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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의학2 (32) - 헤르만 바빙크

이참리 2020. 5. 2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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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거룩한 삼위일체

 

[213] 위격들의 이름들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속성들의 이름보다 더 높은 단계에 이르는데, 이는 위격들의 이름들이 신적 존재의 단일성 가운데 존재하는 구별이 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 [심위일체적] 계시는 구약 성경에서 시작한다. 구약 성경은 몇몇 독립적인 본문들에게서만이 아니라 유기적 계시 전체에도 삼위일체론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닌 요소들을 포함한다.

 

먼저 엘로힘이라는 명칭은 계시의 하나님의 자기 생명의 무한한 충만 가운데 최상의 다양성을 포함한다. 이것은 창조 사역에서 곧 드러난다. 엘로힘은 자신의 말씀을 선언하고 자신의 영을 보냄으로 창조한다.

엘로힘과 세상은 이원론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 원리로, 하나님의 영을 주관적 원리로 갖는다. 세상은 하나님이 먼저 착안 했고, 따라서 하나님의 전능한 말씀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일 세상이 그 실재를 받았다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대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지속적으로 신뢰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삼중적 원인은 특별 계시의 영역에서, 재창조의 사역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더 이상 엘로힘만이 아니라 여호와로도 나타나는데, 그는 언약과 맹세의 하나님, 계시와 역사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알린다. 그러나 그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며 보호하는 것은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구원의 계시의 말씀의 전달자는 여호와의 사자, 언약의 사지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교부들은 만장일치로 이 주의 천사를 로고스의 신적 현현으로 여겼다. 이 견해는, 성부는 우리가 볼 수 없고 접근할 수 없는 반면, 성자는 자신을 계시할 수 있으며, 모든 계시의 원리라는 견해와 자주 연관되었다. 하지만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이러한 분리와 대조는 후기 교부들, 아타나시우스, 캅바도기아 세 교부들 등에 의해 바르게 거부되었다. 성자는 하나님이며, 따라서 성부와 마찬가지로 불가시적이다. 루터와 칼빈은 주의 천사[문맥상의] 구절에 따라 피조된 천사로, 또는 피조되지 않은 천사로 해석했다. 하지만 후기 개신교 해석자들은 그 구절들을 주로 로고스에 대한 것으로 이해하여, 특히 천사의 현현으로만 여겼던 소시누스파, 항변파와 합리주의자들과 대립했다. 이 두 해석상의 차이는 큰 것이 아니다. 고대 교회의 견해를 옹호하는 자들은 로고스가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는 것을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반면, 아우수스티누스와 그의 견해를 따르는 자들은 그 피조된 천사 가운데 로고스가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했다는 것을 반드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사자라는 이름 가운데 하나님,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의 말씀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임재했다는 것이다. 이 천사가 비록 여호와와는 구별되지만, 이름, 능력, 구원, , 경배와 영광에 있어서 여호와와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214] 구약성경에서 나온 이러한 사상들은 다양한 방향에서 열매를 맺었다. 제일 먼저, 그것들은 [유대] 묵시문학에 전수되어 발전되었다. [예수 시락의 지혜서]에서 지혜는 넓은 자리를 차지한다.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하나님에 의해 만물보다 먼저 창조되었으며, 지혜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머문다. [지혜서]에서 지혜는 실체화되어, 신적 속성들과 사역들이 지혜에게 돌려졌다. 지혜는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은 보좌관이며,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알고 세상의 창조 시에 현존했다. 진실로, 지혜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새롭게 하는 존재 자체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며, 하나님의 영과 동일하다.

 

