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참리의 하루한장

H.B. 스웨트의 신약 속의 성령 본문

book공방

H.B. 스웨트의 신약 속의 성령

이참리 2020. 6. 17. 11:41
반응형

H.B.스웨트 저 권호덕 역 은성 1986년

H.B. 스웨트의 신약 속의 성령 - 권오덕 역

 

 

1부 신약 역사 속의 성령

 

1장 세례 요한의 출생과 사역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이 구절은 세례 요한의 생애의 핵심이 나타나 있다. 요한은 그 일생 동안 나실인이 되어야 했는데, 일생 동안 절제하여 구별된 삶에 속하는 힘을 크게 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새로운 삼손과 엘리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아이는 약속내용에 따라 출생했다. 주위 사람들은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한 생애를 보고 놀라워 했다. 요한은 광야에서 은둔 생활을 택하였다. 거기서 그는 강력한 사역을 위한 부름을 위해 금욕생활과 경건한 침묵생활로 준비하며 머물러 있었다. 부르심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 요한에게 직접 임했다. 이 말씀은 처음부터 그에게 충만했던 그 영을 통해 그에게 이르렀다. 그에게 임한 그 말씀은 그로 하여금 회개를 전파하게 할 뿐만 아니라 회개한 모든 자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보내었다. 그는 죄사함의 회개를 전파 할 수 있었으나 성령으로 세례줄 수 는 없었다. 그 자신이 그의 능력의 한도까지 성령으로 충만했으나 다른 사람에게 성령을 부여해 줄 수는 없었다. 그의 세례는 삶을 정결케 하고 신성케하는 목적의 변화를 인식시키는데 불과했다. 세례요한은 그보다 뒤에 오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성령께서는 세례요한을 한걸음씩 인도하여 그의 전체 사역이 이루어지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상승하고 자신의 명성이 쇠하여지는 것을 환영하도록 하였다.

 

2장 예수의 잉태와 초기 생애

 

예수의 유일한 잉태 곧 인간의 부성이 없는 잉태는 그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유일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은 마라아의 낳을 아기의 거룩성과 신자성을 그의 선재에 근거를 두지 않고 하나님의 영에 의한 그의 잉태에 근거를 둔다. 예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으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었다는 의미에서 예수의 인생의 아버지이시다. 죄의 계승은 마침내 끊어졌다. 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신 그 한 분이 평범한 사람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이것은 성령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형태를 이룬다. 이런 사역에서 성령은 하나의 새로운 창조를 주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육신이 시작한 이 새로운 질서의 초두에도 하나님의 영이 위대한 사건에 역사하셨다. 예수가 자라 소년이 되고 그 소년이 성년이 되면서 지적이고 영적인 성장이 그 육체의 성장에 발을 맞추었다. 예수가 어린 시절 예루살렘의 여러 랍비들과 함께 하였을 때, 예수의 지성의 경이로움이 드러났다. 랍비들에 의해 질문이 제기되었을 때 그가 한 대답은 만물의 본질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었으며 영적인 진리에 대하여도 이해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3장 예수의 세례

 

예수의 거룩한 인성을 잉태시킨 성령은 그가 미성숙할 동안 그의 위에 임하여 역사하시면서 마침내 그로 하여금 그 능력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려고 요단강으로 나가셨다. 요한은 그의 사역의 두 번째 단계 곧 그가 뒤에 오시는 한 위대한 자에 대하여 명백하게 말한 그 단계로 들어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세례 요한이 자기의 뒤에 오는 자에 대하여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성령세례는 메시아 시대의 약속된 축복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을 베풀 메시아의 특권이었다.

예수의 잉태 시에 있었던 성령의 사역, 그리고 그가 세례 받으신 직후에 그 위에 임하시던 성령의 강림과 그의 초기 생애를 관련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는 그 당시 성령의 강림이 인간 예수 위에 그리스도가 강림하는 것이었다. 가톨릭교회는 예수께서 그의 수태 시부터 하나님의 아들, 곧 인간으로서 그가 만물 안에서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과 통제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세례는 그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새로운 출발점을 표시했다. 그의 수태 사건이 그의 인간 존재의 시작이었듯이 이 세례는 그의 사역의 시작이었다. 이 메시아는 이제 막 자기의 공생애 그리고 그의 새로운 시작, 또는 그의 메시아 사역의 첨단부분으로 들어가려고 하신 것이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듯이 이제 그는 선지자, 제사장,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의 최상의 직분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아야만 한다. 주님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그 자신의 필요성에 의해서 뿐 아니라 그가 그것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부어주기 위하여 받으셨다.

