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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의학1 (16-23) - 헤르만 바빙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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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의학1 (16-23) - 헤르만 바빙크

이참리 2020. 5. 1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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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의학 1
국내도서
저자 :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 박태현역
출판 : 부흥과개혁사 20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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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내적 원리

 

16 내적 원리의 의미

 

[130] 인간은 반드시 외적 원리에 대해 인간 자체 내부에 있는 내적 원리가 응답해야만 한다. 인간의 모든 삶은 주관과 객관의 상호 대응에 기초한다.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로고스[이성]을 통해 지적인 사물들의 세계를 다루고, 가시적 세계 가운데 구체화된 [우주의 근본 원리로서의] 로고스의 자취를 더듬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인간은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이상적인 그리고 영적인 자산들의 참된 세계와 연관을 맺고, 이 세계를 인식하고 알기 위한 능력을 부여받았다.

칸트는 철학 전체를 이성 능력의 비평으로 전환시켰다. 그래서 그 이후로 우리 지식의 속성과 확실성에 투자된 연구들을 아무도 경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분야에 너무 지나친 기대 뒤에는 항상 절망이 뒤따랐다.

신학과 종교에서도 지나친 기대들을 조심할 이유가 있다. 인식론은 신앙을 보상할 수 없으며, 교의학의 형식적인 부분은 실질적 부분을 대신할 수 없다. 먼저, 신자들이 학문적 의미에서 그들이 믿는 이유를 설명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둘째로 신학자들은 철학자가 아니기에, 신학자들이 신학적 작업을 하기 전에 출발점으로 삼은 인식론의 학문적 타당성을 증명해야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이다. 신학은 자신의 고유한 인식론을 수반하며, 철학에 의존한다 할지라도 어떤 특정한 철학적 체계에 의존하지 않는다. 셋째, 신앙은 영혼의 삶에 깊이 감추어져 있고 인간 마음의 가장 섬세한 감정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관찰하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131] 그러므로 종교적 신앙과 기독교 신앙의 토대들이 아주 다양하게 진술되는 것은 전혀놀랄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자기 안에, 자기 자신의 본성에 종교적 표상, 계시, 성경을 분별하고, 판단하며 수용할 충분한 요소들을 소유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성, 양심, 감정, 마음이 신적인 것에 대한 기관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들이 신앙의 가장 깊은 밑바탕, 또는 신학의 참된 내적 원리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종교가 그 속성상 고유한 ‘외적 인식의 원리’를 갖는다면, 이와 더불어 인간 내부에도 반드시 고유한 ‘내적인식 원리’가 일치되어야 한다. 인간의 주관적 ‘기관’은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에 반드시 호응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 계시는 우리 수하에서 우리의 승인과 거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위에 높이 자리하고 우리로 하여금 믿고 순종할 것을 촉구한다.

만일 성자의 경륜, 객관적 계시의 경륜이 끝났다면, 성령의 경륜이 시작되었다. 또한 이러한 주관적 계시, 이러한 조명과 중생의 저자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성자 안에서 인간을 찾으며, 또한 성령 안에서도 인간을 찾는다. 성령은 객관적으로 성경 안에서, 주관적으로 인간 자체의 영혼 가운데 그리스도의 위대하고 강력한 증인이다. 인간은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외적인 계시에 대한 적합한 기관을 부여받는다.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객관적 계시는 종교와 신학의 ‘외적 인식의 기초원리’이다. 그리고 교회를 거듭나게 하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성령은 종교와 신학의 ‘내적 인식의 기초원리’이다. 계시는 이러한 성령의 증거를 통해 인류 안에 실현되고 그 목적을 달성한다.

그래서 기독교회는 항상 ‘성령의 증거’를 고백했다. 하나님이 외적 계시의 저자이며, 또한 신앙 공동체를 선택하고, 교회를 수립하며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분이다. 성경은 그의 말씀이며, 교회 공동체는 그의 성전이다. 교회의 본질은 신자들의 모임에 놓여 있다. 신자들의 모임이 하나님이 거할 처소이며,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의 전이다.

 

17. 역사 변증법 방법

 

[132]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온갖 공격을 견뎌야만 했고, 계속해서 자기 방어의 필요성을 느꼈다. 변증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시와 같이 오래된 것이다. 기독교 진리를 변호함에 있어서 확고한 신념과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서 출발했다.

이방 세계에도 많은 참된 것들, 선한 것들, 그리고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거기에 존재하는 진리의 씨앗들은 하나님이 고대로부터 인간에게 주신 특별 계시에 그 기원을 갖는다. 특히 헬라철학에 있어서 순수 종교, 참된 가르침 혹은 순수 도덕의 모든 것은 계시에서 유래되었고, 따라서 사실상 기독교에 속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도들의 시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제일 처음 근원적 계시 가운데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의 본질적인 차이는 내적인 기준들, 오로지 기독교에서만 계시의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획득되고 제공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밝히 드러난 영생의 소망이다.

이러한 내적인 기준들에 외적인 기준들이 덧붙여진다. 교회의 증거, 전통, 기적들, 순교자들의 확고함, 수도자들의 거룩함, 그리고 기독교를 통해 가정, 사회, 국가에 주어진 수많은 풍성한 복들이 그것이다.

