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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 관한 새 관점

이참리 2020. 6. 17.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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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 관한 새 관점

기원.역사.비판 -가이 프렌티스 워터스

바울에 관한 새 관점
국내도서
저자 : 가이 프렌티스 워터스(Guy Prentiss Waters) / 배종열역
출판 : P&R(개혁주의신학사) 2012.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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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용사가 엎드려졌도다" 루터부터 슈바이처에 이르기까지

 

바울에 관한 새 관점과 바울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경향을 이해하려면, 종교개혁과 그 후에 나타난 역사비평 해석의 발흥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1. 바울연구에 대한 종교개혁의 영향

종교개혁자들은 세 가지 면에서 해석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첫째,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인문주의자들의 비평방법이라는 기준에 따라서 훈련을 받았다. "고대 언어""수사학적 분석"에 대한 관심은 성경의 역사적인 맥락뿐만 아니라 문법적 맥락에서도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둘째, 개신교인들은 오직 성경이라는 신학적인 확신을 의식적으로 붙잡았다. 즉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원리를 확신했다. 셋째, 종교개혁자들의 역사적 훈련과 감각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해석사에 민감해지도록 영향을 끼쳤다. 종교개혁자들은 과거 해석자들의 통찰력과 사상을 고려하면서 바울서신 주석을 위하여 문법적, 영ㄱ사적 토대를 쌓았다. 그러나 독일의 성경비평가들은 종교개혁의 형식적인 관심사(오직 성경)에서 분리되기 시작하자, 곧 종교개혁의 내용적인 관심(이신칭의)에소도 분리되었다.

 

2.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유럽 철학은 근본적으로 회의를 인식론적인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러한 회의론적인 태도는 성경의 권위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교회의 이해에까지 확대되었다. H.A.마이어는 신약주석 첫 권(1829)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의학과 철학의 영역은 주석을 위한 영역 밖에 머무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단어로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공정하게 역사적이고 문법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바로 해석자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주석은 더 이상 체계적이고 신학적인 성경 전체가 주는 가르침의 제재를 받지 않게 되었다. 성경의 "역사적 의미"를 성경의 "문자적, 문법적 의미"와 동일시하는 종교개혁의 원리나 "비평학 이전의" 원리가 배제되었다.

 

3. 바우어와 튀빙겐학파

바우어는 사도사를 재구성하였다. 이 재구성에서 역사적으로 정통성이 있는 기독교의 주요 교리인 계시와 기적을 의식적으로 거부하였다. 바우어는 초대기독교를 이루고 있는 갈등이론을 발전시켰다. 전통적으로 신약에 있는 갈등은 정통에 대한 지지자들과 회의적이고 실제적인 이단의 지자자들 사이의 싸움으로 이해되었지만, 바우어는 갈등잉 기독교 안에서 경쟁하는 집단들, 즉 주로 베드로로 대표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바울로 대표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었다고 이해했다. 유대 기독교는 유대교와 모세율법에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방 기독교는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이신칭의 교리에 초점을 맞춘다.

 

4. 바우어에 대한 비판

바우어에 대한 세가지 비판, 첫째, 라이트푸드는 바울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과 같은 '할례자를 위한 사도들'에 반대하지 않았다. 둘째, 갈등이 바울신학의 중심에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진정성의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셋째, 바우어의 논지는 독립적인 검증을 할 수 없다.

 

5. 자유주의 신학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학자들은 바울 사상에 두 가지 중심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바울 사상의 범정적 노선으로서 바울의 이신칭의에서 드러난다. 또 다른 하나는 바울 사상의 신비적 노선으로서 성령 그리고 그리스도의 연합이라는 바울의 언어에서 드러난다. 자유주의 신학은 바울 구원론의 본질을 그리스도 안에서신비적인 경험을 함으로써 새 생명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경건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하심이라는 구속적 사역과는 너무나도 분리되었다는 점을 비평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6. 종교사학파

종교사학파는 바울 사상과 헬라신비종교와 유사점을 찾음으로써 바울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우어와 마찬가지로 종교사학파에도 역사적 기독교와 그 주요 진리와는 별개로 바울을 비평적으로 재구성하였다. 종교사학파의 초점은 교리적이거나 명제적이기보다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에게 신비적이고 제의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울종교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칭의가 바울신학의 중심이 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7. 알버트 슈바이처