 

4장 그리스도의 수세 이후 생애와 그 사역

 

예수는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고독하게 보내져야 했던 중간 예비훈련 기간이 있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 내신 것이다. 이 시험은 주님의 인간생활의 경험에서 하나의 필수적인 요인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성부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자기의 아들로, 그 사랑하는 자로, 또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으로 선언 받으신 후 그는 그가 당한 모든 고난을 통해 아들로서 순종함을 배우도록 요청된 것이다. 이 시험은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본질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만일 무죄성이 시험에 의해 검증되지 않으면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다. 또 죄 없는 것으로만 족하지 않다.. 죄와 대면하여 그것을 정복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 첫 번의 대승리가 주님의 공생애가 시작되기 이전에 얻어졌다는 것은 분명히 필수적인 것이었다. 주님으로 하여금 사단과 싸우게 하신 성령께서 주님으로 하여금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힘주시고 또 이기게 하신 사실은 의심할 수 없다. 우리 주님의 인성이 그 죄의 속성을 탐지하시고 그것들을 격퇴하셨다면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렇게 하신 것이지 단순히 죄 없는 인간 의지의 힘을 통해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니다.

주님의 말씀전파 사역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였다. 모인 무리들은 새 교훈이로다고 외쳤다. 그러나 그 신기함은 그가 가르친 내용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가 메시지를 전한 영적인 능력에도 있었다. 고난 받으시기 전날 밤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완전한 영성을 의식하셨기 때문이다. 예수의 사역에 따라다닌 표적, 우리 주님 자신에 의해 성령에 힘입은 것으로 돌려졌다. 주님의 사역 가운데 계시되었듯이 성령은 그분의 개인적인 생활 가운데서 모든 순간의 생각과 뜻을 영감시키기 위해 나타난다. 주님께서 인생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자기 생명을 완전히 희생의 제물로 바치시던 그 최후의 행동 등 모든 것들은 광야의 시험보다 더 심하고 참기 어려운 영적 전투로 지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인자의 죄 없으신 영혼과 협력하여 이루신 능력과 이기심을 지적한다. 부활, 40일간의 머무르심, 승천, 그리고 승천 뒤의 그분의 삶은 모두 성령께서 우리 주님의 인성에 기름 부으심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5장 오순절의 성령 강림

 

주님의 지상 사역은 성령의 권능으로였다. 사도행전은 이 능력이 끝까지 계속되었다는 암시와 더불어 그 장을 연다. 열한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거기서 아버지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기다리라는 부탁을 받았다. 마침내 주의 승천 이후 몇 날이 못되어 성령께서 오셔서 사도들과 그 무리들에게 세례를 주셨다. 성령강림은 명철, 곧 땅의 첫 열매가 거두어지고 또 그로 인해 사람들이 그 추수에 대해 감사하는 유대인들의 추수절기와 연관되어 있다. 오순절은 유월절 후 다음가는 큰 절기였다. 사도요한이 암시하는 바처럼 십자가 사건이 니산월 14일에 일어났다면 그 날은 금요일이었고 오순절과 부활절은 그 주간의 첫날이었다. 그러므로 주일은 사망을 이기신 주님의 승리와 성령께서 생명을 주는 사역을 시작한 사실을 동시에 기억나게 한다. 매주일 지키는 주일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의 날이기도 한 것이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요엘의 글을 인용하며 두 번씩이나 성령강림을 언급한다. 성령강림을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연관 짓는다. 성령의 임재는 인자가 영광을 얻기까지는 결코 성취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이었다. , 그가 성령을 부으셨고 불가시적 사역이 가시적이고 가청적인 표시로 선언된 것이다. 오순절 성령부으심은 하나의 영적인 능력의 기적적인 과시 보다 훨씬 그 이상의 것으로서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아 새로운 믿음을 상고하도록 초대한다. 이 사건은 새 시대의 서막이었는데 성육신 사건이 그리스도의 오심처럼 이 사건은 성령의 오심이었다.