플라톤은 견해와 지식 사이의 구별과 대조로부터 추론하였다, 마치 견해가 현실 세계의 감각적 객체를 그 대상으로 삼아야만 하고, 지식은 영원하고 불변한 것, 즉 이데아를 대상으로 삼아야만 한다고 했다. 스토아학파는 신적 이성이 모든 현상의 근거라고 강조하였다. 그것을 ‘베아적 이성이라 불렀는데, 이는 존재와 생명이 하나의 씨로부터 나오듯이 이 로고스로부터 싹트기 때문이다. 플라톤적 이데아론, 스토아적 로고스론, 구약 성경적 지혜론 등을 단 하나의 체계로 혼합시켰던 것은 필로였다. 필로는 이 점에서 하나님과 세상이라는 이원론으로부터 출발했다. 하나님은 감각적 세계를 창조하기 전에,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사유 가운데 만물의 모델들과 능력들인 정신적 세계, 이데아들을 그렸다. 이 이데아들은 종들, 통치자들, 사신들, 중보자들, 그리고 이성들과 능력들, 그리고 모세가 천사들로 칭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신들이라고 일컬었던 띠들과 기둥들, 그리고 신적 사유 가운데 존재하는 생각들, 하나님 자신처럼 피조되지 않고 무한한 생각들로 묘사되었다. 이 로고스는 하나님의 지혜와 동일한 것으로, 때로는 보다 더 하나님과 구별된 존재로 묘사되었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대리자, 사신, 해석자, 통치자, 천사, 도구, 이미지, 그림자이며, 진실로 하나님의 막내아들인 세상과는 구별된 하나님의 맏아들이며 장자다. 그래서 필로는 로고스를 심지어 하나님, ‘2의 하나님이라고도 부른다.

 

필로와 유대교 신학은 갈수록 구약 성경의 사상으로부터 더욱 탈선하는 철학의 영향을 보여 주었다. 첫째, 원리상의 차이가 있다. 말씀과 지혜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중재하는 중간적 존재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며, 하나님에게 속하고, 피조 세계의 원리들이다. 둘째, 말씀과 지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과 필로의 중간적 존재들의 교리는 성격상 중요한 차이가 있다. 구약 성경에서 말씀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이성과 개념이 아니며, 더더욱 이상적 세계상, 정신적 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선언된 말씀으로,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고 보존한다. 그리고 지혜는 욥기와 잠언에서 하나님의 한 속성으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부터 소유하고 지명한 인격이며, 만물의 창조 시에 협의하고 유심히 살폈던 인격으로 제시된다. 셋째, 중간적 존재들은 필로와 유대교 신학에 있어서 구원론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것들은 깨달음을 주고 지식을 전달하지만, 이 중간적 존재들과 메시아 사이에는 관련이 전혀 없다. 마지막으로, 필로의 중간적 존재들에 대한 교리 등은 완성되지 않았고 경계가 없었다. 필로는 신적 이데아들을 로고스 안에서 요약함으로써, 그것들 가운데 어떤 통일성을 부여하지만, 자신이 로고스에 대해 말한 것을 반복해서 모든 신적 이데아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한다. 이 모든 이유들로 인해 묵시문헌, 필로 그리고 유대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구약 성경의 삼위일체적 사고의 발전과 신약 성경의 삼위일체적 개념의 발전 사이에는 원리적인 차이가 있다.

 

[215]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의 삼위일체적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훨씬 더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추상적 추론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과 행위로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이다.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은 신약성경의 경륜, 특히 성육신과 성령을 부어 준 사실들 가운데,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 자신을 계시했다. 주로 성자와 자기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아버지라는 명칭을 지닌 성부는 또한 만물의 창조자로서도 아버지라 불릴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전적으로 독특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들이라 불리는 성자는 로고스로서 성무와 함께 만물을 창조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자신의 사역과 관련하여 자기 이름을 얻은 성령은 창조에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만물을 장식하고 완성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가르친다. 언약의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반드시 그래야만 하고, 삼중적 원리가 구속 사역에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탄생과 세례에서 이 세 분이 곧바로 활동하는 것을 본다. 예수의 가르침은 삼위일체적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성부를 선포하면서, 성부를 영으로 묘사하는데, 이 영은 스스로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며, 전적으로 독특한 의미에서 예수의 아버지다. 예수는 성부로부터 구별되지만, 성부의 유일한 독생자이며 많은 사랑을 받는 아들이고, 생명, 영광, 권세에 있어서 성부와 동일하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인도하고 자신에게 능력을 덧입혀 줄 성령을 자신이 장차 아버지에게서 보낼 다른 보혜사로 말하는데, 그 보혜사는 확증하고, 가르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며, 위로하고, 영원히 머물 것이다.