슈바이처는 바울 사상의 뿌리를 비-팔레스타인 토양에 두는 종교사학파와는 달리 유대교와 바울 사이에 유기적인 관련성이 있음을 주장했다. 슈바이처 사상의 중요한 교리는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 신비주의이다. 세례에서 참여자에게 은혜가 주입되어 구속이 효력을 발위하게 된다. 주님의 식사에서 가장 큰 의미는 식사가 주님과 연합을 이루고 증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참여자의 관점에서 바울의 법정언어에 대하여, 바울의 칭의론이 당연히 방종주의가 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chapter 2. 20세기로 : 불트만, 데이비스, 케제만

 

1. 루돌프 불트만

불트만은 종교사학파와 같이 신약 사상계는 더 광범위한 종교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별히 그는 유대 사상과 헬라 사상이 혼합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불트만은 바울의 원천이 결정적으로 헬라 문화였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바울은 회심 후에 헬락회, 즉 헬라 기독교의 케리그마를 받아들였고 퀴리오스라는 칭호도 헬라주의의 종교적 용어를 예수님에게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트만이 유대교를 바라볼 때, 유대인들은 과거라는 멍애를 짊어지고 율법에 종과 같이 매였다고 했다. 반면 예수님은 진취적이라고 여겼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율법용어로 이해하고 공로를 통해 나아가려고 한 반면에 예수님은 순종이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요구했다. 바울은 유대교를 거부하고 순종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요구하는 점에서 예수와 한 부리가 되었다고 불트만은 논쟁하였다.

불트만에게 이신칭의는 형식적으로는 루터교 용어를 사용하여 바울 사상을 나타냈지만 실질적으로는 마틴 하이데거가 가르친 실존주의 철학의 형식을 입고, 바울이 실존주의 철학에 적합한 지지자라고 믿었다. 이 실존주의자들의 사상에 비추어서 불트만은 주로 집단적 혹은 의식적 용어로 바울을 이해한 당시의 세기 초 학문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개인이 중심이었고 칭의(법적적 개념)는 바울신학의 중심이었다. 칭의는 내적이거나 신비적 변화가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종말론적 실재”, 즉 율법의 행위로 얻어지거나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순전히 선물로 주시는 것이다.

 

2. 윌리암 데이비드 데이비스

불트만에게 있어 바울은 율법에 대해 전반적으로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바울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토라가 감당하던 역할을 새 지혜이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셨다고 본다. 이 논의에서 유대교의 연속성이 강조되고 율법은 유대교에 부과되어 긍정적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데이비스는 바울 사상의 기원을 이방의 자료가 아니라 유대자료에서 찾았다. 또한 샌더스가 주장한 것처럼 바울 사상의 중심은 이신칭의가 아니라 기독론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미래의 오는 세대가 현재의 사실이 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데이비스는 바울이 랍비들의 공통적인 믿음, 즉 메시아가 오시면 새 율법이 올 것이라는 믿음을 붙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율법 비판은 종말론적인 것이다. 그런데도 바울이 율법을 계속해서 지킨 것은 율법이 유대교 통행증이었기 때문이다.

 

3. 에른스트 케제만

불트만의 제자이자 튀빙겐대학교 신약학 교수인 케제만은 칭의가 바울 사상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케제만은 칭의는 구원사의 중심이자 시작이요 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케제만은 바울의 칭의를 구속사의 틀에서 떼어놓은 반면에 초점을 개인에게 맞춘, 불트만의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함으로써 불트만과 분리되었다. 케제만은 바울의 칭의가 근본적으로 집단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케제만은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인류에게 베푸시는 선물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바울의 법정적 언어와 변형적 의의 언어 사이의 긴장이 하나님의 의를 그 특이한 내용으로 인식되는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나오는 능력인 선물로 볼 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정리하면, 케제만은 바울에게 있는 법정언어/변형언어를 구분함으로써 복잡미묘해진 문제인 의의 언어를 우주적, 구원적 능력으로 바꿈으로써 해결한다. 그렇게 함으로 사실상 법정언어를 상실한다. 또한 칭의의 개인적인 측면을 유지하지만, 분명하게 칭의를 본질상 집단적 또는 우주적으로 간주한다.

