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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신학자 존 칼빈(6-10장) - 김재성

이참리 2020. 5.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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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신학자 존 칼빈(6-10장)

성령의 신학자 존 칼빈
국내도서
저자 : 김재성
출판 : 생명의말씀사 200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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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율법과 복음

 

성경에서는 율법과 복음을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다. 율법들은 기독교인들이 힘써야 하는 경건과 복음의 특징들이 있다. 그래서 복음은 율법과 함께 선포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구원의 소식, 즉 복음을 믿고 살아가며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복음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호의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요,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신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 가운데서 더욱더 거룩한 생활에 힘쓰게 된다. 

 

그러나 값싼 복음주의자들은 구약의 율법을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반율법적인 사상인 이들은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함을 얻으면 더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이 그를 자유롭게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기적 반율법주의 형태는 노스틱주의자들에게 나타났고, 17세기 중반 영국에서는 일부 침례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표준복음 운동(the Gospel Standard Movement)에서 나타났다. 뉴잉글랜드에서는 안트 허친슨을 중심으로 퓨리턴들 사이의 논쟁이 있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을 정립하지 못한 또 다른 극단적인 가르침은 신율법주의이다. 신율법주의자들의 열심은 인정할 만하지만, 그러다보면 복음의 감격을 잃어버리게 되고 오직 인간적인 종교행위에만 집착을 하게 된다. 신율법주의자들은 결단력 있는 행동, 믿음 있는 자의 행동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한다. 신율법주의자들은 영국 퓨리턴지도자 리처드 백스터의 후계자들로, 특히 다니엘 윌리엄스가 주도했는데 이들은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엽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재구성주의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신율주의 주장자들은 특히 세 가지 면을 강조한다. 첫째로, 궁극적 진리는 역사적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믿는 반틸의 전제주의적 변증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 둘째로, 구약의 모든 율법을 오늘날 사회와 법정에서 철저히 적용해야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전천년기설을 종말론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이들 주장은 역시 세 가지로 비판되고 있다. 첫째는 성경해석에서 구약 본문의 맥락을 무시하고 너무나 안일하게 현실에 직접적으로 적용하려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기독교가 세상을 통치해야 한다는 승리주의와 정복주의적인 이미지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오직 율법만 강조함으로써 계시의 다른 측면들을 모두 약화시키고 있으며 성경적인 믿음의 여러 다양한 관계들을 희생시켜버린다는 점이다. 

 

울법을 과소평가하게 되면 그 역작용으로 “율법주의” 운동이 일어난다. 반대로, 지나치게 율법을 강조하는 교회가 되면, 그 역작용으로 은혜만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우리의 행위가 선행으로 취급되지 않게 해야 한다. 율법이란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므로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성도는 그 율법에 순종할 능력도 없고, 힘도 없다. 율법에서는 용서, 자비, 승리를 발견하지 못한다. 율법은 여전히 명령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복음만 기쁨과 평안을 가져 온다.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일찍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했듯이, 오직 복음이 투쟁하며 고통하고 있는 기독교인에게 위로를 준다고 확신했다. 결과적으로 지속적으로 복음을 강조하는 설교를 들어야만, 성도들은 자유함을 느끼고 하나님께 참된 예배와 봉사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와 복음에 대한 설명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항상 죄악을 극복하지 못하는 절망감에 깊이 빠져 버리든지, 아니면 자기 의로움에 도취해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데서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확신과 교훈을 주는 율법과 복음은 항상 같이 강조해야 한다. 칼빈은 복음과 율법이 함께 선포될 때 양심의 평안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칼빈의 해석학적 구조

 