 

[133] 스콜라주의는 신앙에서 출발했으나, 신앙의 진리를 이성의 내용으로 삼으려는 시도 가운데 자연적 진리와 초자연적 진리 사이를 분리하였다. 먼저 자연적 진리들에 대한 진리를 학문적 근거들 위에서 주장되었다. 그 다음, 특별 계시의 가능성, 필연성과 실재성이 이성에게 밝혀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일한 이성에게 있어서 믿는다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증명되었기에, 이제 또한 계시의 외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그 내용을 무조건 믿음으로 수요알 것을 촉구했다.

종교개혁 후, 로마교 신학자들은 교회를 성경, 계시를 믿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 삼았다. 계시에 대한 증거들 가운데 교회는 일차적이며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다. 교회는 신앙에 대한 모든 동기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동기이다. 교회는 인간적 믿음을 산출할 수 있으며,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증명할 수 있다.

로마교의 이러한 변증은 전체적인 로마교 체계와 연관된다. 초자연적 계시는 자연적 계시의 토대 위에 수립되었다. 오로지 연속적 단계를 통해서만 초자연적 계시에 도달한다. 인간은 순전히 자연적인 것들에 있어서 먼저 증거들을 통해 자연신학에 이른다. 자연신학은 신앙의 전제다.

종교개혁은 원칙적으로 이러한 로마교의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다른 입장을 취했다. 종교개혁은 자신의 입장을 연속적으로 신앙의 단계로 이끄는 이성에서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에서 취했다. 종교개혁은 신앙은 오로지 하나님의 권위에만 의지하며, 오로지 성령에 의해서만 활동하게 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신학자들은 이 원칙을 항상 고수했던 것은 아니다. 계시의 진리에 대해 자주 자연신학과 역사적 증거들의 교리로 되돌아가곤 했다. 이런 맥락에서 개신교 내에 합리주의가 시작되었다. 합리주의는 데카르트를 통해 개혁교회 안에도 침투했다. 자연신학은 계시신학과 나란히 독립하여 서게 되었다.

 

[134] 변증학은 항상 존재 이유를 가졌고, 오늘날도 또한 그 정당성을 갖는다. 변증학은 내부와 외부의 모든 반대들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를 견지하고 변호해야만 한다. 그러나 변증학은 신앙에 선행할 수 없으며 계시의 진리를 선험적으로 주장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변증학은 진리와 진리에 대한 신앙을 전제한다. 변증학은 서론적 부분, 또는 원리적 혹은 근본적 학문으로서 신학과 교의학에 선행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신학적 학문으로서 신앙과 교의학을 전제하고, 교리가 노출된 반대에 대항하여 그 교리를 주장하려고 변호한다.

그러나 변증학의 잘못은 (1) 변증학 스스로를 기독교 신앙에서 분리하여 신학의 외부, 신학의 위에 그리고 신학 앞에 두었다. (2) 변증학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을 불리하여 종교적 진리가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순전히 지성적 증거들에 기초하게 되었다. (3) 그 결과, 변증학은 마치 지성을 통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고, 논증을 통해 경건을 산출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의 학문적 작업으로부터 지나친 기대들을 바라게 되었다.

종교에서 어떤 인간도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과 나의 영혼 사이에 개입되어서는 안된다. 내가 인간적인 증거, 틀릴 수밖에 없는 증거에 기초하는 한, 위로와 구원의 복 가운데 살고 죽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교에서는 학문보다 적은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강하고 확고한 확실성이 필요하다. 안식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증거에 있다.

 

18. 사변적 방법

 

[135] 초자연주의는 루소와 칸트, 레싱과 슐아이어마허에 무너졌다. 고전주의는 모든 영역에서 낭만주의, 주관의 지배와 자율성에 자리를 내주었다. 모든 객관적인 것들을 제거하고, 주관 자체를 충분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절대적 관념론은 온갖 끔찍한 결과들에 이르렀다. 프랑스 혁명은 인간의 이러한 자율성의 위험을 보여 주었다. 확고하고 권위를 가진 객관적인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주관으로부터 다시 객관적인 것에 이르기 위한 시도가 발생했다. 헤겔은 피히테의 주관적, 윤리적 관념론을 객관적 관념론으로 상승시켰고, ‘존재’의 관념을 ‘생성’의 관념으로 대체시켰다. 모든 세계는 하나의 과정, 논리적 관념의 발전이 되었다. 이러한 발전 가운데 종교 역시 자신의 자리를 갖는다.

헤겔의 정신은 그 교리들에 집중하여, 그로부터 그 역사적, 상징적 형태들을 제거하고, 그 교리들의 관념을 추적했다. 하나님, 미덕, 불멸과 같은 합리주의적 교리들이 아닌, 삼위일체, 성육신, 속죄와 같은 기독교의 최고로 높고 심오한 교리들이 대담한, 철학적 사변의 대상이 되었다. 이 교리들은 성경과 그 어떤 권위와도 상관없이 이성으로부터 필연적인 것으로 도출되었고,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증명되었다. 신학과 철학은 표면상 화해된 것처럼 보였고, 신앙은 사변적 이성을 통해 절대적 지식으로 바뀌었다.