 

chapter 3. 새 관점 등장: 크리스터 스텐달

 

스텐달은 루터와 어거스틴의 회심 경험으로 인하여 서구인의 바울 읽기에 색이 덧칠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방신학은 바울 사상 가운데 비교적 작은 주제(이신칭의)를 붙잡아 바울 사상의 중심으로 삼았고, 하나님의 계획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역할과 같이 더 의미 있는 주제를 중심에서 떼어냈다고 한다. 논문 두 편을 살펴 보자

 

1. “사도 바울 그리고 서방의 자기성찰적 양심

이 논문에서 스텐달은 바울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 즉 칭의를 죄책과 죄를 인식한 조건에 대한 대응이라는 이해를 거부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모델은 루터의 독특한 종교심리학, 즉 루터의 어거스틴적 배경, 로마 가톨릭과의 싸움, 민감한 양심 등이 결합하여 맺은 열매라고 주장하였다. 이 모델이 바울 해석자들의 열매이지 바울 자신의 열매가 아니라는 점이다.

스텐달은 자신의 접근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로마서 9~11장은 1~8장의 부록이 아니라 로마서의 정점이다." 로마서 9~11장에서 일반적으로 로마서뿐만 아니라 바울 사상의 중심이 되고 체계화된 원리, 즉 유대 이방인 문제에 다다르게 된다. 바울은 다음 두 가지 중요한 질문에 사로잡혔다. 1) 율법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2)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를 위해 메시아가 오신 결과는 무엇인가? 달리 말하면 "교회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에서 이방인들의 위치"는 무엇인가?

스텐달은 갈라디아서 3:24이 메시아 시대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에 참여하게 된 이방인들에게(29) 율법을 부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 본문에서 "우리"/"너희"는 바울 자신을 의미하지 다른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롬 7장은 바울이 율법 바체가 죄라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율법을 변호하고, 율법의 거룩함과 선함을 변호한다고 말한다. 이 본문은 "양심의 완전한 가책"이 아니라 "자아의 무죄선언"이다.

 

2.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 있는 바울"

스텐달은 상호배타적인 양극 방법으로 사도 바울의 삶과 가르침을 실용적으로 제시한다. 첫째, 로마서에서 바울의 최고 관심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이고 이 관심을 전개하면서 그는 논의 가운데 하나로 이신칭의 사상을 사용하였다." 이 점을 설명하며 바울의 관심은 두 제도(기독교와 유대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획에 있는 두 공동체와 공존"에 있음을 강조한다. 둘째, 바울은 소명을 경험했지 회심을 경험한 것이 아니다. 스텐달은 관련구절을 통해 볼 때(9, 22, 26; 1) 바울이 개종을 경험한 증거가 없다고 논증한다. 바울은 회심을 경험하지 않았고, 히브리 선지자들의 직분에 대한 소명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조점은 사도의 파송이다. 셋째, 바울이 가르친 것은 칭의교리이지 용서교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스텐달은 "용서"라는 말이 바울의 (진짜) 서신에는 없다고 말한다. 바울에게서 의라는 단어는 분명히 본질상 비도덕적이고 초점상 관계적이다. 구원론 적이 아니라 교회론 적이다. 하나님이 같은 조건으로 하나님의 백성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시키는 장치이다. 넷째, 바울이 연약함에 대하여 가르쳤을 때 죄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약함에 대한 바울의 관심은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다. 바울은 결코 연약함을 죄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다섯째, 바울은 사랑을 가르쳤지 온전함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회나 윤리적인 문제는 실제로 집단이나 공동체의 문제라는 것이다. 바울의 윤리는 칭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표준(, 정의)을 강조하지 않고 공동체의 조화라는 점에 초점을 둔 윤리이다. 이러한 결과는 바울 사상의 중심이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포함시키는 것이라는 스텐달의 중심사상에서 온다.

