 이관시키는 하향식 교회정치를 시행한 것이다. 왕이 ‘국가교회’의 형태로 정교일치를 시행하며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자 1834년에 신앙의 자유를 선언하는 ‘분리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네덜란드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국가 교회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 정치와 군사적인 측면에서 공동의 목적을 가진 지방 귀족들이 동맹을 맺고, 독립을 추구하였다. 이런 배경으로 네덜란드에서 정치나 종교는 중앙집권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개혁교회는 신앙고백을 강조함으로써 국가 교회와 구별하였고, 유아세례를 인정함으로써 성인 세례만을 고집한 재세례파와도 구별하였다. 출생과 동시에 세례를 받을 수 있었으나, 완전한 교인의 자격은 권징을 수반하는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에 따랐다. 초기에는 루터와 비텐베르크, 그리고 하이델베르크와 취리히 등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제네바와 칼빈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커져감으로써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네덜란드의 신학이 형성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 지도부와 네덜란드의 사회,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연대는 가속되었고, 신학은 주지주의와 스콜라주의에 빠져들었다. 즉 신앙과 종교적 진리가 명제들로 정리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동시에 경건주의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신앙적 분위기는 19세기 개혁파 교회에서 일어난 분리 교회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분리교회들은 1836년에 모인 첫 총회에서 [도르드레흐트 교회법]을 채택하였고 자신들을 ‘십자가를 맨 개혁교회’라 칭하였다가, 1839년에 ‘분리개혁교회’로, 1869년에는 ‘기독개혁교회’로 개명했다.

바빙크는 ‘계속적 개혁’의 후기 노선을 답습한 교회의 출신이지만, 양 경향의 종합을 시도하였다. 바빙크는 개혁자들이 씨름하던 개방성과 보편성을 자기 교인들에게 회복시킴으로써 그들에게 공교회성의 안목을 심어주려 하였다.

 

2. 출생과 학창 시절,, 그리고 목회자 바빙크

 

헤르만 바빙크는 1854년 12월 13일에 네덜란드의 호오허페인에서 그 지역의 분리 측 목사였던 얀 바빙크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바빙크는 벤타임에 정착한 개혁파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1871년 헤르만 바빙크는 부모의 곁을 떠나, 호오허페인에서 남서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즈볼러 라틴어 문법 학교에2학년으로 편입하였고, 분리 측 집에 하숙하면서 이곳에서 2년간 공부하였다. 1873년 3월 30일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입교하였다. 1873년 7월 15일에 헤르만 바빙크는 졸업시험을 치렀고, 라틴어와 불어와 네덜란드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1874년 9월 23일, 헤르만 바빙크는 캄펀에서 레이던으로 향하였다. 바빙크는 그의 박사논문의 지도교수 스홀턴으로부터 옛 개혁신학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았고, 교의학을 명쾌하게 강의하는 법도 배웠다. 바빙크는 특히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가르친 란트의 영향을 많이 받아 평생 옵조오머의 경험주의를 경계하고, 칸트를 따라 18세기의 합리주의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바빙크는 스홀턴의 지도로 츠빙글리의 윤리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 바빙크는 어떠한 윤리학적 전제도 없이 츠빙글리의 윤리에 접근하였다. 그리고 츠빙글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출발점으로 삼았다고 보았다. 그는 스홀턴의 지도를 존중하여 선택론과 윤리의 관계도 심도 있게 다루었는데, 즉 츠빙글리는 철저하게 숙명론에 빠져있었고, 스토아사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인간론에서는 플라톤과 세네카의 영향을 받았고, 선악을 절대적으로 대비시키는 것도 스토아사상에서 왔다고 보았다. 츠빙글리는 또한 윤리는 크게 강조하였지만 죄책은 중시하지 않았으며, 종교적인 면도 상대적으로 무시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칼빈과는 달리, 츠빙글리에게는 이방인의 미덕을 호의적으로 보면서, 때로는 특정 이방인의 구원 가능성까지 논하게 된다. 결정론적 예정론을 따르다 보니 츠빙글리는 하나님을 죄의 원인자로 만들어버렸고, 죄의 종교적 의미도 약화시켰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모든 외적 권위로부터 자유로우며, 자기 자신의 제약만을 받는다. 따라서 내적인 말씀과 인간의 주체가 중심이 된다. 바빙크는 츠빙글 리가 성경보다 내면적 의식을 강조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재세례파와의 연계성도 비판하였다.