칼빈이 성경주석에서 밝힌 부분을 찾아보면 대체적으로 구약은 율법으로, 신약은 복음으로 보았다. 그리고 율법은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대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칼빈은 “율법”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하나는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때는 계시의 통일성을 강조하며, “구약”과 동의어이다. 다른 하나는 신학적인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때는 심판의 말씀으로, 모세가 가르친 모든 교리로서 “교훈, 보상, 정죄”를 포함한다. 칼빈은 율법을 주로 세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첫째는 생활의 교리요, 둘째는 경고와 약속들이며, 셋째는 은혜의 언약이다.” 따라서 문맥과 상황에 따라 율법과 복음은 구약적 약속과 신약적 성취라는 대비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심판과 칭의라는 신학적 개념으로 대조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에서도 볼 수 있다.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더는 심판자가 아니요, 매우 자상하고 다정한 아버지가 되신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와 심판을 강조하는 한편, 복음은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아버지가 되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갈3:10~13에 나오는 율법과 복음의 대조는 바울 사도의 일관된 입장이다. 다만 이러한 정신을 로마서 3:31의 결론적인 선언과 모순되게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칼빈은 갈라다이서 주석에서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는 것을 거부하면서 율법의 목적이 바르게 적용되기를 소망한다. 또 로마서 주석에서는 성도들에게 의롭다하심을 얻은 후에도 율법과 복음을 잘 구별하라고 권면한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칼빈의 사상은 기독교 신학사에 크게 공헌한 부분 중에 하나로 발전되었다. 율법이 은혜 안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명쾌하게 밝히는 단계에까지 나아갔다. 루터는 율법을 항상 죄와 연결 지어서 생각한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 안에, 그리고 신실하심 안에 있음을 발견한다. 칼빈은 율법의 기능을 주목하여, 먼저 은혜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교사로서 긍정적인 기능을 하지만,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가혹한 처벌과 정죄라는 부정적 기능을 한다고 말한다. 율법의 용도는 첫째, 죄를 비추어 주는 용도, 둘째, 세상의 악을 억제하는 사회·정치적 용도, 셋째, 표준적 규범의로서의 용도이다. 율법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감사의 규범이요, 복음에 대한 반응의 규칙이 된다. 이 셋째 용도를 통해 율법은 지금도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 

 

7장 역동적으로 전진하는 교회

 

칼빈이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한 다섯 가지 개념들을 살펴보면, 첫째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이다. 진정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되어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보이는 교회로부터 벗어나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둘째는 신자들의 어머니로서의 교회이다. 우리는 모성적 보호의 품에서 탄생하여 자양분을 공급받아야만 성장한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과 현장으로 들어오시는 통치의영역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사귐을 누리며, 의존한다. 넷째로 선택된 백성이다. 교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선택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태에 의해서 세워지며,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가 흔들리거나 무너질 수 없듯이, 교회도 흔들리거나 무너질 수 없다. 또한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견고하심에 결함되어 있다. 다섯째로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이다. 칼빈에 의하면 참된 교회는 말씀을 선포하고 합법적으로 성례를 실시하는 곳이기에, 사소한 과실이 있더라도 합법성은 무너지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하나의 거대한 조직체 혹은 권한을 행사하는 권력기관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표상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드러내는 증표라고 다시금 가르치게 되었다. 

 

칼빈의 교회 개념에는 세 가지 중요한 개념들이 표출되어 있다. 첫째는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서 하나님의 도구로서 계시를 드러내고 선포하는 교회의 전진이다. 셋째는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한 언약공동체라는 인식이다. 칼빈의 교회론의 중요한 내용은 살아 움직이는 교회라는 개념에 있다.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극복하고자 초대교회에서 찾아 낸 “역동성”이다. 교회란 “역동적”인 것이 특징이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도상의 공동체로서 세상 앞에 하나님을 보여주는 기관이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구원의 여정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보았다. 교회는 언약 공동체로서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난다고 칼빈은 정리하였다. 첫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상호 교통을 통해서 언약의 시행이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장소로서 기능을 한다. 그리고 둘째로 교회는 믿는 자들 상이를 상호 결속하게 함으로써 전진하고 발전하게 한다. 이 언약적 기초가 확고하게 세워져 있기 때문에, 지상의 교회는 흔들리지 않고 발전하는 것이다. 