 

[216] 성경은 이 구별된 세 주제들,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 간의 관계에 대해 알려준다. 이를 위해 제일 먼저 성부의 이름이 고려된다. 이 이름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모든 작품들, 특히 인간의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지만 전적으로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은 성자의 아버지이다. 예수는 항상 성부에 대한 자기 자신의 관계와 성부에 대한 다른 유대인들, 제자들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구별한다. 하나님은 참되고 본래적인 의미에서 성자의 아버지이며, 성자를 사랑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성부로부터 나와 성자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도들에 의해 특별한 의미에서 거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진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성자가 성경에서 지닌 명칭들을 통해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들을 알게 된다. 첫째, ‘로고스’라는로고스’ 명칭이 고려된다. 로고스라는 단어는 이성’, ‘이야기’, ‘말씀으로 번역되었고, ‘말씀은 다시 내재적 말씀외적 말씀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명칭의 출발점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이 창조와 재창조에서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했다는 성경의 지속적인 가르침에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로고스‘라 칭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와 재창조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것은 그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을 통하여 계시하기 때문이다. 요한은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했던 이 로고스가 인격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로고스가 태초에 있었다[요1:1]고 명백하게 선언한다. 그는 로고스가 된 것이 아니었고, 창조 대에 비로소 만들어지고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인격으로서 그리고 본성상 영원부터 로고스였다. 더 나아가, 그 자신이 하나님이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아버지의 품 속에 있었으며”, 그의 영원한 사랑과 자기 교통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부를 완전히 계시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이름은 구약 성경에서 주로 신정적 의미를 지닌다. 다윗과 관련하여 사무엘하 7장의 하나님의 작정을 가리키고, 다윗을 통해 예시된 메시아와 관련해서는 히브리서 15, 55절에서 영원부터 그리스도가 성부에 의해 아들로 낳아졌다고 설명된다. , 그리스도가 영원부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와 그 본채의 형상으로 태어났다고 해석된다. 게다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사도행전 1333, 로마서 14절에 의해 부활로 강력하게 증명되었다. 미가서 52절에서 그가 통치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이미 영원부터였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절대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전에 로고스와 아들로서 존재했고, 하나님의 본체로 존재했고, 부요하며, 영화로 옷 입었고, 이제는 자신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 그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때와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다.

 

[217] 성경은 성령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에 대한 어떤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사실은, 성령론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모든 책들을 통하여 동일하다는 것이다. 성령론은 신약 성경에서 훨씬 더 선명하게 계시되었을지라도, 원칙적으로는 구약 성경에서도 나타난다. 성경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는 다른 신적 존재의 특별한 위격을 가리킨다. 성령은 자신의 특별한 실존 양식으로 인해 이 명칭을 지닌다. 영은 사실상 바람, 숨을 의미한다. 성령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내재적 생명의 원리이다.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온다이것은 특별히 오순절 날에 일어났다. 따라서 성령의 인격성은 이제야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났다. 성령의 인격성처럼, 그의 신성도 비로소 신약 성경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제일 먼저, 이 신성은, 비록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이 구별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영이 어떤 것을 말하고,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의 멸시를 받는다는 것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사실로부터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이것은 오로지 존재의 단일성과 위격적 구별이 함께 갈 때만, 완전히 정당하게 된다. 더 나아가, 온갖 신적 속성들이 하나님 자신에게 돌려지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에게도 돌려진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성부에 대해 갖는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그리스도와 맺는다. 성자가 스스로 아무것도 갖지 않고, 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다만 모든 것을 성부에게서 받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성령도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취한다. 성자가 성부를 증거하고 성부를 영화롭게 하듯이, 마찬가지로 그다음 성령도 아들을 증거 하고 영화롭게 한다. 그 누구도 아들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성령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그 누구도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다. 성령을 통하지 않은 하나님과의 교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218] 성경은 물론 삼위일체에 대한 완전한 교리를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이라는 단일한 명칭이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 가운데서 비로소 충분하게 전개되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모든 외적 사역, 즉 창조와 재창조 모두는 삼중적인 신적 원인을 갖는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적 본질에 대한 철학적 추론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계시 사실에 대한 숙고에서 비롯되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신성, 기독교의 절대적 성격, 하나님 계시의 진리, 죄에 대한 참된 구속, 구원의 절대적 확실성에 관한 것이었다.