 

[136] 이러한 사변적 방법은 합리주의적 시대의 변증적 방법보다 중요한 장점들을 가진다. 슐리이어마허와 헤겔은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고 상응하는 것으로 서로 동일시하였다. 또 종교란 인간의 삶 가운데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며, 종교는 독특한 현상이기에 인간 본성에 상응하는 고유한 기관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였다. 통속적인 합리주의를 초월했고, 주관과 객관의 조화를 지적했다. 그래서 종교가 나에게 현실이 되는 것은 오로지 내가 감정이나 이성, 혹은 인간 내부의 그 어떤 기관으로 종교를 수용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동일시한 것은 사변적 철학의 첫 번째 잘못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생각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반드시 어떤 것을 필연적으로 논리적으로 생각해야만 하기에 그것이 존재하는가? 사변적 철학은 후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고와 존재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어떤 결론도 사고에서 존재로 귀결되지 않는 까닭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는 사고의 발산이 아니라 힘의 행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사물들의 본질은 하나님의 생각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존재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은 존재를 전제한다.

 

19장. 종교 경험적 방법

 

[137] 역사적 논증 제시와 사변적 논증 제시가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자, 많은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신자들의 종교적 경험에서 취했고, 거기서 구원의 확신과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근거들을 도출하려고 추구했다. 특히 에어랑엔의 교수인 프랑크는 그리스도인이 왜 자신의 신앙이 내포하는 그 모든 것을 진리로 수용하는가 하는 사실을 설명하려고 했다. 확신은 영혼의 상태이며, 그와 같은 것으로서 하나의 체계를 배제한다. 자신의 이러한 체계는 확신을 대상으로 삼으며, 확신은 보증된 ‘진리의 내용’으로까지 확대된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이로부터 기독교적 진리의 체계를 건설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의 객관적 요소들, 하나님, 그리스도, 성경 등을 의지하며, 성경을 무조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게 되는가?하는 기독교 신앙의 진리들에 관련해 사람이 확신에 이르는 길들을 전개했다.

 

[138] 프랑크는 한 사람이 기독교적 신앙의 진리들에 관해 확신을 갖는 것은 역사적 혹은 합리적 증거들이나 성경 또는 교회나 전통의 권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중생의 경험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결국 기독교적 확신은 외적인 증거들이나 외적인 권위가 아닌, 그리스도인 자신 안에 자신의 도덕적 경험과 자기규명, 즉 자신의 중생과 회심에 근거를 둔다.

프랑크는 중생 경험에서 시작하여 점차 모든 기독교 교리(죄, 죄책감, 하나님 삼위일체, 성육신, 부활 등)에 이르게 했다. 우리는 마치 이 모든 진리들이 성경과 교회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의 중생 경험에서 도출될 수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프랑크는 존재적 원인과 인식적원인, 신앙의 진리에 대한 객관적 근거와 어떤 사람이 그 진리의 확신에 이르는 주관적 방법을 서로 끊임없이 혼동했다. 그에게 있어서 확신은 본질적으로가 아니라 인식론적으로 진리에 대한 보증이다. 실재는 과연 확신에 대한 존재론적 근거이며, 확신은 실재에 대한 지적 근거다. 기독교의 객관적인 진리들과 사실들은 본질적으로 원인적으로 신앙에 선행하지만, 인식론적 의미에서는 그것들이 신앙에 뒤따른다. 철학에서 인간의 자기의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는 신학에서 그리스도인의 자기의식, 중생의 경험에서 출발한다.

(1) 프랑크의 출발점, 즉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순전히 추상적이다. 그 확신은 처음부터 그리고 지속적으로 객관적인 것들, 외부로부터 신자에게 다가오는 구원의 요소들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2) 프랑크 자신은 중생이 기독교 신앙의 객관적 진리에 대해 충분히 확신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객관적인 것이 선행한다면, 이것은 또한 반드시 전체 체계의 순서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3) 프랑크가 그리스도인의 확신으로부터 객관적 교리들을 수립하는 방법은 기독종교와 신학에서 적합하지 않은 방법이다. 그것은 사변철학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변철학은 자신의 출발점을 일반적 원리, 그리고 전적으로 추상화된, 모호한 원리에 두기 때문이다.

(4) 이 방법은 또한 모든 기독교적 경험과 모순된다.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결코 객관적 진리를 그런 식으로 확신하지 않았다.

(5) 프랑크에게 있어서 자연적 지식에서 영적 지식으로의 이동과정은 불분명하고 또한 그 둘 사이의 연관이 분명하지 않다. 중생할 때, 인간 안에 새로운 자아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한 인간의 자아가 새롭게 되는 것이다.

 

[139] 이멜스는 진리의 확신을 형성하는데 경험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나, 경험에 프랑크와는 다른 의미를 부가한다. 이멜스는 하나님이 자신의 계시와 관련하여 자신의 자기 증명을 통해 우리 마음에 일으키고, 우리 편에서는 신앙으로 수용되는 인상들만을 고려한다.