 

칼빈이 집중적으로 노력한 것은 교회의 개혁이었지만, 그것이 교회의 분열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교회가 본질적으로 회복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외적인 제도상의 하나 됨을 강조하기 보다는, 교회의 회원에 대해서 강조했는데 이는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교회론을 어느 분야에서 접근하든지, 그 핵심은 그리스도에 집중되고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며, 성도들은 그 몸으로서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칼빈은 성령의 사역을 근거로 강조하였다. 그리스도가 성도들의 마음속에 살아 계시며 역사하시는 성령의 "비빌스러운 연합"으로 인하여 교회는 하나의 머리에 연결된 통일성을 이루게 된다. 구원을 얻은 백성들은 두 가지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첫째는 영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어야 하고, 둘째로는 성령의 간섭하심에 따라서 눈에 보이는 자상 교회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러한 교회의 일체성은 외적인 제도의 통일성이라기보다는 영적인 것이다. 지상의 교회는 오직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는 일에 힘써서 노력하면서 한 분만을 따르도록 추구하고 노력해 나가는 것이다. 

 

8장 성례와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교회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세워진 기관이요, 하나님 나라의 대행기관으로서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요, 지체다. 지상에 존재한 교회는 성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세우고, 격려하고, 교화해 나간다.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말씀의 선포와 함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성례사역은 교회의 핵심 사역이다.

 

종교개혁이 신학의 내용을 갱신하고 회복한 것이라고 볼 때에, 성례론의 바른 회복은 곧 교회의 회복을 의미하였다. 칼빈은 교회가 맡은 가장 중요한 성례, 즉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두가지 예식, 성찬과 세례에 관한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주께서 우리의 약한 믿음을 붙드시기 위해서 우리 양심에 우리를 향하신 자신의 선한 약속들을 인 치시는 외적 표징. 이에 대해 우리는 주님과 주의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주를 향한 경건을 입증한다." 성례는 전제되는 약속들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으며, 일종의 부록처럼 약속에 결부되어 있어서, 그 목적은 약속들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고, 재가함으로써 확증하고 인 치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성찬에 임재하시는가에 대해서 설명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입으로 직접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의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다. 칼빈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되 성령이 끈이 되어서 참여하는 영적인 것이지, 혼합이나 융합되는 것이 아님응ㄹ 강조한다. "그의 방식은 영적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비밀스러운 권능이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끈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은 말할 필요도 없고, 루터의 성례론에서마저도 우리가 직접 그리스도를 받는다는 개념을 보았기에 성례에서 주님이 주어지는 방법은 오직 성령의 역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없이는 아무리 성찬에 참여한닥 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는 없다.

 

성례는 효과가 있고, 은사도 전달하지만, 그 자체로는 그럴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관련되어질 때에만 가능하다. 칼빈은 성례를 육체적으로 받아들이면 영적으로는 무익하다는 어것스틴의 말을 인용해서, 만일 말씀을 떠나서, 진리를 떠난 성례라고 한다면 무익하다고 강조한다. 떡과 포도주라는 상징물로써 그리스도의 실재 임재가 다가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례는 다른 방향으로 이해되어서 완전히 그 의미를 왜곡해 버리게 된다. 모든 영적인 효과는 오직 한 분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에게만 근거하는 것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와 생명의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만 비로서 우리에게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칼빈은 세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세례는 교회라는 사회에 받아들여 졌고,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인정을 받게 되어지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접붙임을 받았다는 시작의 상징이다." 그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 리스도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돕기 위함이요, 둘째,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고백을돕기 위함이다." 세례는 우리 믿음에 세 가지 유익 또는 목적을 가져다 준다. 첫째는 우리의 죄 씻음의 증거요, 표시다.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죽음과 새로운 삶을 나타내는 표징이다. 셋째는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되어짐을 증거한다. 세례란 표상이요, 징표 가운데 하나로서, 외적인 형식이나 의식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약속과 영적인 신비로움에 의존한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세례란 그리스도의 보혈로부터 우리들의 죄악의 씻음을 상징하는 것임이 첫 번째 주안점이다. 우리의 육체가 죄로 인하여 죽고, 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의해서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하고 연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할례는 신약 시대의 세례에 참여함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칼빈은 유아 세례와 할례 사이의 영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할례가 사죄, 씻음, 죽음과 거듭남의 상징이었듯이 유아 세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9장 기도와 언약, 성령의 도우심