 

6장 초기 팔레스타인 교회의 생활

 

오순절은 현 시대 끝까지 계속될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시대의 시작이었다. 보혜사께서는 거기에 머물기 위해 오셨다. 성령의 능력을 입은 사도들은 즉시 그들의 새로운 의무를 위해 일어났다. 그들은 새로운 세례를 받은 자들을 가르쳤고, 예루살렘에서 이적과 기사를 행했으며, 예수의 부활과 인류에게 미칠 소망을 선포했다. 초기의 이와 같은 성령의 나타나심은 얼마 후의 악의 출현을 야기시켰다. 예루살렘 교회에 있었던 첫 번째 악의 세력의 발발은 열심, 곧 그 자체로 보아 선한 것이었던 열심의 극단으로부터 나왔다.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채워져야 했던 마음 속에 사단으로 가득하게 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악영의 제안을 쫓아 성령을 속이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 첫 번째 소유 직후 교회 내부에 일어난 두 번째 소요는 헬라파 유대인 일부가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에 대해 시기하는 감정에 의해 위협을 받은 것이다. 큰 불화가 일어나기 전에 사도들이 개입하여 전교인이 선발하고 열 두 사도들이 기도하고 안수하여 임명한 일곱 사람들의 손에 맡겨졌다.

일곱 집사 가운데 빌립은 자신이 전도자 또는 순회 말씀 설교자임을 입증하였다. 스데반의 순교 직후에 큰 박해 때 예루살렘을 떠나 사라미아성에 피신처를 두고 주 예수를 증거하였다. 예루살렘에서처럼 사마리아에서도 여러 표적들을 통해 성령의 강림이 입증되었다. 빌립이 전도하여 회심한 자들에게 사도들이 성령받기를 기도하고 안수하매 그들은 성령을 받게 되었다. 바울의 회심은 주의 영에 의해서가 아니고 주님 자신에 의해 인격적으로 이루어 진다. 그러나 결국 주의 영의 사역도 발견된다. 아나니아가 환상을 본지 사흘 후에 바울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려고 그에게 보냄을 받아 바울에게 안수 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성령의 이 위로하심은 그 당시 교회의 종교적 삶을 특징지워주었다. 이제 구약성경에 기록된 여호와 경외는 신약의 자유와 기쁨에 의해 그 의미가 완화되었고 또 이 두 가지 느낌, 곧 그리스도인의 삶을 죄로부터 지켜주는 두려움의 느낌과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평화와 기쁨의 느낌, 이 둘 사이에는 그 어떤 실제적인 모순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둘은 서로 보완적이었지 상호 배타적인 원리가 아니었다.

주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순절날 예루살렘의 할례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세례를 주시던 것처럼 이제 그 분은 그 똑같은 성령을 이 이방인들 무리에게 보내셨다.

 

7장 이방교회 설립

 

스데반 순교와 더불어 흩어졌던 예루살렘 교회 일원들 중에 어떤 이들은 그리스어를 말하는 자들에게, 심지어 수리아의 안디옥까지 복음을 전했다. 이런 흩어진 제자들의 노력을 통해 헬라파 기독교 교회가 발생했다. 바나바와 사울의 선교는 성령의 부으심이 뒤따랐는데, 이것은 보다 풍성한 열매가 많았다. 처음에 바울을 파송한 성령은 후에 그의 길을 통제하시고 지시하셨다. 이것은 특히 바울이 소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향하도록 지시함을 받은 여러 사건 가운데 명확히 드러난다.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자유로이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의 초기 경험 중에 하나가 오순절 은사의 실재를 증명한 것이다. 바울은 이 사람들 가운데에 성령이 사역하고 있는 표시가 없음을 간파하고 그들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이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은 다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왔다. 세례 후에 사도들이 안수하는 것은 전체 교회의 인정된 관습으로 되었고 또 그리스도의 영의 특별한 은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관례가 되었을 것이다. 사도들의 예상과는 반대로 성령은 차별 없이 세례 받는 모든 사람들 위에 부어졌다. 교회의 우주적 원리를 구원해낸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받은 같은 성령이었다.

