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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의학1 (6-8) - 헤르만 바빙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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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의학1 (6-8) - 헤르만 바빙크

이참리 2020. 5. 15.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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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의학 1
국내도서
저자 :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 박태현역
출판 : 부흥과개혁사 20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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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일반원리

6장 원리의 의미

 

[61] 교의학자는 처음부터 자신의 입장을 기독교에 두지 않고, 다만 먼저 기독교 외부의 일반 종교에 두었는데, 이는 그 관점에서 차차 기독교 신앙의 진리들로 나아가려는 것이었다. 이런 교의학적 출발점은 먼저 특히 리츨과 프랑크에 의해, 그리고 후에는 많은 이들에 의해 전적으로 정당하게 포기, 거부되었다. 만일 트륄치가 종교철학을 교의학의 토대로 삼고자 한다면, 결국 기독교적 교의학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먼저 교의학의 토대를 놓은 뒤 그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만일 교의학, 그리고 일반적으로 신학이 다른 학문들처럼 자기의 고유한 원리들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라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62] 교의학의 고유한 원리들을 알려고 할 때 먼저 일반적으로 ‘원리들’ 이라는 명칭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아낙시만드로는 사물의 근원을 ‘무한’에서 발견하고 ‘아르케’(시작, 근원, 제일 원리)라는 명칭으로 지적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이 단어는 사물의 궁극적인 원인을 의미했다. 차후 논리학에서는 세 가지 종류의 원리들로 구분되었는데, 본질적 기초원리, 존재의 기초원리 그리고 인식의 기초원리이다. 이 구별은 어떤 사물에 대한 본질, 존재, 혹은 지식이 다른 것으로부터 반드시 도출되어야 한다는 것에 따른 것이다.

이 ‘아르케’는 신학에도 전수되어, 성경에서 시간적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사역적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70인역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식의 근본”으로 불리고, 골로새서 1장 18절과 요한계시록 3장 14저에서 그리스도는 창조와 부활의 ‘아르케’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학문, 구체적으로 다시금 신학의 본질적 기초원리 혹은 존재의 기초원리였다.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절대적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본질적 기초원리, 주효한 원인인데, 하나님은 완전히 자유로우며, 자의식을 가진 참된 분이기 때문이다.

 

[63] 이제 이 본질적 기초원리와 인식의 기초원리는 구별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편과 길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따라서 신학에 있어서 인식의 기초원리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 혹은 자기 전달이다.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의 자의식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소개하고, 그 지식을 통해 다시금 하나님 자신에게 영광과 존귀를 돌리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반드시 인간 자신의 내면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 가지 기초원리들을 알게 되었다. 첫째, 신학의 본질적 기초 원리로서의 하나님, 둘째 외적 인식의 기초원리,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데, 이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도구적이고 임시적인 성격을 지닌다. 셋째, 내적 인식의 기초원리, 성령을 통해 인간에 대한 조명이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을 저자로 삼으며, 하나님에 대한 동일한 지식을 그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7. 학문의 원리들

 

합리론

 

[64] 학문이란 항상 주체와 대상 사이의 논리적 관계에 속한다. 이 둘을 서로 연관시키는 관계가 우리의 학문에 대한 견해를 규정짓는다. 항상 이 두 가지 경향(합리론과 경험론)이 있어 왔는데, 이 둘은 서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합리론에서 감각적인 인식은 지식을 제공할 수 없는데, 이는 변하는 현상들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물에 잠긴 ‘구부러진’ 막대, ‘떠오르는’ 태양 등이다. 이런 것들은 오로지 사고 작용을 통해 그 거짓을 정화시킬 수 있다. 다라서 사고 작용은 감각적 인식보다 훨씬 더 우수한 것이다. 감각적 세계는 기껏해야 우리 지식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지만 근원은 아니다. 인간의 정신은 모든 지식을 스스로 자신의 방편들을 통해 사유함으로 산출할 수 있다. 이 합리주의는 항상 단 하나의 근본적인 사상, 즉 추구해야 할 지식의 근원이 주체에 있다는 사상을 가진다. 우리 내면의 표상들과 우리 외부의 사물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이는 전자가 후자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물체는 정신에 작용할 수 없으므로 표상들과 같은 정신적 현상들은 오로지 정신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65] 이 관념론에 대한 반대들도 있다. 먼저 관념론은 모든 경험과 충돌했다. 관념론은 왜, 어떻게 모든 사람이 자연히, 무의식적으로 객관성과 독립적 실제를 인식된 현상들에 돌리고, 순전히 내적인 의식 상태로 역지 않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반면에, 우리는 내적 상태와 외적 사물들, 우리 내부와 우리 외부에 있는 것, 꿈과 실재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경험론