 

우리가 기도하여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뢰어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진다. 그분만이 우리의 중보자요 대변인이다. 기도하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기도에 대한 성경적을 살펴볼 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공중기도에 대한 약화를 가져 와서는 안된다. 칼빈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개인기도뿐만 아니라, 공중기도를 힘써야 하고, 이를 위해서 훈련받아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공중기도에서 가장 조심할 부분은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어떤 것을 자랑하는 행동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모든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정한 장소에서 정한 시간에 함께 드리는 공중ㅇ배와 공적인 기도는 그 회중의 언어로써 드려져야 한다. 

 

칼빈은 기도의 네 가지 원리를 제시하였다. 곧 경외심, 참회, 겸손, 소망 등이다. 경외심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인식하면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지식은 오직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기도 시에 우리의 기도를 받는 분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고, 무엇을 간구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신다. 참회는 자신의 죄악된 본성에 대한 참회의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다. 자신의 무능력과 부족과 불충분함을 철저히 인식하는 것이 기도에 임하는 바른 심리이다.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깊이 인식한 다음에, 그 지식은 곧바로 기도하는 자신에 대한 점검, 인간의 부패함과 부족함과 연약함에 대한 탄원으로 이어진다. 기도란 겸손한 마음으로 죄에 대해 탄원함과 동시에, 참되게 죄악을 고백하는 정신이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이런 겸손의 열쇠를 통해서 기도의 문을 열어 볼 수 있는 특권을 주신다. 또한 기도의 원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하여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해야 한다. 기도의 본질에서 볼 때 기도의 응답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믿음에 따라서 오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우리의 희망에 대한 증거이다. 

 

10장 설교와 성령의 기름 부음

 

설교는 성령님의 주권적이요, 놀랍고도 신비로우며 즉각적인 사역이다. 초대교회 시대에 어떤 설교 잘하는 사도들이나, 목회자들이 널리 인기를 끌었던 것은 아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중에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서는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설교는 성령의 은사를 받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성령이 주시는 은사를 통하지 않으면 성경의 전달이나 감화 감동이란 불가능하다. 

 

성령은 설교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살아가게 하면서, 심지어 자신의 시련과 고통의 체험마저도 이 사역에 아주 밀접하게 연관을 갖게 하신다. 설교자는 자신의 준비기간을 통해서 확실한 성령의 은혜와 기름 부음을 체험해야만 한다. 성령님은 설교자의 설교현장에서 역사하시며, 기름 부어 주신다. 주님은 자유롭게 설교자의 전달과정에 간여하신다. 성령의 기름 부어 주시는 능력으로 설교자는 담대함과 복음 선포의 자유함을 갖추게 된다. 

 

존 칼빈은 설교가 계시의 문제, 심판자요 구세주로서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진정 죄이으로서 벌거벗은 인간이 회개하고 믿음으로써 “의로운” 사람이 되어지는 놀라운 역사임을 깊이 다루고 있다.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순종은 성령의 은혜의 역사이지 자연의 작업이 아니다. 은혜의 역사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 복종은 성령의 사역이다. 은혜의 역사로서 기도가 요청되어지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는 우리의 반항심을 쳐서 복종시키는 의미에서, 얻으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이다. 청중이 그들에게 설교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열망하게 되는 것,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고, 다른 것들로부터 그것을 구별하여, 그 말씀을 믿고, “실천자”가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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