 

2부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나타난 성령

 

1장 공간복음에 나타난 우리 주님의 가르침

 

주님이 성령에 대해 가르친 내용 가운데 공관복음서가 기억하는 부분은 지극히 적다. 누가가 서술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입장을 구약성경 말씀 위에 세우신다. 그가 기름부음을 받은 그 성령은 바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이었고 동시에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영이었다. 그리스도는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해당하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의 성격을 받아들이신다. 그가 받으신 기름부으심은 단순히 어떤 한 직책에 대한 임명이나 심지어 선지자적 능력의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그의 전 인생이 하나님의 영의 빛과 능력의 홍수로 넘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로 사역하시려고 가신 것처럼 그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영적인 인식능력을 통해 자기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으로 세례를 받았고 동시에 이 세상에서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사역을 위해 준비되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의 길은 주님이 걸어거셨던 것처럼 유혹과 고난을 통해 죽음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2장 요한복음에 나타난 우리 주님의 가르침(I)

 

4복음서는 영적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보다 더 자세하게 성령에 대한 내용을 다루며, 독자들을 인간의 내면적 생명 속으로 한층 더 깊이 이끌어간다. 동시에 이 복음서는 하나님의 영이 기독교회 내에서 앞으로 어떻게 사역할 것인가를 보다 풍성하게 제공해 준다. 요한복음의 으뜸되는 특징인 위대한 담화씨리즈 가운데 그 첫 번째는 인간의 생명을 중생시키는 원리로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서론이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더 많이 배울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다. 그러나 보다 더 시급한 결핍이 있었음을 깨닫지 못했다. 영적인 삶은 새로운 왕국의 제자가 될 첫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영적인 삶은 영적인 태어남과 더불어 시작된다. 위로부터의 태어남은 육적인 태어남이 아니고 영적인 태어남이다.

주님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는 새 생명, 곧 인간 속으로 들어와서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원천으로 올라가는 새 생명에 대한 개념이 있다. 요한복음의 표어들 가운데 하나인 영생은 3장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관련되어 있다. 4장에서는 영행이 그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을 통해 오는 것으로 보여지고, 10장과 17장에서는 주님의 직접적인 선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의 영생은 인간 속의 성령의 결과로서 또 영적 생명의 소산 내지 극치로서 보여진다.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대화에서 주님께서는 가버나움의 회당에 모인 청중들에게 자기 자신의 살과 피를 영생하는 양식과 음료수로 주셨다. 양식과 참된 음료는 의심할 나위없이 그것이 참된 생명에 해당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성령이라는 말이 언급되거나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서는 전반적인 가르침이 성령의 활동을 전제한다. 생명을 주는 것은 우리 주님의 인생 가운데 있는 성령이다. 또한 성찬식이나 가타 다른 경우에 생명을 주는 주님의 인생이 신자들에게 전달되어 그들에게 영생의 양식이 되는 과정을 중재하는 것도 성령이다.

 

3장 요한복음에 나타난 우리 주님의 가르침(II)

 

보혜사 교리는 예수께서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시는 내용을 포함한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날까지 자연적으로 보류되었다. 성령은 인자의 역할을 맡고 또 주님께서 자기 교회를 위해 맡은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보호자인 것이다. 보호자의 첫 번째 기능은 피보호자를 변호하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있을 동안 자기 제자들을 변호하셨고 또한 아버지의 영이 자기가 떠나고 난 뒤에 변호해 줄 것을 예언하셨다. 그러나 다른 보혜사의 사역은 핍박받는 시대에서 변호하는 일로만 제한되지 않는다. “다른 보혜사란 그들 가운데 영원히 거하실 뿐 아니라 영원한 스승이 된다. 주님의 가르치던 직책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 보혜사께서는 하나의 선생으로서 우리 주님의 지상사역의 범위를 확대시키되 주님께서 몸소 다니셨던 땅의 어떤 부분도 포기하심이 없이 그렇게 하신다. 아들에 의해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보혜사는 자기를 보내신 아들을 증거할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므로 자기 증거가 진리의 열매를 맺을 필요가 있다. 성령의 증거는 사람들의 말, 행동, 삶을 통해 나타난다.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사역이 무엇인지 그것을 계시함을 통해 대답을 얻을 수 있다.(16:8) 아들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곧 자신 속에 원천을 둔 가르침을 말씀하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을 말씀하셨듯이 성령도 마치 따로 분리된 지식의 창고로부터 끄집어내듯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그가 하나님의 음성으로 충만한 내적 생명을 통해 들은 내용을 선포하실 것이다.(16:12) 이런 내적인 교제와 교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을 해석하고 성령은 아들과 아들 안에 있는 아버지를 해석한다. 따라서 아버지의 계시는 성령의 오심으로 완성된 셈이다.