제이베르크는 프랑크처럼 중생에서 출발하지 않고, 이멜스처럼 신앙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런 일치와 더불어 세 가지 다른 점이 동반한다. (1) 제이베르크는 신앙과 더불어 사랑도 역시 출발점으로 삼는다. (2) 신앙을 수동적인 면이 아닌 능동적인 면에서 간주하고, 그것을 사랑과 더불어 “인격적인 체험”, “실제적인 취급”, “직접적인 느낌”으로 이해한다. (3) 이멜스에게 있어서 객관적 요인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즉각적으로 신앙에 주어진 반면, 제이베르크는 오로지 결과에서 원인에 이르는 추론의 길을 통해 신앙에 이를 수 있다.

 

[140] 경험을 신앙의 진리에 대한 토대와 지식의 근원으로 승격시킬 때, 세 가지 위험에 직면한다. 첫째, 역사적으로 종교에 나타나는 것(창조주, 독생자, 성령으로 잉태된, 동정녀 마리아 등)은 우리 경험 밖의 것들이다. 사도신경의 그 어떤 조항도 “내가 믿사오니”를 “내가 경험하오니”로 대체될 수 없다.

둘째, 기독교의 역사적 사실들을 종교적 경험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면, 오로지 추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신자는 기독교의 역사적사실들을 오로지 성경으로부터 알고, 그권위에 의거하여 그것들을 수용한다.

셋째, 역사적 기독교의 진리는 최종적 근거로서 경험에 기초할 수 없다. 종교적 경험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원리로서, 종교적 영역에서 사실상 무정부주의, “개인적 문제로서의 종교”로 변질 된다.

 

20. 윤리 심리학적 방법

 

[141] 종교 경험적 방법은 어려 면에서 윤리 심리학적 방법과 일치한다. 윤리 심리학적 방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있어 기독교란 일반적으로 논증될 수 있는 교리라든가 증명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겨냥한 종교적, 윤리적 힘이다.

칸트의 철학 체계에 따르면 우리 지식은 두 가지 근원, 즉 사물에 대한 감성과 우리 지식의 형태에 대한 지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 위에 여전히 이성, 순수 이성있다. 이론적 이성은 절대적, 무제한적, 초월적인 다양한 원리들 혹은 관념들을 형성한다. 이 과념들은 특히 세가지 인데, 하나님, 자유 그리고 불멸이다. 이 관념들은 이성의 객관적 진리 가운데 표현될 수 없고, 다만 주관적으로 이성의 본성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은 단지 이론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실천적이다. 그것은 자기 내부에 도덕적 법, 정언명령을 지니며 우리에게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이 여전히 자연 질서와는 다른 질서, 즉 도덕적 세계 질서에 속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인간은 최고선을 목적으로 하는데, 이것은 삶의 감각적 대상들을 훨씬 초월한, 다름 아닌 미덕과 행복의 일치이다. 만일 우리 내부와 외부의 도덕적 세계 질서가 언젠가 자연 질서를 정복한다면, 자유와 더불어 하나님과 불멸도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는 실천이성의 공리들이다. 공리들의 실재는 도덕법에 의해 요구되며, 실천이성은 공리들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누가 이 공리들을 실천이성에 도출하는지 선명하지 않다. 두 가지 실천이성에는, 선행하는 것과 후속하는 것, 의무를 알려 주는 것과 그로부터 추론을 통해 관념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있다. 그래서 실천이성 자체는 다시금 이론적이 된다. 또한 이론적 혹은 실천적 이성이 관념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칸트는 도덕적으로 성공한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이성적 존재가 공리들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자유, 하나님, 그리고 불멸의 존재의 개념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 논리적 공리들을 취급하는 것이다.

 

[142] 칸트가 신학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가 현상과 실체, 설명될 수 있는 실재와 경험될 수 있는 실재, 존재 세계와 가치 세계, 아는 것과 믿는 것, 지식과 종요, 이론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 사이를 분리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신학에서 칸트주의는 리츨과 립시우스에 의해 갱신되었다. 리츨과 그의 학파의 신학 원리들은 첫째, 리츨은 종교와 학문 그리고 더 나아가 신학과 형이상학 사이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종교의 본질은 두 가지 요소인데,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의존과 세상에 대한 독립과 자립이다. 둘째, 비록 종교와 학문이 절대적으로 구분된다 할지라도, 리츨은 그 둘 사이에 다시금 윤리적 증거를 통해 연관 지으려고 시도한다. 윤리적 증거는 "인간 정신 생활의 필수적인 자료", 정신의 독립성과 자기평가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주장하는 정신은 반드시 하나님의 존재, 즉 세상의 영적, 도덕적 지도자를 수용해야 한다. 우리에게 도덕적 증거를 제공하는 신 관념은 이제 사실상 기독교적 신 관념과 일치한다. 셋째, 윤리적 증거에 대한 이러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리츨은 분리선상에서 진행했고, 그래서 모든 형이상학은 신학에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143] 넷째, 플하톤적 혹은 형이상학적 견해를 대체한 이러한 리츨의 인식론은 그의 신학에 있어서 가증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람이 종교를 알기 위해서 반드시 종교 자체에 그 입장을 두어야 한다. 종교란 독특한 것이며 결코 자연에 대한 학문적 지식의 열매가 아니다. 종교란 항상 실증적이며, 고유한 근원을 갖고, 계시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종교란 오로지 사람이 종교의 범위 내에서, 즉 계시에서 자신의 입장을 취할 때만 드러날 수 있다. 그러므로 교의학을 위한 앎의 근원은 리츨에 의하면 신약, 혹은 더 낫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인격에 나타난 계시이다. 다섯째, 만일 기독종교가 그리스도의 인격에 연관되고 신뢰로서의 신앙이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삼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혹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인정받고, 어떤 길을 통해 그 실재에 관한 확신이 생기는가? 헤얼만은 예수의 "내적인 생명"이 오직 그의 도덕적 위대성, 도덕적 지식 그리고 도덕적 능력을 포함한다고 생각했다. 여섯째, 리츨 학파에서 신앙의 내용은 종교적, 윤리적 차원에 제한된다. 리츨 자신이 말하기를 "모든 종류의 종교적 지식은 직접적인 가치판단이다." 종교는 독립적인 가치판단으로서, 전체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와 연관되고, 인간이 세상에 대한 통치를 즐기는가 혹은 그렇지 못하는 가에 따라 만족감 혹은 불만감을 느끼게 하며, 학문으로부터 전적으로 독립적이다.