 

[66] 합리론과 정반대 편에 위치한 것은 경험론으로서, 그 선구자들은 이미 그리스의 ‘원자론들’과, 그 뒤 중세의 ‘유명론’으로 등장했다. 경험론은 다양한 형태와 체계로 등장했으나, 그 출발점은 항상 감각적 인식만이 우리 지식의 근원이라는 원리였다. 합리론이 객관적 세계를 전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인간 정신에 초점을 맞춘 반면, 경험론은 인간 의식을 완전히 우리 외부 세계에 종속시켰다. 인간은 지식 추구에 있어서 다름 아닌 오로지 인식 능력만을 수반할 뿐이며, 모든 지적인 활동은 이 능력에서 비롯되고 기원한다. 따라서 타고난 개념들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학문적 연구자는 반드시 모든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단지 신뢰할만한 지식이란 오직 인식에 의해 수립될 때 가능하다. 따라서 초감각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지식이란 불가능하다.

이러한 경험론은 심각한 반대들의 압박을 받는다. 먼저, 인간의 정신이란 지성적 활동에 있어서 수동적이거나 수용적이 아니라. 항상 능동적으로 등장한다. 보고 듣는 것은 눈이나 귀가 아니라, 눈과 귀를 통해 보고 듣는 사람 자신이다. 가장 단순한 인식과 표상은 이미 자각을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영혼의 활동을 전제한다.

학문에 대한 경험론의 견해 또한 심각한 의문의 도전을 받았다. 학문이란 그 성격상 보편적인 것, 필연적이며 영원한 것, 논리적인 것에 대한 지식, 사상과 관련된 것이다. 현상들, 사람들. 사실들. 등에 대한 지식은 좋은 것이나, 그것은 단지 예비적 작업에 불과하다. 분석이 선행하나 반드시 종합이 뒤따라야 한다. 결국 정신적 세계의 것들, 선과 악, 법과 관습, 종교와 도덕, 우리의 사랑과 증오를 초래하는, 우리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혹은 또한 우리를 넘어 뜨리고 괴롭게 하는 모든 것들의 가치 세계는 엄청난 비가시적 전체 세계로서 우리가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의 실재이다.

 

실재론

 

[67] 인식론의 출발점은 지식의 객관성과 진리에 대한 인간의 일상적 경험,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확신에 속해야 한다. 철학이란 인식 능력과 인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견하여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식의 능력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인식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환상으로 만드는 각각의 해결책은 인식론의 판단을 받는다. 성공적인 인식론이란 한편으로 경험의 밑바탕을 떠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 문제의 핵심 전체를 꿰뚫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 능력에 대한 이론과 합리론-경험론 사이의 차이는 두 가지 요점에 놓여 있다. 첫째, 지성에 대한 독특한 견해로서 지성은 고유한 속성을 수반하고 그에 따라 고유한 방식으로 활동한다. 둘째, 이 지성은 자기 고유한 속성에 따라 활동하지만, 오로지 인식된 사물로부터 자연적으로 그 사물에 잠재된 논리적 요소를 추출하는 것이다.