 

chapter 4. 근원으로?: 유대교에 대한 센더스의 입장

 

1. 배경: 방법의 문제

센더스는 자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방법론을 제안한다. 두 가지 질문에 초점을 두어서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연구한다. 즉 구원받는 이들의 공동체에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것과 어떻게 머무느냐 하는 것이다. 이 유형은 구원론이 아니다. 이 유형은 종교와 종교생활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그 종교가 어떻게 역할했는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체계에 대해서 체계적인 정밀성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종교의 근본적인 측면은 다루지 않는다.

 

2. 본질의 질문

선택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지만 선택은 또한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족장들의 공로이거나 이스라엘의 예견된 순종에 근거한다. 랍비들은 인간은 죄에 대한 충동이 있기는 하지만, 죄의 성향이 있다고 간주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손종할 때 나타나서 부족함을 보충하도록 도와주었다. 진정한 순종은 언약의 속박과 의미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신실하게 살려는 의도로 이루어져 있다. 랍비들은 죄를 다루기 위하여 취할 수 있는 속죄의 네 가지 수단(회개, 구약의 제사, 고난, 죽음)을 인정했다. 강조점은 속죄행위의 질보다는 속죄행위 자체에 있었다고 본다. 언약의 일원이 되는 것에 의해서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심판에 대한 논쟁의 배경에는 업적을 이루고 난 뒤에 은혜가 온다는 전제와 이루어진 업적이 없으면 은혜도 있을 수 없다는 전제가 있다. 율법에 대한 이해는 1)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 율법, 2)외부의 죄를 부각시킴으로 마음의 죄를 최소화 함, 3) 율법의 요구에 덧붙이는 자유와 무처벌로 나타난다. 율법을 형식적으로 부각시키지만 실질적으로는 율법과 그 권위를 무시한다.

 

3. 종교적 경험

종교는 불확실성과 염려자기 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온당한 확실성에서 나온 것임을 증명한다고 결론 내린다.

 

4. 비판

첫째, 샌더스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둘째, 샌더스가 고려 대상을 이른바 종교의 기능적 측면(들어간다머문다”)에 한정한 것에 반대한다. 원죄와 본유적 ()능력과 같은 교리 논의와 하나님의 이스라엘 선택 이유에 대한 논의가 실제로는 관련이 있는데도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아왔다. 셋째, 센더스는 자신의 논지와 반대되는 랍비들의 언급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결론을 지지하지 않는 증거들을 너무나도 성급하게 버렸다. 넷째, 센더스는 바울 시대의 유대교가 은혜의 종교였음을 확증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선택, 인간의 능력, 율법의 요구에 대한 순종, 하나님의 심판에 평가되는 순종, 속죄의 수단, 구원의 확신을 다루는 랍비들의 증거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예견적 또는 실제적 행위에 근거하여 선택하시는 분으로 이해하는 신학체계는 어떤 것이라도 성경의 의미에서 볼 때 은혜가 아니다. 만일 바울이 랍비들과 구원론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고 다를 수도 없다는 선험적 판단으로 바울을 접근하면 바울이 가르치는 인간 본질에 대한 비평의 깊이나 하나님의 은혜의 높이를 오해하게 된다.

요약하면, 센더스는 유대교를 순수 펠라기우스주의 종교로 그린 것을 수정하고, 이 종교는 본질상 반펠라기우스적임을 증명하였다. 선택, 인간의 능력, 순종, 속죄, 심판 때 받아들이짐 등에서 랍비들의 견해는 보편적으로 논쟁의 여지없이 신인협력설적이다. 인간의 행위와 노력은 하나님의 은혜보다 뛰어나다. 매우 실제적인 의미에서 구원은(은혜언어임에도) 율법의 행위로 이루어졌다. 바울이 당시 유대교와 불일치하지 않다는 점을 증명한다.

 

chapter 5 슈바이처 부흥: 바울에 대한 샌더스의 입장

 

1. 앞선 연구에 진 샌더스의 빚

2. 바울과 유대교

샌더스는 바울이 구원론적인 근거로 유대교와 의견이 다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은 유대교가 구원을 유대교인들에게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실수했다고는 믿지 않는다. 바울은 유대교가 자신의 용어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았다.