 

[144] 리츨과 마찬가지로 립시우스도 역시 종교와 신하에서 칸트에게 되돌아갔고, 그는 또한 학문을 내적 경험과 외적 경험의 영역에 제한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정도 형이상학의 정당성을 여전히 인정했다. 신앙은 학문적 확신이 아니라 윤리적 확신으로, 개인의 경험된 확신에 기초한 경험의 확신이다. 이 확신은 다른 사람에게는 환상 이외의 아무것도 아닐 수 있으나, 그것은 주체 자체에게 확실한 것이다. 신자들의 개인적 경험은 역사적 계시를 확증하는데, 그래서 믿는 그리스도인은 초감각적 실재들을 고백한다.

헤얼만은 믿는 것과 아는 것을 엄격하게 분리시켰으나 립시우스는 두 가지 내용이 각자의 근원에서 나오게 했다. 교의학이란 신앙의 내용을 증명할 수 없고, 믿는 것을 앎의 단계로 들어 올릴 수는 없으나, 기독교적, 목적론적 세계관을 인과적 세계관, 어디선가 획득한 세상 지식과 연관시킬 수 있고 연관시켜야만 한다. 그래서 그것은 두 세계관 사이에 모순이 없으며, 갈등이란 외적인 것이며, 반드시 통일성이 있다.

 

[145] 종교와 기독교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러한 윤리적, 실재적 방법은 종교 경험적 방법과 긴밀한 연관을 맺는 것으로 증명되기에 역사적 논증 제시와 사변적 논증 제시보다 확실히 선호된다. 그러나 이 방법도 심각한 반대를 면하기 어렵다. 첫째, 가치판단이 모든 형이상학으로부터 분리된다면, 그것은 교의학의 토대와 내용이 될 수 없다. 종교란 그 대상의 실재에 대한 확신을 포함한다. 종교적, 윤리적 평가는 관련된 인물 혹은 사건의 진리를 전제한다. 만일 한 대상에 대한 평가가 그 실재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환상, 상상의 창작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146] 더 심각한 반대는 그 경향이 항상 신앙과 지식이라는 어떤 이원론에서 출발하기에 또한 항상 반드시 거기서 끝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학문적 연구 결과들과 종교적 신앙의 선언들 둘 다는 반드시 단일체로 연관되거나, 혹은 최소한 모순되거나 적대적이지 않고 나란히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21. 신앙

 

[147] 하나님의 계시가 알려지는 참된 수단은 의식의 행위, 즉 신앙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 외부에,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의 체계다. 하나님의 계시는 복음이며, 약속이며, 용서와 구원의 약속이다. 이 약속은 우리 편에서 오로지 신앙으로만 응답할 수 있다. 오로지 신앙을 통해서만 약속은 우리 소유가 된다. 그러므로 신앙은 계시에 대한, 종교와 신학에 대한 내적 인식의 원리이다.

 

[148] 신앙은 종교에서, 구체적으로 기독교에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성경에서 신앙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복음의 약속들이다. 그래서 신앙이란 확실한 지식, 진리로 여기는 객관적인 지식으로 녹아들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복종, 그리고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약속들에 대한 개인적 전유를 포함한다. 또한 신앙은 종교적 의미에서 직접적 확신과 구분된다. 이 구원하는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대상으로 삼는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껴안는다. 신앙은 우리를 성경에 단단히 묶어 매고, 우리로 하여금 고난과 죽음의 때에 성경을 신뢰하게끔 한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적 본성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직접적인 확신과 구별된다. 기독교적 의미에서 신앙이란 자기 부정, 자기 자신의 생각과 뜻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 자신에 대해 불신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성령으로 사람을 신앙에 이르게 하며, 그의 모든 생각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

로마교에 있어서 신앙이란 성경과 교회에 있는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계시의 진리들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승인”이다. 신앙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아주 해로운 결과들을 낳았다. 일차적으로, 신앙이란 사실상 다름 아닌 이성을 훨씬 초월하는 신비로운 교리, 즉 명시적으로 그 모든 다양한 교리들이나 혹은 암시적으로 어떤 필수적인 교리들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되고 말았다. 만일 신앙이 지적인 동의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이 신앙은 구원에 충분한 것이 될 수 없다. 그 신앙은 반드시 다른 미덕에 의해, 즉 사랑에 의해 보충되어야 하고, 사랑에 의해 형성된 신앙이 된다. 그래서 무게중심은 완전히 사랑, 즉 선행 공로에 놓여진다.