 

[68] 인간의 모든 지식은 감정적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스콜라주의의 잘못은 감각적 인식을 무시하고 기존의 개념들을 가지고 곧바로 학문을 시작한 것이다. 진리는 책들로부터가 아니라, 반드시 현실 세계로부터 끌어내야 한다. 관찰은 모든 참된 학문의 근원이다. 모든 감각은 이러한 감정적 인식에 있어서 자기의 고유한 성질과 임무를 지닌다. 각 감각은 대상 전체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대상의 특정한 속성들만을 인식한다. 따라서 인간 정신은 가장 단순한 인식들에 있어서 이미 활동하고 있기에, 정신이란 외부 세계가 원하는 대로 단지 쓰는 ‘서판’이 아니며, 대상이 단순히 반영되는 거울도 아니다. 하지만 의식 자체 안에 있는 모든 인식의 상은 다양한 감각들을 통해 대상으로부터 얻어진 요소들로 형성된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의 의식 가운데 있는 인식의 상, 표상과 우리 외부의 실재, 대상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하는 것이다. 사물과 그 표상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외부에 있는 사물은 거기에 실재적인 존재가 있으나, 사물의 표상은 우리 안에 존재하며 단지 관념적 실존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정신은 이러한 표상들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적인 지식은 감각이 아니라 지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상들을 인식하는 것은 필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유일하거나 가장 고도의 정신 활동은 아니다.

 

[69] 학문의 ‘기관’은 감각적 인식이 아니라 지성이다. 지성의 표상들로부터 형성한 개념들에 있어, 지성적 개념들과 현실 세계는 어떤 관계인가?

여기에서 유명론과 실재론이 갈라진다. 두 학파는 본질적으로 이미 그리스 철학에 나타났었다. 유명론의 기본적인 생각은, 보편적 개념의 실제를 부인한다. 그들은 ‘생각들’을 단지 ‘지성의 환상들’로 여겼다. “실로 내가 말은 보지만 내가 말됨을 보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 개념들이란 단지 실재가 상응하지 않는 ‘목소리’, ‘상념들’ 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현실에는 보편적인 것이란 없고 단지 특수하고 개인적인 것만 있으며, 인간성이란 없으며 다만 개인적인 사람만 있다고 말했다. 만일 유명론이 옳다면, 우리가 한 그룹의 사물들의 상응하는 특징들을 한 개념이나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면, 이것은 근거 없이 생겨나 이 단어들과 개념들을 현실적 가치를 전혀 대변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사물들은 실제상 서로 유사하여 공통적 특징들을 가지든지 할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개념들은 공허한 상념들이아니라, 사물의 본질적 속성들의 총합으로 이름들이 아니며 사실들이다.

우리가 개념 가운데 표현하는 일반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외부의 보편적인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특별히 개별화되고 전문화된 종류의 모든 실례들 가운데서 사물들 안에 근거를 가지며, 그로부터 지적 활동을 통해 개념으로 추상화되고 표현된다. 따라서 우리는 개념으로 인해 실재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실재에 다가가는 것이다. 지식이란 단지 변하는 현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일반적이고 논리적인 것에 대한 것이다. 분명히 사물의 존재 자체, 그 실존은 우리 외부에 머물러 있기에 실재적으로 우리 안에 결코 들어올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결코 존재에 다가갈 수 없다.

플라톤은 이 학문의 과정을, 마치 태양이 객관적으로는 대상을 비추고 주관적으로는 우리의 눈을 조명하듯이, 하나님의 선의 관념은 빛으로서 그 빛을 통해 사물의 진리, 본질이 드러나고, 동시에 우리의 정신은 그 진리를 관찰하고 인지할 수 있다.라고 했다. 이 태양의 이미지는 건전한 의미에서 자연적인 이성의 빛을 말해 주는데, 오로지 이 빛 아래에서 인간 정신의 영구적인 속성 혹은 능력이 이해되며, 이 빛을 통해 인간은 사물을 일차적으로 인식할 때 곧바로 근본 개념들과 근본 원리들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그래서 이성의 빛은 일차적으로 능동적인 지성, 추상 능력과 동일시되는데, 이는 사물들 위에 비추어 사물들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드러나게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성의 빛은 우리 정신이 바로 추상 능력을 통해 우리 소유로 삼도록 하는 보편적 개념들의 창고와도 동일시된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모두 그 빛은 하나님, 혹은 더 구체적으로 로고스 덕분이다. 로고스는 이 빛이 우리 안에 떠오르게 하고 지속적으로 유지되가 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이 그 빛의 비춤을 통해 진리를 보게 될 때, 이것은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는 인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덕분이다.