 

4장 바울 서신의 가르침(I)

 

바울 사도의 첫 두 서신은 1세기 중엽 새로 선교된 마게도니아의 여러 교회 가운데 하나인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보낸 것이다.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의 첫 부분을 통해 유럽에도 소아시아에처럼 복음이 전파 될 때 성령의 역사가 동반되었음을 알게 된다. 더 나아가 데살로니가에서는 교회를 세운 자들의 믿음과 다른 여러 교인들의 삶을 통해서 뿐 아니라 예언의 은사를 통해서 성령이 밝히 드러났다. 성도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의 윤리적인 면은 데살로니가후서에 다시 나타난다. 성령의 사역은 아버지, 곧 이들의 택하심을 효과 있게 만드신 아버지의 목적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진다. 그 전체 사역과정은 구원, 곧 인간의 순수하지 못하고 혼합적인 속성을 건강과 생명의 충만으로회복하는 구원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짐을 볼 수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처럼 그 자신이 고린도의 초기 사역 때 체험한 성령의 나타나심을 언급함으로써 시작한다. 고린도에서도 그의 말씀전파 사역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그 능력의 근거는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지혜를 계시하시는 분이다. 그 이유는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 심지어 신적인 지식과 뜻, 곧 사람들에게는 불가사의한 뜻의 깊은 것까지도 탐색하시기 때문이다.

 

5장 바울 서신의 가르침(II)

 

갈라디아서에는 성령의 사역이 3장에서 비로소 나타나는데 여기서 바울 사도는 성령께서는 자기 사역을 통해 주어진 사실을 자기가 전파한 복음을 위한 논거로 삼는다.(3:2) 이 호소 내용 가운데는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 내용은 첫째 갈라디아 사람들이 세례를 받을 때에 처음으로 성령을 받았음과 두 번째는 성령과 성령의 은사, 곧 그들 가운데 바울이 명한 사역을 수행하고 있던 자들의 안수함을 통해 내린 이 기적인 은사가 계속 공급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리를 지니며 성령은 이 모든 그리스도인들 마음속에 공통적인 이런 요청을 들려줌으로써 성자의 구속사역을 효과 있게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영과 사이의 대립을 나타낸다. 육은 외부적이고 천성적인 것에 동감하고 영은 내면적이고 하나님께 향하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 외에 육은 죄의 정욕의 영역인 반면에 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의 정욕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인도한다. 성령이 어떤 사람을 인도하면 그는 성령을 쫓아 행한다. 그렇게 되면 그의 생명 가운데는 활동과 진보가 있어서 한걸음씩 성령의 법의 곧은 직선거리를 따르게 되어 그는 매 순간 결승점을 향해 전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삶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실 때에 믿음으로 그를 영접하면 모든 것이 역전 된다. 죄와 사망의 법이 새롭고 더 강한 원리, 곧 그리스도 안의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 정복을 당하는 것이다.

 

6장 바울 서신의 가르침(III)

 

성령의 사역은 대규모적으로 교회의 삶 속으로 들어와 초대교회 당시 사상에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안다고(1:19) 썼다. 빌립보 교인들의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공븝), 이 두 가지는 로마 옥에 있는 바울에게는 너무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에도 성령을 언급하면서 교회의 사역을 통해 공급되는성령을 말했다. 자신에게 공급되는 성령은 교회로 말미암은 것으로 돌린다. 자기가 회심시킨 자들이 기도할 때 성령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또 그가 보내신 새롭고 풍성한 성령이 자기 마음에 쏟아져 자기의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게 함을 확신했다.

골로새서에서는 사도 바울의 사상이 새로운 논쟁을 통해 다른 분야로 들어간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영이 내재함을 통해 소생하고 뜨거워지는 마음속에 그 기원을 둔다. 사랑 곧 성령의 내재함의 증거로 사랑을 말한다.