종교개혁은 이러한 로마교적 신앙의 견해를 모든 면에서 수정했다. 첫째, 종교개혁은 역사적 신앙과 구원하는 신앙 사이를 원리적으로 구분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하는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만장일치로 고백했다. 그 신앙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의 산물도, 또한 일반은혜의 열매도 아니었다. 그 신앙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의 열매, 새롭게 거듭난 사람의 행위였고, 따라서 또한 구원에 완전히 충분한 것이었다.

 

[149] 성경에 의하면 이 신앙은 자기 자신의 확신을 수반한다. 그것은 바라는 것들의 보증과 보지 못하는 것들의 확신이다. 확신이란 성경 전체를 통한 신앙의 특징이다.

칸트는 경험적, 논리적, 윤리적 이 세 가지의 확신을 수용했다. 칸트의 윤리적 확신 이론은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종교와 신학의 토대를 윤리적 확신에서 추구했다.

그러나 확신이란 항상 의식의 상태이다. 확신이란 발견되고 인정된 진리 안에 있는 인간 의식의 안식이다. 그러므로 확신 자체가 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그렇게 불리는 것은 확신에 있어서 진리가 기초한 근거들이 윤리적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또한 학문적 진리와 윤리적 진리가 기초한 근거들은 이론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으로 서로 분리되거나 서로 마주보게 해서는 안된다. 칸트가 자신의 두 종류의 확신 가운데 수용한 이원론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주관적으로 머리와 마음, 객관적으로 가시적 사물들과 비가시적 사물들은 그런 식으로 둘로 나뉘지 않는다. 또한 윤리적 확신에 있어서도 어떤 주장이 참된 것으로 인정되고 수용되는 도덕적 근거들을 달아보고 판단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의식이다. 의지가 지성으로 하여금 어떤 진리를 수용하게 할 수 있을지라도, 그 수용 자체는 지성의 행위이다. 그리고 지성이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지성 자체가 어느 정도 진리를 인정하고 깨닫기 때문이다. 신앙의 확신이란 이론적 증명을 통해서도 의지의 결정을 통해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22. 신앙의 근거

 

[150] 신앙에 이르기 위해서는 신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도록 우리의 마음에 놀라운 방식으로 행하여 우리 믿음을 일으킨다. 믿는 것은 항상 자발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로 우리의 의지를 굽혀 우리로 하여금 지성적으로 믿게 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자신의 통찰력이 아닌, 신적 권위에 근거하여 진리를 수용한다. 믿는 것은 물론 지성의 행위지만, 그것은 은혜를 통해 의지가 굽혀지는 것을 전제한다. 지성은 반드시 의지를 통해 신앙으로 확립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증거는 신앙의 최종 근거이다. “당신은 왜 믿는가?”라는 질문에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는 이것 외에 또 다른 근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그에게 “당신은 왜 하나님이 말씀했다고, 즉 성경에서 말씀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는 여전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내적으로 활동하여 자신이 그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신앙의 근거지만, 은혜, 의지는 신앙의 원인이다. 증거들은 신앙 가능성의 동기들이 될 수도 있으나, 의지가 결국 바로 그 신앙의 동기이다. 신앙의 궁극적 근거는 개신교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라 로마교에 있어서도 주관에 있다.

 

[151] 칼빈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교회에 의해서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결정 이전에 이미 확립되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교회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토대 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자기 고유한 권위를 동반하고, 스스로에 기초하며, 자증한다. 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은 오로지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다. 그러므로 성령은 경건한 자들의 신앙에 대한 보증이자 확증이다. 칼빈은 이 성령의 증거에 대한 교리에서 개인적인 계시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의 경험을 기술했다. 성령의 이러한 증거는 신자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성령의 전체 사역과 격리된 것이 아니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오로지 그 사역을 통해서만 모든 교회가 생겨나고 존재한다. 구원에 대한 모든 적용은 성령의 사역이다. 또한 성령의 증거는 성경에 완전히 포함된 하나님의 진리에 관해 신자를 견고하게 세우는 것이다.