 

8. 종교의 원리들

 

종교의 본질

 

[70] 학문과 마찬가지로 종교 역시 그 원리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을 알기 위해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종교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 특히 학문, 윤리, 그리고 예술과 구별하는 것이다. 성경은 종교에 대한 어떤 정의도 내리지 않고, 또한 종교 현상을 묘사하는 일반적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성경은 종교의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을 보여주는 독특한 단어들을 가지고 있다. ‘객관적 종교’는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한 것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언약’ 안에 있다. 주관적인 것은 ‘주를 경외함’이다. 이 용어는 거룩한 율법들에 대한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의 내면적인 마음의 기질을 표현한 것인데, 이 율법들은 그가 하나님을 인하여 준수해야 할 것들이 기록된 것이다.

[71]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여 과거에는 ‘객관적 종교’와 ‘주관적 종교’ 사이에 구별이 지어졌고, 종교 자체는 일반적으로 “참된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올바른 방법”으로 정의되었다. 예배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고 규정한 방법인데, 그 방법을 통해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예배란 또한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자기 계명의 첫 번째 돌판 가운데 사람에게 제시한 의무이며, 거기에 사람 내면의 주관적 종교가 반드시 응답해야 한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 가운데 자신을 계시한대로 하나님을 알고 섬기기 위한 내적인 성향과 욕구가 반드시 응답해야 한다.

 

[72] 주관적 종교는 일차적으로 하나의 존재 상태, 습성, 사람 안에 있는 어떤 성향인데, 이것은 객관적 종교가 작용한 결과로 행위로 나타난다. 이러한 습성은 모든 사람 안에 있다. 순수한 종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객관적 종교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다시 알려 주어야 하며, 둘째, 인간 안에 부패된 종교적 습성은 다시 태어나고 갱신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주관적 종교는 “성령으로부터 주입된 덕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적 예배와 시민적 공경, 예배와 굴종 사이에 본질적인 구분을 해야 한다. 오로지 종교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존엄과 능력’과 우리 편에서 ‘절대적인 복종’이 고려될 때에만 가능하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절대 의존감정’이라고 묘사하였다. 그에게 있어 의존이란 범신론적으로 이해되어 객관적으로는 단지 온 세상과 연관을 가지지만 주관적으로는 감정에 제한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슐라이어마허의 정의에는 중요한 진리의 요소가 담겨있다. 인간을 종교적 존재로 만들고 종교에 다가서게 하는 것은 하나의 의식으로 인간은 자신이 처한 형편에서 다른 모든 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다는 의식이다. 신앙에는 다음 두 가지 요소가 담겨 있다. 첫째 인간이란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대해 완전히 수용적이며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존적이다. 둘째, 인간은 바로 이러한 의존을 인정함으로써 용서와 자녀 됨,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종교의 본질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받고 칭송을 받는 데 있다. 참된 종교는 인간의 심성에 달려 있다. 한편으론 창조자, 구원자, 거룩하게 하는 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 의존을 깊이 깨닫는 데 기초하며, 다른 한편으론, 하나님의 모든 규례들을 정직하게 준행하려고 추구하는 데 있다.