 

2세기 영지주의자가 등장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의 사고 역시 깨어났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교리적 중요성을 획득했고, 따라서 훨씬 더 명확하게 선언되었다. 유스티누스 마터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 부르고, 심지어 정관사가 붙은 그 하나님이라 부르기조차 했다. 단지 능력만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선재를 명확하게 가르쳤다. 유스티누스는 성자가 과연 정신이 아니라 수에 있어서 성부와 다른 존재이며, 성부에게 종속된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고자 추구한다. 성자는 성부 다음의 첫 번째 능력으로’, ‘두 번째 위치를 차지한다. 성자는 모든 것을 성부로부터 받았으며, 그가 하나님이며 주님인 까닭은 성부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며, 그는 성부이자 주님에게 종속되었다.” 그러므로 유스티누스의 삼위일체에 대한 견해는 여전히 불안하다. 성자와 대조적으로 감추어진 성부의 존재, 성부의 뜻과 창조의 필요로 인한 성자의 발생, 성자의 성부에 대한 종속은 나중에 교회에 의해 정죄되었다.

 

삼위일체론의 발전은 특히 철학적 요소들을 추방하는 데 있었는데, 그것은 기독교 교리의 수립에 공헌했던 세 사람의 공로 때문이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적 신 개념과 세계 관념으로서의 로고스에 대한 견해의 강력한 반대자였다. 하나님을 아이온들의 방사와 심연으로 보는 견해를 가능한 한 강력하게 반대하고, 창조자와 피조물의 성경적인 차이를 주장했다. 하나님은 순전하여 모든 정신, 모든 지성, 모든 생각, 모든 로고스이기에, 성자와 성부는 참된 하나님이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단일성은 이레니우스에 의해 아주 명확하게 표현되었는데, 그들의 신적 본성은 명백히 주장되었고, 그들은 거듭 함께 언급되었다. 하지만 이레니우스는 어떻게 단일성 가운데 셋이 존재하는지, 즉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비록 신적 본성을 소유하지만,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보여 주지 못했다. 이 것은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해 보충되었고 개선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성부와 성자를,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하나님과 보이는 가시적 하나님으로 구별했다.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하심, 발생, 성육신의 세 단계를 거쳐 비로소 완전한 아들 됨과 독립적인 인격성에 이르렀다. 따라서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가 성부 수난설에 대한 변증에서 위격들을 지나치게 구별했다고 할지라도, 다른 한편으로 그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삼위성 안에 있는 단일성과 단일성 안에 있는 삼위성을 더욱더 확고하게 견지하려고 애썼다.

 

테르툴리아누스가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우조론적이고 구원론적인 과정에서 아직 해방시키지 못한 반면,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 내의 영원한 과정으로 이해한 신학자는 오리게네스였다. [성자의] 발생은 영원한 출생이다. 빛이 비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듯이, 성부도 성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는 없다. 성부와 성자는 모든 신적 속성들을 공유한다. 성자는 성부와 하나다. 그러나 이 단일성과 동등성 가운데 삼위 간의 구별을 주장하기 위해, 오리게네스는 종속론의 도움을 요청하여 테르툴리아누스 이전으로 되돌아가, 하나님의 존재에서가 아니라 성부의 위격으로부터 삼위일체를 도출했다. 성부를 [정관사를 붙인] 하나님으로 모든 것을 초월하여 높고, 보이지 않으며, 불가해한 단 하나의 온전한 신성으로 표현했고, 성자를 정관사 없이 하나님’, 즉 본질에 있어 성부와는 다른 분으로 표현했다.

 

[219] 교회는 오리게네스를 따르지 않았다. 교회는 그의 종속론을 거부하고, 니케아 회의에서 참되고, 완전한 성자의 신성을 선언했다. 이 고백은 전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지녔다. 이 고백은 기독교의 구원론적 원리를 견지했다. 니케아 회의는 삼위 하나님 간의 구별을 선언했으며,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기 이후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구별 가운데서 단일성을 견지하는 것이었다. 니케아 회의 이전에는 하나님의 단일성으로부터 삼위성에 이르는 것이 어려운 문제였는데, 이제는 그 반대였다. 이제부터 삼위일체 교리는 그 자체의 독자적인 가치, 신학적 중요성을 획득했다.