 

[152] 성경은 세상에 대한 인간의 이 모든 관계들을 종교적으로 이해하고 유신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우리 앞에 선행한다. 더 나아가 성경은 성령이 인류와 세상 안에 있는 모든 생명, 특히 지적, 윤리적, 종교적 생명의 원리이자 저자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성령의 사역은 인간의 지적, 윤리적, 종교적 생활 가운데서 더 높은 형태를 취한다. 그것은 외부 세계의 연관된 현상들이 내부 작용을 통해 옮겨지는 능력인 이성, 양심, 신적인 감각의 형태가 된다. 진리는 인간 정신이 있기 전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자기 내부에, 만물이 존재하는 로고스 안에 기초한다. 인간 편에서 단지 요구되는 것은 그가 진리를 깨닫고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증거하며 사유와 인식을 통해 보증하는 것이다.

기독종교는 자연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일반계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외적 원리로 삼는다. 이런 맥락에서 내적 원리는 반드시 조화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말씀한 동일한 성령만이 우리 마음에 진리에 대해 증거할 수 있고, 우리 마음을 완전한 확신에 이르게 한다. 신자들의 마음에 있는 성령의 증거는 성경에서 아주 선명하게 가르쳐진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객관적인 계시인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말씀으로서의 성경 안에 담겨 있다.

증명이란 오로지 파생된 명제들에 관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자에게 증명될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의 권위는 그 자신에 근거하기에 증명될 수 없다. 성경은 자증하며, 따라서 신앙의 최종적 근거다.

 

[153] 신자는 계시의 신적 권위에 대한 깊은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록 역사적 증거들과 합리적 증명이 그 누구도 회심시키지 못할지라도, 그 증거들과 증명은 신앙을 변호할 능력을 지닌다. 신자들의 신적 계시, 성경에 대한 증거는 보편적 기독교적인 것이다. 교회가 모든 역사를 통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 것은 강력한 증거가 된다.

이 계시에 대한 신앙이 일깨워지고 강화되는 것은 어떤 경험을 통해서인가? 우리로 하여금 실재적으로 믿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를 굽히며, 우리의 지성을 밝히고, 강요하지 않되 강력하게 우리의 생각과 심사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능력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령의 사역이다. 믿는 것은 지성의 행위이며, 계시에 대해 증명을 거치지 않은 인간 의식의 직접적인 연관이다.

 

[154] 예수에 의해 보혜사, 진리의 영으로 약속된 성령은 일차적으로 사도들, 그 다음 그들의 말을 통해 다른 신자들도 역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영화롭게 한다. 이를 위해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며, 거듭나게 하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양자 됨과 하늘의 상속을 보증하고,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준 모든 것들을 알려 준다. 성령은 교회에서 모든 기독교적 미덕들과 모든 영적은사의 주인이다. 성령의 증거란 종교적, 윤리적 속성을 지니며, 고유한 신앙생활과 가장 깊은 연관을 맺는다. 이것은 성령이 우리 자신의 영안에서, 영과 함께, 영을 통해 신앙 안에서 제시하는 증거다. 신앙 자체는 그 시작부터 성령의 사역이며, 양자의 영 안에서 그 보증과 확증을 받는다. 믿는 것 자체가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우리의 영을 통한 성령의 증거다.

 

[155] 교회들 상호 간에 가장 중요한 신앙의 조항들에 있어서 여전히 의견 차이와 분쟁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 간한 기독교회의 일치는 다른 어떤 교리보다 훨씬 더 크게 일치한다. 성경은 개별적 신자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지만, 모든 시대의 교회와도 관련된다. 성경은 모든 교회에, 모든 시대와 장소의 신자들에게 주어졌다. 성령의 증거는 사적인 견해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 온 기독교, 모든 거듭난 사람들의 증거다.

 

23. 신앙과 신학

 

[156] 기독교회는 신앙으로 만족하지 않고, 거의 처음부터 종교적 진리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여 특수 학문인 신학이 태어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학문에 대한 욕구가 신앙 자체에 담겨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확신이며 모든 의심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며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적 학문의 타당성과 가치는 기독교회 내에서 종종 의문시 되었다.

17세기 개신교회 내에 스콜라적 신학 취급이 진척되자 사방에서 반동이 일어났다. 칼릭스투스와 콕케이우스, 슈페너와 진젠도르프, 폭스와 웨슬리 등 모두 진리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교리에서 삶으로, 신앙고백서에서 성경으로, 신학에서 종교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교의학은 기독종교의 순수성과 단순성을 왜곡시켰으며, 종교적 생활을 죽이고, 차갑게죽은 정통주의를 촉진시키며, 암묵적 신앙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며 종교를 학문과 마칠시켰고, 교양 있는 계층을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소외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만일 계시가 오로지 생명의 전달에 있고, 종교가 오로지 감정의 상태에 있다면, 고유한 신학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시란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들에 대한 체계로서, 생각들의 세계를 포함하고, 그 핵심은 로고스의 성육신이다. 그리고 종교란 느낌이나 감정만이 아니라, 또한 신앙, 의식적 생활, 마음과 머리로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신비주의와 분리주의의 온갖 영적 질병들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존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진리를 통해 오류와 거짓으로부터 학문적 사고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신학의 정당성은 기독종교의 본질에 근거한다. 계시는 모든 인간에게 향한 것이며, 온 세상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다. 계시는 가장 심오한 사고를 위한 재료를 제공하고, 학문적 영역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지식과 나란히 그리고 유기적으로 연관시킨다.