 

[73] 칸트와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윤리적 행위의 한 형태, 혹은 감정의 한 특질로 여겼다. 이로써 무게중심은 객관에서 주관으로 완전히 옮겨졌고, 주관적 종교는 객관적 종교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 헤겔은 1821년 이후 종교철학에 관한 자신의 강의를 통해 종교들을 연구, 분류, 평가할 학문을 출발시켰다. 비교종교학은 모든 종교들을 완전히 객관적으로 그리고 공정하게, 어떠한 교리적 전제도 없이, 귀납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종교철학으로서의 이 새로운 학문은 선행 연구를 근거로 획득한 결과들을 사색적으로 ‘이용하되’ 연역적으로 그 종교의 기원과 본질, 진상과 가치를 밝혀 내는 것이다.

 

[74] 모든 종교란 본질상 똑같으며 단지 형태만 다를 뿐이라는 철학적 전제는 편견 없는 역사적 연구에 의해 정면으로 모순된다. 종교란 결코 감정과 환상만의 산물이 아니다. 비록 마음의 성향이 종교나 도덕적 생활에서 아주 가치 있는 것으로 크게 고려될지라도 종교의 구성 요소들 가운데 교리가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다면, 모든 종교가 자신의 속성 때문에 지식을 포함하고 그 교리 가운데 그 대상의 실제를 가정한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참과 거짓의 범주 아래 놓이게 된다.

 

[75] 종교의 본질에 관한 연구들은 매우 보잘것없는 결과를 낳았다. 보편적인 종교의 본질에 대한 지식은 전혀 달성하지 못했거나, 혹은 단지 조금밖에 이루지 못했다. 종교적 삶이란 아주 깊고 대단히 풍성해서 단 하나의 공식적 표현으로 정확하게 해설할 수 없다. 동일한 방법이 사고 작용의 기준들과 도덕적 삶의 기준들과 관점에서 종교의 본질을 설명할 수 없다. 비록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종교의 본질에 대한 하나의 정의를 내리는 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그 정의는 결국 다름 아닌 온갖 종류의 해설이 가능하고, 실재적으로는 최소한의 유익도 주지 못하는 모호한 공식에 귀착되고 말 것이다.

 

종교의 좌소

 

[76] 종교의 본질이 검토되었다면, 이제 그것이 우리 영혼의 삶에 어디에 위치하는지 반드시 지적되어야 한다. 영혼의 삶에서의 종교의 위치에 대한 현재는 주로 세 가지 견해가 거론된다. 첫째, 지적인 견해로 종교의 본질을 지식에 두고 그 좌소를 지성에 위치시킨다. 특히 헤겔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이 지적인 정의를 발전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절대자’란 반정립들과 연관을 맺었다가 그로부터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사고 작용 자체를 말한다. 따라서 세계 전체는 정신적 발전, 이성의 내용에 대한 하나의 논리적 전개, ‘이데아’가 먼저 자연 가운데 자신을 객관화하고 그다음에 정신 가운데 자신에게 다시 되돌아오는 하나의 과정이다. 종교란 본질상 지식으로서 감정이나 행동이 아닌 유한 정신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 혹은 유한 정신을 통하여 그리고 그 가운데서 스스로에 대한 하나님의 객관적 지식이다.