 

이런 방식으로 삼위일체론을 정교화하고 완성한 신학자는 아타나시우스, 캅바도기아 신학자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핵심이다. 이를 통해 기독교는 하나님의 구별을 부인하는 유대교와 하나님의 단일성을 부정하는 이방 종교와 원리적으로 구분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전 15권의 [삼위일체론]에서 그의 출발점은 성부의 위격이 아니라 단 하나의 단순한, 모든 복합을 배제한 하나님의 본질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이전의 그 누구보다도 삼위의 절대적 단일성을 더 강하게 선언했다. 각각의 위격은 전체 삼위일체만큼 크다. 각 위격에는 동일한 신적 존재 전체가 있기에, 세 하나님, 세 전능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분 하나님, 한 전능자가 있다. 그러므로 위격들의 차이란, 속성들이나 비본질적인 것들이 아니라 단지 상호 간의 관계만 다를 뿐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에 성부와 성자 사이에 형성되었던 모든 대조를 반드시 거부해야만 했다. 성자는 참된 하나님으로서 성부처럼 숨어 있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그래서 성부와 완전히 동등하다. 모든 종속론은 추방되었다. 그는 모든 삼위에 똑같이 내주하는 하나님의 본질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현현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게 되었다. 과거에 하나님의 현현은 항상 그리고 오로지 로고스의 계시로만 이해되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현현을 성부와 성령에게도 돌렸다. 그들은 성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계시할 수 있으며, 성자의 현현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이미지들, 유비들, 삼위일체의 흔적들을 추구했고, 전체로서 신론과 우조론의 연관성을 밝혔다. 동방교회는 성자와 성령 모두가 과연 성부로부터 나오지만, 그 외에는 서로 관련이 없다고 고백한다. 반면 서방교회는 세 위격들의 본질적 동등성과 상호 관계는 비로소 ‘필리오크베’에서 완전하게 표현되었다고 이해한다.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전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따라 표현되었기에, 서방교회는 이 신조를 수용한 반면, 동방교회는 수용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이 신조에 동의했다. 일반적으로 로마교와 개신교의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대한 수용 태도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은 얼마나 순수하든지 간에 삼위일체론에 대한 역사적 신앙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한 하나님 자체에 대한 올바른 마음의 신앙만이 구원한다고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220] 기독종교의 심장은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박동한다. 따라서 모든 오류는 삼위일체론의 이탈에서 비롯되거나 또는 더 깊이 숙고해 보면 그 이탈로 귀결된다. 아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가 초자연적으로 태어나 자신의 사역을 위해 세례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능력을 갖추어 주로 높여진 인간으로 여기고, 그의 선재와 신성을 단연코 부인했다. 이들은 양자론적 기독론의 추종자들이었다. 이 양자론적 기독론은 아타나시우스가 단편들을 모아 보존했던 작품, [향연]에 의하면, 아리우스는 가르치기를, 하나님은 태어나지 않았고 시작이 없기에 절대적으로 독특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유한한 존재와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불출생인 자신의 본질을 나누어 줄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외부에 있는 모든 것은 그의 뜻에 의해 피조되고 생성되었다. 그는 영원부터 아버지인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을 통하여, 그리고 피조물들의 아버지다. 하나님은 창조하기 전에 중간적 존재로서의 매개자를 산출했는데, 성경에서 지혜, 아들, 로고스, 하나님의 형상 등의 이름을 지니며, 하나님은 그를 통해 만물을 창조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또한 세 번째, 더 낮은 실체, 즉 성령을 산출했다.

 

사벨리우스주의는 성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나 고난을 받고 죽었으며, 따라서 성부와 성자는 다양한 관계들, , 성육신 이전에 그리고 성육신 가운데, 그 자체로 그리고 그의 역사적 출현 가운데 있는 동일한 위격에 대한 이름들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 본성은 성부이며, 인성, 육신은 성자였다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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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5 - [book공방] - 헤르만 바빙크 - 보편성을 추구한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 - 보편성을 추구한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 - 보편성을 추구한 신학자유해무 상세보기 1. 네덜란드 교회의 역사와 분리 교회 1815년 빌럼 1세가 네덜란드 국왕으로 등극을 하고 1816년에 ‘네덜란드 교회 치리 정관’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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