 

[157] 신학이 그리스도의 신앙 공동체에 등장한 것은 유아기적 천진난만함을 지나 생각하는 의식이 깨어난 뒤에 비로소 생겨났다. 계시의 사상들을 숙고하고, 다른 지식과 연관시켜 여러 가지 공격들을 방어하기 위한 필요가 점차 생겨났다. 학문적 신학은 철학의 도움으로 태어났다. 교부들은 교리들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철학을 널리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작업을 수행할 때 철학에 연관된 위험을 완전하게 의식하고 그에 대한 선명한 통찰력을 가졌으며, 그들이 수행했던 작업의 근거들을 명학하게 해설했고, 사도들의 말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칙으로 분명히 인식했다.

신학의 실재적인 ‘내적 인식의 원리’는 신앙 그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사유, 기독교적 합리성이다. 신앙은 스스로를 인식하며 확실한 것이다. 신앙은 계시에 기초한다. 신앙은 지식을 포함하며, 그 지식은 전적으로 성경적 의미의 ‘안다’라는 실천적인 속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신학은 신자들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신학의 주체는 제도적 교회가 아니라 유기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다. 신학은 기독교적 사고의 열매이다.

 

[158] 그러므로 신앙과 신학은 진실로 구별된다. 신앙과 신학은 [신앙의] 기본적 성향과 행위, 주입된 신학과 획득된 신학으로 구별되었다. 신앙은 계시된 진리들에 대한 찬성이며, 신학은 계시된 진리들에 대한 지식이다. 신앙은 또한 하나님과 신적인 일들에 관한 어떤 지식을 틀림없이 포함하며, 이 지식은 그 진리들에 대한 이유들 보다는 존재에 더 연관된다. 그러나 신학자는 그 사상에 이르기까지 관통하고, 그 진리들의 연관성을 추적하며, 사유함으로 그것들로부터 다른 것들을 도출한다.

종교개혁은 로마교의 암묵적 신앙 교리를 단호히 물리쳤다. 구원하는 신앙이란 어떤 이해할 수 없는 조항들을 참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격적 신뢰였기 때문이다.

 

[159] 신앙과 신학의 관계를 연구함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최소한 어떤 진리들을 반드시 알고 진리로 여겨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로마교 신학은 이에 대해 두 가지 혹은 네 가지 조항들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개신교 신학은 하나님의 자비의 위대함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진실한 신앙에 필연적으로 고유한 지식의 수량을 결정할 수 없다는 결론을 지었다.

신앙과 신학 사이에는 많은 일치가 있다. 그것들은 원리로서 하나님의 말씀, 대상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신학은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신앙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내용도 가질 수 없다. 신학이 신앙을 포기하는 순간, 그것 자체는 더 이상 신학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신학은 또한 사고를 통해 이런 신앙의 입장을 결코 초월하지 않는다.

신앙과 신학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아닌 정도의 차이가 있다. 신앙은 사실들에 머무르는 반면, 신학은 ‘왜’ 그리고 ‘어떻게’를 묻는다. 신앙은 항상 개인적인 것으로, 대상을 항상 인간 자신과 연관시키고, 교리들의 종교적 취지에 직접적인 과신을 가진다. 반면에 신학은 대상을 어떤 의미에서 객관화하며, 진리 자체 내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진리를 살피고자 애쓴다. 신학은 진리의 통일성과 진리의 내적인 연관성을 추적하며 하나의 체계에 이르기를 추구한다. 신앙은 중점 대상에 집중하는 반면, 신학은 그 전반적인 범주에까지 확대하여 연구한다. 하지만 신앙과 신학은 어떻게 차이가 나든 서로를 필요로 한다. 신앙은 신학의 세속화를 방지하고, 신학은 신앙의 분리주의를 방지한다.

 

[160] 신학에서 지식이 획득될 수 있다 할지라도,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다. ‘안다’, ‘통찰하다’, ‘이해하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안다’는 존재, 사실에 연관되고, ‘통찰하다’는 성격, 무엇에 연관되고, ‘이해하다’는 내적 가능성, 사물의 어떻게에 연관된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것의 없다. 사실상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단지 완전히 우리의 능력 안에 있는 것, 즉 우리가 만들고 깨뜨리는 범위 안에 있는 것들뿐이다.

로마교에 있어서 신비들은 일차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 신비들은 인간의 지성 자체를 훨씬 능가하는 더 높은 초자연적 질서에 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러한 자연적 질서와 초자연적 질서의 대조를 죄와 은혜의 대조로 대체했다. 종교개혁은 신비의 본질을 인간 스스로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인간의 지성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두었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신비에 대한 추상적이고 초자연적인 그리고 학문적으로 불가해한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신비는 자연적 인간의 눈에, 그가 얼마나 지혜롭든지 간에, 어리석은 것인 반면, 신자들에게는 계시되었고, 그들은 그 계시가운데서 신적 지혜와 은혜를 보았다.

신학의 목적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단지 사실을 ‘안다’는 것이 아니며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그 지식은 이것들보다 더 나은, 더 영광스러운 ‘통찰의 지식’으로 생명이며 영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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