그러나 헤겔이 실수했던 것은 그가 종교와 철학을 낮은 것과 높은 것, 표상과 개념으로 대립시키고, 따라서 그것들을 단 하나의 과정의 연속적인 순간들로 이해했던 것이다. 내용과 형태는 결코 기계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연관되지 않기에 그것들 중 하나가 전체적으로 변해도 다른 하나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종교적 표상들을 철학적 개면들로 변환하는 것은 또한 종교적 내용 자체에도 영향을 준다. 헤겔의 두 번째 잘못은 종교와 철학에 동등한 내용을 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철학에 비해 더 낮은 형태라고 여겼던 사실에 있다. 이로 인해 종교는 단순하고 무식한 자들에게만 가치를 갖는 상대적인 선으로 격하되었다. 철학자들은 그보다 훨씬 높은 단계에 올라가 있어 철학에 만족했다. 이것은 종교의 본질에 대한 전적인 오해에 기초한다. 비록 종교와 학문이 종종 동일한 내용과 대상을 갖는다 할지라도, 그 내용과 대상은 각각의 영역에서 전혀 다른 관점에서 드러난다. 학문에서는 지식을 목적으로 하지만, 종교에서는 위로, 평화,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비록 학문이 그에게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할지라도, 그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며 자신의 아버지인 것을 아는 것은 오로지 종교를 통해서다. 비록 학문이 그에게 죄가 존재하며 은혜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할지라도, 그가 죄 용서의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로지 종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비록 학문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모든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풀 수 있다 하더라도, 학문은 단지 이론적인 지식을 줄 뿐, 구원의 은덕을 개인적으로 참여하게 하지 않는다. 구원은 지식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연관되어 있다.

[77] 다른 학자들은 종교를 도덕적인 행위로 정의하고 종교의 좌소를 의지에 두었다. 신앙이란 새로운 순종에 의해 보충되거나 혹은 심지어 오로지 새로운 순종 안에 존재했다. 그래서 교리란 단지 수단에 불과하여 부차적인 것이며, 중요한 것은 사랑, 덕행 있는 도덕적 생활이었다. 이 윤리주의적 견해는 주지주의적 견해와 더불어 나타났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참된 종교, 신적 계명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의도하는 것은 “순종 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며,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오직 이웃에 대한 사랑”에 있다. 철학과 신앙이 서로 다른 것은 전자가 ‘진리’를 목적으로 하는 반면, 후자는 ‘순종’과 ‘경건’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은사는 “하나님에 대한 지성적인 또는 정확한 지식”이 아니라 순종이다. 그래서 이 순종은 모든 신자들에게 요구된다. 이 윤리론의 시작을 제공한 사람은 칸트였다. 사실상 이론적 이성이란 초감각적인 것에 도달할 수가 없다. 하나님, 자유, 불멸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그것들은 단지 윤리적 계명의 완수와 최고선, 즉 미덕과 연관된 구원을 얻기 위한 실천이성의 공리들이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이론적 근거가 아닌 실재적 근거에서 ‘참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윤리가 종교의 토대가 된다.

정통주의 신학자들과 중재신학자들, 그리고 현대신학자들 가운데, 아무 많은 학자들이 칸트의 인식론을 따르고 종교를 인간의 도덕적 본성의 토대 위에 수립하려고 시도했다. 그들 모두는 공동적으로 교의학의 토대는 어떤 외적 권위와 또한 이성적 추론과 증명에 놓일 수 없고, 다만 인간의 의지, 자연에 맞선 인간 정신의 독자성과 독립성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학자들은 도덕적인 것에서 종교와 신학의 토대만이 아니라, 그 원리와 규범도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슐라이어마허와 로데의 발자취를 따라 자연에 대한 인간 정신의 승리로서의 도덕적인 것을 절대적 능력으로 승격시키고, 이어서 교의학의 기초를 윤리학에 두었다.

이 종교와 도덕이 비록 동일한 도덕법에 의해 규정되었을지라도, 그 법 자체는 두 개의 돌판으로 나뉘어 있다. 종교란 항상 하나님께 대한 관계인 반면, 더덕은 인간에 대한 관계이다. 종교는 ‘신앙’을 원리로 하는 반면, 도덕은 ‘사랑’을 원리로 한다. 종교는 내적, 외적 예배를 구성하는 종교적 행위들 가운데서 나타난다. 종교란 도덕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윤리는 종교의 토대가 될 수 없고, 또한 종교의 원리, 규범 혹은 내용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이것들은 반드시 윤리의 기초를 형성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관계는 인간의 다른 모든 관계들을 규정하는 일차적이며 핵심적인 관계이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윤리는 항상 종교에 그 뿌리를 두었다. 종교는 도덕적 의무들을 촉구하며, 윤리는 종교의 제가를 추구한다. 자율적 윤리란 현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도덕은 어디서나 모든 민족에게 있어서 그 최종적 근거와 목적을 종교에 둔다. 종교와 윤리, 예배와 문화는 반드시 동일한 원리에 뿌리내려야 한다. 기독교가 이 경우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완전한 끈이다.