 

1880년 9월 18일, 바빙크는 레이던에서 동북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프라이너커로 가서 청빙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목회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전심전력을 기울여 목회에 임하였다. 1882년 8월, 바빙크는 총대로서 즈볼러 총회에 참석하였다. 총회는 투표를 통해 빌렁하, 린더보옴과 함께 바빙크를 교수로 임명하였다. 그는 10월 8일에 프라너커교회에서 고별설교를 하였다. 이로써 그의 1년 7개월의 목회 생활은 끝을 맺었다.

 

3. 교회 통합의 견인차

 

이제 바빙크는 카이퍼의 교회 개혁 투쟁을 측면으로 지원하고, 교회를 합동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바빙크는 1884년 분리 측의 50주년을 기념하면서, “국가로부터의 자유라는 원리는 이미 기독개혁교회가 채택하였다.”고 역설하였다. ‘국가로부터의 자유’는 카이퍼의 모토 중에 하나인데, 이런 발언은 바빙크가 그와 아주 가까이에 서서 신앙과 신학적 투쟁을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분리 측과 애통 측은 1892년 6월 17일에 암스테르담에서 합동을 결의하였고, 교회의 이름을 ‘네덜란드 개혁교회’라 칭하였다. 합동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합동한 교회들이 성경에 기록되었고, 네덜란드 교회가 전통적으로 수용한 3대 신조에서 고백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연합하였다.

 

6. 헤르만 바빙크의 신학 총론

 

바빙크의 신학은 각각 1895, 1897, 1898년과 1901년에 4권으로 출판된 [개혁교의학]에 집대성되어 있다. 1권은 총론이고, 2권은 신론, 3권은 인간론과 기독론, 그리고 언약론을 다루고, 4권은 구원론과 교회론과 종말론을 다루었다.

교의학 첫 권은 교의학의 이름이나 위치, 방법론과 분류 및 연구 역사로 시작하지만, 실제로는 교의학의 원리론을 다룬다. 그가 취하는 외적 인식 원리는 계시이고, 내적 인식 원리는 성령 혹은 신앙이다. 그에 의하면 교의학은 신지식에 관한 학문적 체계인데,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모든 피조물에 대해 말씀으로 교회에 계시하신 것에 대한 지식이다. 바빙크는 교의학의 방법론에서, 주요한 세 요인인 ‘성경’, ‘교회의 신조’와 ‘개인적 신앙고백’을 언급하면서 성경의 계시를 앞세운다. 그리고 성경보다 신조를 강조하면 전통주의에, 교회와 신조를 아예 무시하면 성경 주의에 빠진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성경으로부터 교의들의 발생을 추적하고 재해석하는 역사적인 종합적, 발생론적 방법을 선호한다. 교의학은 하나님의 본질과 창조사역,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지향한다. 송영으로 마치는 교의학은 무미건조한 학문이 아니라 변신론(theodicy)이며,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향하는 찬송이요, 감사와 경배의 노래이다.

 

계시

계시란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기를 알려주는 의도적이고 자유로운 행위이다. 그리고 계시에 기초한 인간의 반응은 신지식과 예배이다. 바빙크는 외적인 인식 원리인 계시를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로 나누며, 이양자를 모두 인정하지만, 일반 계시와 본성적 신지식을 통일시 하는 중세의 전통은 거부한다. 교의학자는 신앙과 특별 계시 안에서 자연과 역사를 본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 알게 된 것과 동일한 하나님을 발견한다. 일반 계시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로고스와 성령님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만, 특별 계시에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은 아들을 통해, 그리고 그리스도가 획득한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즉 계시는 성육신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리므로 계시는 생명을 전달하기에 단순히 오성만을 향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구원론적이다. 성령님이 내적으로 역사하셔서, 이 계시를 깨닫고 믿음으로 수용하게 하며,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경

이러한 계시의 이해로부터 성경관이 나온다. 계시는 인간에게 소유되기 위하여 성경이라는 종(從)의 모양과 모습을 취한다. 상경은 그 자체가 계시의 일부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쓰인 책이며, 그렇기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유기적 영감론을 전개한다. 바빙크에게 성경은 더 이상의 검증을 용납하지 않는 기본 공리인 원리이다. 신학은 감정이나 이성, 교회나 고백, 교황이나 공의회가 아니라, 공리인 성경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성령님은 성경 이외의 새로운 계시를 주지 않으시고, 다만 객관적인 계시를 이해하고 소유하게 하신다.

 

7. 삼위 하나님

 

평생 불가지론과 투쟁한 바빙크는 신론의 서두에서 하나님의 불가해성이 신지식의 내용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지식은 모든 지식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신지식은 하나님의 무한한 본질을 알게 한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적이지만, 하나님을 여하한 술어로도 묘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이며,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본질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의미에서 또는 유비적이다.