3. 언약적 신율주의

바울에게는 변형된 언약적 신율주의가 있다. 이러한 변형은 바울이 우선시 하는 두 가지, 중심적이고 조직적인 확신에 따른 것이다. 즉 예수는 모든 이의 구주 그리스도이시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불렸다는 점이다. 바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여전히 유대인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중요한 신념체계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백성과 다르게 되었다. 모든 다른 점에서 연속성이 있음을 인정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일원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당시 유대인들과는 다른 답을 갖고 있었다.

 

4. 곤궁 전에 해결

바울이 유대교를 비난한 것은 유대교가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곤공 또는 이방인의 곤궁에 대한 개념은 심판 때 구원받을 것이라 확신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이라는 중요한 확신에서 왔다. 따라서 사람의 곤궁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서로 일관성이 없는데, 이러한 비일관성으로 인하여 드러난 것은 바울의 설명은 추론을 중요하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이러한 중요한 확신을 증명하려고 개발된 논증이라는 점이다.

 

5. 이동용어: 의와 칭의

특별히 라는 용어의 사용에서 바울은 유대교와 다른 점이 있다. 바울은 라는 용어를 유지용어ㅏ 아니라 가입용어로 쓴다. 바울의 용법을 살펴보면서 샌더스는 바울이 의라는 용어를 법정적 용법과 참여적 용법을 구분하지 못하여 신중치 못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참여적 용어가 더 근본적이고 바울 사상을 더 정확히 반영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그리스도에 참여함은 궁극적으로 같은 것이다.”

 

6. 바울의 율법

어떤 사람이든 율법을 본래적으로 지킬 수 없다는 바울의 견해를 샌더스가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신학을 체계화하면서 샌더스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언급이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다는 중요한 확신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확신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 두 가지 확신이 궁극적으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이 확신에서 나오는 바울의 논증은 필연적으로 모순적이다.

 

7. 연관성과 일관성

율법에 대한 바울의 언급에 근거하여 샌더스는 바울이 일관적이지 않거나 체계적이지 않지만 연관성은 있는 사상가라고 결론을 내린다.

 

8. 그리스도의 죽으심: 바울의 용서와 죄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바울에게 근본적인 속죄가 아니었다.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함으로써 죄의 권능으로부터 구원받음을 함의한다. 그리스도가 모든 이의 구주라는 더 선험적이고 근본적인 확신으로 말미암아 바울이 왜 유대교의 속죄 가르침을 버렸으며, 왜 그의 사상에서 회개와 용서가 그다지 작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다. 그것들의 결핍은 유대교가 그 자체로 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 내재적으로 불만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chapter 6 샌더스 이후: 레이제넨과 던

 

1. 레이제넨

레이제넨은 율법에 대한 바울신학에 일관성이 없는 몇 가지 노선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바울은 결코 율법을 정의하지 않는다. 둘째, 율법의 구속력이 지속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일관성이 없다. 바울은 율법이 폐지되었다라고 말하면서 또한 율법이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셋째,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성취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일관성이 없다. 여러 곳에서 바울은 아무도 율법을 성취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이방인들은 율법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넷째, 바울은 율법의 기원에 대하여 일관성이 없다. 즉 그리스도 사건(바울은한나으로부터 기원된 것으로 이해함)과 하나님의 제도로써 율법이 상반됨을 주장한다.

 

2. 제임스 던

1) 바울에 관한 새 관점

던은 강조점이 칭의로 가는 것에 주저한다. 즉 유대교를 차가운 율법주의적 선행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 체계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값없는 용서와 은혜가 거의 없는종교로 이해하는 것에 주저한다. 던은 구약의 언약적 신율주의와 바울의 언약적 신율주의를 연결시킨다. 던은 포로 후기 에스라의 개혁과 주전 2세기 마카비왕조의 난국을 인용하면서 율법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독특함에 대한 근본적인 표현이 되었다. 구원론적 관점에서 율법은 정체성의 표시와 경계로서의 역할을 하고 이스라엘의 독특함의 의미를 강화하며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를 구별하게 했다라고 주장한다. 이 독특함이라는 의미를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시고 언약과 율법이라는 선물과 혜택을 입었다는 면에서 특권이라는 의미이다. 율법의 행위는 일반적인 선행이나 개인의 공로를 얻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의인이 언약백성 안에서 지위를 유지하려는 순종의 유형이다. 바울이 율법을 비판한 것은 이스라엘은 완전하게 물려받았으나, 경계를 세우는 제의만을 잘못 강조함으로써 오해를 불러일으킨 법을 비판한 것이다.