에베소서는 성령을 매우 많이 언급한다.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뒤따랐고, 믿음에는 약속하신 성령의 인치심이 뒤따랐는데 이 성령은 성도들의 생명 속에서 거룩케 하는 능력인 동시에 미래에 우리가 상속받을 기업의 첫 담보물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기업인 새 이스라엘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뒤따르는데 이 해방은 구원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윤리적 영광을 그의 피조물이 인식함으로써 밝히 드러날 것이다. 에베소서 113절에 두 가지 핵심 단어가 나온다. 자기들의 세례를 믿던 그 신자들은 장차 완전히 이룰 해방을 바라보며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것이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은사의 거룩성을 강력하게 언급하면서 죄에 빠져 누리는 것에 대해 강력한 반론을 제시한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권고는 성령을 인격적인 존재로 묘사하면서 이 성령을 이사야 6:10에서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동일시한다.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감사할 수 있는 하나의 동기가 될 뿐 아니라 커지는 책임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히브리서에 성령은 맨 처음으로 2:4에서 언급되는데 여기서 그의 사역이 복음진리의 증거자로 간주되어 있다. 6:4에서는 세례받은 자들이 성령을 받은 사실이 두 번째 언급되어 있다. 10:29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배도자는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자라고 표현되어 있다. 배도는 참람의 행위요 성령의 임존,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은총의 인치심이요 표시인 성령의 임존하심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9:14에서는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7장 다른 신약성경의 가르침

 

공동서신이 성령론에 대해 바울 서신과 얼마나 일치하는가를 살펴보면 흥미롭다. 야고보서는 성령에 대해서 단 한 곳에서만 언급한다. 4:4에서 기록자는 독자들에게 세속화되는 것을 경계한다. 베드로전서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이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내용과 더불어 놓여 있고 또 택한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와 구원하시는 사역과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3:4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형성시키는 성령의 사역을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3:18에 나오는 영은 분명히 주님의 인성의 영인 것으로 보인다. 주님은 육체를 떠나신 후에 인간들의 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베드로후서는 성령에 대해 단 한번만 언급한다. 아마도 성령이 교회의 삶과 관계하지 않고 구약 선지자들의 영성과 관계한다는 것은 이 기록자의 독특한 견해 때문일 것이다. 유다서 또한 성령의 사역에 대해 단 한번만 언급한다. 3:3에 이 기자는 자기 형제들보다 높은 수준에 속한다고 공언하면서 사실상 자기들은 낮은 수준의 이성의 속성대로 살며 영적인 포부와 직관이 없고, 그들의 인격 속에는 하나님의 영과 교제하는 요소는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표현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또 이와 대조적으로 믿음을 지키며 엄격한 정결을 요구하고 기도의 영을 통해 자기 통제를 정결함 위에 세우는 사람들에 대해 서술했다.

요한1서는 4:24에서 맨 처음으로 성령을 언급한다. 그리고 4:13에 다시 반복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믿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안으로 들어왔을 때 받은 성령이 하나의 영원한 선물로서 우리와 함께 머무신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은 결국 하나님 자신의 거하심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은 자기의 영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나님의 일곱 영은 하나님의 한 영의 여러 활동 혹은 여러 면으로 간주해야 한다. 성령의 본질은 하나이나 그 사역과 표현에 있어서는 다양하다. 이 영들은 일곱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일곱이기 때문이다. 즉 성령은 각각의 교회와 연관되어 고려되는 것이다.

 

3부 신약의 성령론

 

1장 하나님의 영

 

신약 속의 영이라는 주제는 넓은 범위의 개념을 덮는다. 사도 시대의 사상 속에는 악령의 세력이란 인격의 모양, 또는 인격적인 존재의 형태를 취했다. 여러 서신서들은 세상의 영, 불순종의 아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 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이 세상에서 활동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 혹은 주의 영, 성령 혹은 단순히 그 영 또는 영이다. 신약성경은 성령이라는 이름을 통해 나타난 성령의 속성과 사역의 윤리적인 면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신약성경에서 보다 단순한 명칭인 그 영”, 또는 관사 없이 이 매우 많이 나온다는 사실은 새로운 장소, 곧 성령이 삶의 체험 안에 충만케 하기 위해 오신 새로운 장소가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시고 역사하심은 이제 더 이상 희귀하고 동떨어진 어떤 현상으로 간주되지 않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사상과 사역 안으로 들어가는 현상으로 간주된다. 신약성경 속에서 보다 특별히는 여러 서신 가운데 나타난 성령은 우선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관계에서 상고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깊은 곳을 찾아가 그 마음을 아는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이 인간적이듯이 신적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은 모든 피조된 생명과는 구별된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과도 구별된다. 성령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또 하나님의 의해 보내심을받아 교회와 개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사가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에 그어진 이 구별은 세분 각자에게 해당하는 인격적인 속성과 동시에 놓고 보면 하나님의 존재 심오한 비밀을 암시해 준다.