 

[78] 다른 학자들은 종교에 감정의 자리를 부여하고, 심지어 이를 위해 때때로 인간 안에 하나의 구별된 능력이 있다고 여겼다. 인간 주체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연스러운 자기표현을 규제했던 규칙들을 초월했고, 환상은 지성에 맞서 자기 권리를 회복했다. 유기적 견해가 긱적 견해를 대신했고, ‘생성’의 관념이 ‘제조’의 관념을 쫓아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유로운 것, 자연적인 것, 선천적인 것에 대한 시각이 열렸다. 생성, 성장, 발전이 사물들이 발생한 방식이었다. 유익한 것이 아닌 아름다운 것, 산문이 아닌 운문, 노동이 아닌 놀이, ‘꾸민 것’이 아닌 예술이 최상의 가치를 지녔다. 과거의 습관적인 매너리즘은 피상적인 감상으로 변했다. 종교란 진선미에 대한 감정이며, 신적인 것에 대한 경탄, 사랑, 존중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인간 속성의 본능”으로 천성적으로 타고난다.

슐라이어마허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강연]의 두 번째 강연에서 종교를 무한자 안에서, 그리고 무한자를 통한 모든 유한적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의식으로 정의했다. 종교란 지식도 행위도 아닌, 형이상학도 윤리도 아닌, 무한자에 대한 감정이다. 그 무한자를 경험하기 위한 기관은 지성, 이성 혹은 의지가 아닌, 감정, 즉 무한자에 대한 마음의 방향과 감각이다. [신앙론]에서도 경건은 감정이며, 물론 절대적 의존 감정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한 분이 아니라, 단지 세상에 내재하는 분으로 이해되고, 신적인 것에 대한 기관은 이성, 양심 등이 아니라, 감정이다.

종교란 그 표상들의 대상과 실재적, 인격적 관계에 들어갈 때 비로소 생겨난다. 그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관계는 인간 감정에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관계는 인간을 차갑고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까지 감동시킨다. 그러나 감정이 유일한 종교적 기능이라거나 종교의 유일한 좌소와 근원이라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취해진 감정이란 개별적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열망과 정서 전체로서, 명백히 수동적이다. 감정 그 자체에 있어서 각각의 정서란 좋거나 나쁘다든지, 혹은 옳거나 그릇 되든지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종교에서는 감정이 아니라, 신앙, 종교적 표상이 일차적이다. 그리고 그 신앙은 또한 감정에 작용한다. 만일 감정이 슐라이어마허의 경우처럼 신앙으로부터, 종교적 표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종교의 공하고 유일한 근원과 좌소가 될 때, 감정은 그 자체의 특성을 잃고 참과 거짓, 선과 악의 범주에서 완전히 독립하게 될 것이며, 사실상 모든 감정 그 자체는 이미 종교적이고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낭만주의 전체의 엄청난 잘못이었다.

 

[79] 따라서 종교란 인간의 능력들 중 단 한 가지에 제한되지 않고, 인간 전체를 포함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하나님에 대한 관계는 통합적이며 핵심적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는 순서가 있다. 지식이 제일 먼저다. 올바른 지식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섬김이란 없다. 그리고 지식은 마음을 관통하여 의지에 작용한다. 믿음은 사랑 가운데, 행위 가운데 드러난다.