 

2)

던은 의를 헬라적개념이 아니라 히브리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헬라적 개념은 의를 개인과 개인의 행동을 평가할 수 있는 개념 또는 이상으로, 히브리적 개념은 의를 관계적인 개념으로, 개인이 맺고 있는 관계로 인하여 부과된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의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따라서 로마서의 목적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설명하고 변호하려는 것이다.

 

3) 칭의, 믿음, 율법의 행위

던은 의롭게 만들다그리고 의롭다고 선언하다의 선택은 잘못된 이분법이라고 말한다.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의 대상자를 여전히 대상자로 생각하신다. 언약의 대상자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맺은 관계로 변화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이 의로워지는 것은 관계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부과한 요구를 충족시킬 때이다. 따라서 의로워지는 것은 언약 속에 그리고 언약이 [율법]에 지운 조건 속에 사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는 언약적 신율주의를 가리킨다.

던에게 칭의는 한 번의 행위나 선언이라기 보다는 믿는 자에게 하시는 일련의 선언이나 행위이다. 이러한 선언은 처음부터 최후 심판까지 확대된다. 더 나아가 던에게는 로마서 2:13이 마지막 날에 믿는 자의 칭의를 위하여 율법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던에게는 칭의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의미에서 주로 신뢰라고 정의한다.

 

4) 전통적인 논증에 대한 던의 반응

바울의 라는 용어는 근본적으로 법정적(즉 헬라적)이 아니라 1차적으로 관계적이고 변형적(즉 히브리적)이어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지시한다.

 

5) 바울의 메타포로서 구원

던은 의, 칭의, 율법의 행위의 용어들을 메타포 방식으로 이해하였다.

 

6. 그리스도의 죽으심

구원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실제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명목적으로 이해된다. 바울에게서 메타포나 이미지는 바울의 복음을 통하여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다양하게 경험하는 것을 말로 나타내기 위한, 부분적으로만 적합한 시도이다. 바울의 다양한 이미지와 메타포는 하나님의 주도권으로 해결된다.

 

chapter 7 교회 등장: N.T. 라이트

 

1. 라이트의 신학그 자체

라이트는 이야기가 세계관의 형성과 표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라이트에게 이야기가 특별한 내러티브의 표현인 신학적 명제 뒤에 놓여 있다. 바울의 언급과 논증은 사실 예수님에 대하여 다시 쓴 본질적인 유대의 이야기의 표현이다. 라이트 사상에는 교리적 형식과 순차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에 반대하는 내재적인 편견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수직적인 용어로 이해하는 것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라이트는 그 관계를 본질적으로 수평적인 범주로 이해하려 한다.

 

2. 유대적 이야기: 2성전 유대교

라이트는 모든 유대교에 공통되는 기본적인 이야기가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창조주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이 세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둘째, 이스라엘이 주후 1세기에 포로 이후에 있었던 위기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셋째, 성전, , 토라, 국민 정체성은 “1세기 유대인들의 세계관을 일상 삶에 뿌리내리게 하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넷째, 유대인의 관습은 이야기상징을 통합했고, 1세기에 두 가지 주된 방법(예배와 축제, 연구와 배움)으로 표현되었다. 이방인으로부터 유대인을 표시하는 세 가지 상징, 즉 할례, 안식일, 음식법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라이트에 따르면 이 세계관에서 나오는 기본적인 신념은 단일신론, 선택, 언약/종말론이다.

 

3. 초대기독교 세계관

라이트는 초대기독교 세계관이 유대교 세계관의 모체에서 온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한다. 유대교 관습과 상징은 초대기독교 이야기의 관점에 따라서 버려지거나 또는 다시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가족으로써 교회는 종족적 정체성을 대신하였다. 교회 윤리는 토라를 대신하였다. 신앙적 신념은 할례, 안식을 그리고 음식법이라는 유대교의 표시를 대신하였다.