 

2장 예수 그리스도의 영

 

아버지의 영은 또한 그의 아들의 영이기도 하다. 예수는 자기의 성육신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영과 관계하였다. 하나님의 영은 그 순간부터 생명을 주고 성화시키는 능력이신 예수의 영이 되었는데 주님은 이 영을 통해 사람의 아들로서 자기의 삶을 시작했고 또 끝가지 그렇게 살았다. 성령은 또한 그가 세례받으셨을 때 그의 위로 내려오셔서 그를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기름부으셨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성령은 영적인 생명, 곧 사람들이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로 태어나는 영적인 생명의 원리이다. 성령의 이런 새로운 생명은 예수에게 속하는 것인데 그리스도로서 그 자신의 기름부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게끔 유지되는 것이다. 성령은 직접 아버지께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통하여 중재되어 오신 것이다. 성령은 예수의 구하심을 통해 또 그의 이름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그의 행위를 통해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은 그리스도의 제 2의 자아(다른 보혜사)이다.

 

3장 교회의 영

 

부활절 선물로 성령을 받은 그 회중은 전체 교회를 대표한 것이다. 이 회중은 사실상 집결된 에클레시아였다. 비록 각자가 독립적으로 성령의 방문을 받았지만 그 사건은 동시적이요 단체적이었다. , 교회는 단체적으로 보혜사를 받은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몸(교회)의 공동적인 소유였으며, 개별적인 회심자가 교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는 그들의 재산이 되었다.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의 영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것이 될 수 없었다. 사도바울의 교회론은 주로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에 열거되어 있다. 고린도전서에는 지나친 개인주의와 그리스인들의 사고와 삶의 기질에 의한 사라진 공동책임감을 점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 모든 교회의 지체들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음을 통해 받아들여짐을 받는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에베소서에서는 교회내의 성령의 사역론을 펼침으로써 이 분열의 위험을 제거한다. 고린도전서 3:16처럼 각 독립된 회중 모임은 하나의 지역 성전으로 간주되고 여러 다양한 교회들은 로마제국 전역에 생겨난 많은 영적인 건물들인데 이 건물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많은 거하실 곳으로 고안된 것이다. 성령은 기독교 사회 단체의 매는 줄이다.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들은 하나의 살아있는 몸의 지체들이다.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그 몸의 공동의 생명인데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불어넣음을 받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영화된 주님은 그 머리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의 이 신적인 생명과 성숙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처럼 교회가 자기 고유의 사명을 완성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이 성령을 통해서이다. 성령은 교회 안에서 계속 증거하시며 계속적으로 교회를 가르치신다. 이것은 주님이 보혜사에 대해 하신 약속이기도 하다.(15:26;16:13)

 

4장 성령과 사역

 

모든 기독교 봉사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역(말씀전파 사역)의 직분을 시작한 특별한 형태의 봉사는 하나님의 영을 통해 주어진다. 전체 교회가 성령의 은사를 통해 영적인 제사장으로 헌신되었듯이 교회의 이런 직분은, 즉 직접 영적인 것과 관련되는 이 직분은 고도로 그리스도의 영의 기름부음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단체는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인 것이다. 이런 교회론은 우리가 어떻게 교회직분을 평가할 것인가에 영향을 끼친다. 영적인 몸의 이런 여러 직분을 가진 자는 영적인 사역을 수행할 과제를 받았으며 또 그것을 감당할 만한 영적인 능력을 필요로 한다. 죄를 사하기도 하고 그대로 놓아두기도 하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다. 그리고 주님은 이런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부여해 주셨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