 

종교의 기원

 

[80] 종교에 대한 해설은 얼마나 보편적으로 수용되었든지 간에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 첫째, 여기에는 ‘신 관념’이 여전히 설명되지 않고 있다. 미개한 유아적 자연인은 인격적인 것과 비인격적인 것 사이를 구분하지 않으며, 자연의 능력들을 자신에 대한 유추를 따라 생각하며, 모든 사물에 영혼이나 정령이 내주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종교에 대한 토대와 가정은 소위 물활론적 세계관이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들이 인격적인 존재들과 비인격적인 사물들 간의 명백한 구분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심스럽다. 둘째, 자연현상들 가운데 살고 활동하는 영혼들과 정령들이 비로소 종교적 대상이 되는 것은 그것들이 신적인 것에 대한 개념을 전달받았을 때다. 모든 사람은 먼저 교육과 양육을 통해 신성의 개념을 수용하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신이 그것이 옳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근거로 종교적 관계를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종교란 항상 하나님과 세계, 즉 자연을 초월한 존재의 권능과 자연에 종속된 능력들 사이의 어떤 구별을 가정한다. 그래서 물론 그 신적 권능이 자연현상들에 내주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종교적 숭배의 대상은 결코 자연현상들 가운데 있는 자연의 힘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고 활동하는 신적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항상 일차적으로 세계와의 관계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세계와의 갈등으로부터 종교와 신념이 태어난다. 종교의 출발점과 토대는 자부심과 위기감의 대립이며, 정신과 자연의 이원론이고, 자의식과 세계의식 사이의 긴장이다. 여기서 어떻게 이런 물리적 대립이 윤리와 자연, 도덕적 질서와 자연 질서 사이의 대립으로 이끌 수 있는지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물리적 대립이 죄책감, 참회, 화해의 욕구, 용서를 구하는 기도 등의 이 모든 관념들과 감정들을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종교적 특성들이며, 위에서 언급된 정신과 자연의 대립들로부터 도출되지 않고, 오히려 그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사실상 그 토대가 되는 것이다.

 

[81] 종교의 본질과 종교의 기원은 역사적 방법과 심리학적 방법을 통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 방법들은 종교의 정당성과 가치를 옹호하지 못한다. 하나님 없이 종교를 이해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는 모든 종교가 기초하는 토대다. 종교가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로부터 섬김을 받기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확고히 섰을 바로 그때,, 우리는 종교의 본질과 기원, 정당성과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알린다는 사실 또한 가정한다. 계시 없는 종교란 존재하지 않으며, 계시는 종교에 필수적으로 연관된다.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 항상 인간 안에는 어떤 종교적 성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결국 철학적 연구의 궁극적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맨 처음부터 인간,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친족, 종교적 존재였는가? 아니면 점차 종교적 존재로 발전했는가? 인류의 초기 상태는 문화적이었는가? 아니면 야만적이고 미개한 성격이었는가? 인류의 초기는 절대적이었는가? 아니면 상대적이었는가?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존재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었고, 따라서 그 순간 이후 또한 종교적 존재였다. 종교는 또 다른 창조에 의해서, 혹은 오랜 진화의 과정을 통해 나중에 추가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 자체에 내재된 것이다. 물론 인간의 원래 상태가 죄로 인해 부패되고 파괴되었을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친족이며, 하나님의 소생으로 하나님을 계속 ‘더듬어 찾아 발견’하고자 한다.

학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교에서도 기초원리들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종교란 존재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으로서 이성적 피조물들에 의해 섬김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말씀과 행위 가운데 자신을 인간에게 제시한다. ‘외적 인식의 기초원리’.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주관적으로 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능력을 준다. ‘내적 인식의 기초원리’. 계시가 외적으로, 내적으로 일어나는 형태들은 변하기 쉬운 피조물로서 인간이 처한 다양한 형편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그 형태들은 안전한 상태와 부패된 상태에서 각각 다르고, 은혜의 상태와 영광의 상태에서 각각 다르다. 하지만 이 세 가지 기초원리들은 여전히 동일하다. 하나님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주관적으로 인간에게 알리지 않는 한 종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금 이 세 가지 기초원리들은 종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 가운데 그 토대를 갖는다. 성부는 성자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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