 

바빙크가 자연으로서의 피조물과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자연으로부터 신지식을 논의함으로써 나타난 난점은 하나님의 속성을 다루는 데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는 하나님의 단순성에 기초하여 속성과 본질의 동일성, 곧 구체적 속성은 속성마다 하나님 자신이라는 주장을 고수한다. 그는 속성을 이름이라는 넓은 개념으로 포괄시킨다. 신지식의 유비적 특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은 공유적인 동시에 비공유적이라고 본다.

 

바빙크는 하나님의 ‘작정론’을 ‘신론’ 제체와 하나님의 ‘사역론’의 중간에서 다룬다. 작정으로 결정된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식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다 구현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또 작정은 영원하며, 하나님 안에는 전후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정은 작정하는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명제를 의미한다. 바빙크는 작정론에서 당시에 문제가 되고 있던 ‘후택설’과 ‘전택설’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후택설은 선택과 유기를 타락한 세상과 연관시키면서,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나타내시는 자비와 의의 속성을 부각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작정은 창조와 타락, 그리고 선택과 유기의 역사적 순서로 나타나며, 상호 원인론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후택설은 예정을 예지로 약화시킬 약점을 지니고 있다. 전택설은 죄의 문제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목적론적 순서를 취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되고 유기당할 인간들은 작정 속에서 타락하고, 범죄 해야 하는 존재로 보는 이념적 성격을 지닌다. 전택설은 논리적인 일관성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을 죄의 원인으로까지 만들 위험을 안고 있다. 두 입장의 공통점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기초하고 있다.

 

바빙크는 창조론과 인간론에서 또다시 펠라기우스주의와 대결한다. 하나님은 작정을 창조로 구현하시는데, 창조는 모든 계시의 시작이요, 근거이다. 세계의 존재 이전에는 비존재가 있었으니, 하나님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이다. 바빙크는 [골로새서] 1장 등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가 창조론에서 중심, 즉 창조의 중보자가 되며 세계 이념은 창조에서 구체화된다고 말한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단순히 구원론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우주적 의미도 지니게 되는 것이다.

 

8. 예수 그리스도

 

바빙크에게는 기독론이 교의학의 출발점이 아니라 중심점이다. 교의학의 심장인 기독론에는 기독교의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생명이 박동한다. 그는 먼저 성육신의 가능성을 해명한다. 첫 전제는 하나님이 자기를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인 본질이다. 개혁파에서 성자의 인격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은 간접적으로 인성과 결합하였다고 가르친다. 둘째 전제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른 인간 창조이다. 셋째 전제는 계시 역사이다. 계시는 성육신과 같이, 하나님이 자기를 내외적으로 수교할 수 있다는 사상에 근거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로마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무인 격적 속성에 대해 중요한 주장을 한다. 제 이위께서 인성과 연합하심은 성자의 위격이 비인격적인 인성과 결합함이었다. 그러므로 바빙크는 그리스도가 플라톤적 이데아인 인성을 보편적을 보편적으로 취하였다고 보는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논박한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의 인성은 로고스와 연합함으로써 전 인류를 대표하였고, 이 연합을 미리 준비했기에 모든 인류의 중보자가 될 수 있다는 사변적인 발언도 한다.

 

9. 성령 하나님

 

바빙크는 신비적 연합이라는 개혁파 구원론을 부각시킨다. 그는 생명의 원리를 투여하는 협의의 중생을 은혜 언약에 기초한 구원 서정의 첫째 은덕이라고 본다. 죄인은 그리스도의 은덕에 참여하기에 앞서, 먼저 그리스도의 인격에 참여해야 한다. 교중과 그리스도의 연합은 이미 작정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구체적으로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로 구현될 뿐이다. 선택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덕을 주관적으로 소유하기 전에 ‘즉각적 은혜’가 이미 주어진다. 즉 신생의 최초의 원리인 중생은 인간의 이성적인 동의나 자유의지 개입과는 무관하게 말씀을 통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선택받은 사람들에게 능력을 직접적으로 미리 주어, 신앙과 회개를 이루게 한다.

바빙크는 신앙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자질적 회개와 활동적 회개를 구분한다. 이는 중생에 의한 생명 원리의 투여로 인한 불가피한 결과이다. 칭의에서도 그는 능동과 수동적 칭의를 말한다. 우리는 신앙으로 의와 하나님의 공로와 칭의 자체를 동시에 받는다. 능동적 칭의는 신앙 이전에 신앙을 향한 내적 소명이다. 내적 소명의 공개는 피동적 칭의로서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2020/05/15 - [book공방] - 개혁 교의학 - 바빙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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