 

4. 바울과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라이트의 이해는 라이트가 바울을 종합한 것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된다.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라는 용어에 언약, 법정, 종말이라는 세 가지 독특한 배경이 있다고 주장한다.

 

5. 칭의와 칭의에서 믿는 자의 믿음

라이트는 칭의도 언약용어이고, 법정용어이며, 본질상 종말론적이라고 단언한다. 언약적인 선언은 법정이라는 메타포적이고 중요한 렌즈를 통하여 보이므로 종말론적으로 시행된다. 미래에 있는 판결이 앞당겨져서 현재 이루어졌다. 복음을 믿는 자들은 의롭다고 선포된다. 라이트는 바울에게 있어서 칭의의 주된 이해는 믿는 자들의 미래칭의이고, 칭의의 행위를 볼 때 믿는 자들은 현재칭의, 즉 이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참된 일원임을 경험한다고 주장한다. 라이트는 칭의를 심판의 날과 연관시키는 전통 방식을 바꾼다.

 

6. 믿는 자의 의

라이트는 로마서 10:3을 주석하면서 이스라엘의 자기의는 전통적인 것으로써 율법을 지켜서 얻는 행위의 의’”가 아니라 육신의 이스라엘이 스스로 세웠다고 생각하는 언약적인 신분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는 언약의 일원이 되는 신분”, 믿음으로 나오는 선물이다. 라이트는 도덕적 범주가 아니라 신분의 범주에서 형성된 정의를 발전시켰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7. 칭의에서 믿음

라이트는 현재칭의에 대한 믿음을 하나님 백성의 진정한 일원이 됨을 증거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문맥에서 현재칭의는 율법의 행함에 반대한다. 던과 같이 라이트는 율법의 행함을 주로 할례, 안식일, 음식법으로 이해한다. 미래칭의에 대하여 라이트는 믿음신실함은 동의어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8. 바울과 그리스도의 죽으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칭의에 대하여 전가는 비-바울적인 개념이라고 라이트는 분명하고 의도적으로 거부한다. 바울이 이 두 개념들 사이에 세우려는 연관성이 있다는 것과는 달리, 라이트는 이 두 개념의 연관성에 대하여는 침묵한다.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속죄적이고 화목적이라고 말하는데 동의한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믿는 자에게 적용하는 메커니즘을 표현하는 관점에서, 라이트는 일관성 있게 분명하지 않다. 비록 라이트가 법정용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바울의 교리로서 전가를 거부한다. 전가를 이유로 믿는 자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말할 수 없다. 라이트의 견해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믿는 자의 경험과 연관이 없는 곳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경우이다.

 

9. 바울, 회심, 그리스도인의 삶

라이트에게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결정적인 이동을 하였으나, 이 이동은 무거운 양심이나 유대교에 있을 때의 삶에 대한 불만과 관련이 없다. 로마서 7장은 율법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집단적인 경험을 묘사하고 있지 바울이나 어떤 다른 믿는 개인의 경험을 묘사하지 않는다. 오늘날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수반한다. 1) 네 가지 명제(그리스도의 죽으심, 부활, 메시아 되심, 주되심)에 동의, 2) 전통적인 개신교가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더 실제적으로 이해한 세례에 동의, 3) 공동체의 포괄적인 삶에 참여를 수반한다. 사회의 활동주의와 에큐메니즘의 관점에서 참여는 이 포괄적인 삶을 더 크게 인식한다.

 

chapter 8 새 관점 비평

 

1. 해석학적 문제들

1)유대교를 잘못 구성함

(1) 샌더스

샌더스는 고대 랍비 유대교는 반펠라기우스적 종교라고 주장했다. 이 종교에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용어가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신인협력적이다. 이 종교에서 행위가 근본적이거나 본질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카슨(D.A.Carson)의 고대 유대교에 대한 논의 중 몇 가지 결론을 요약하면, 첫째, 많은 학자들은 샌더스의 언약적 신율주의가 관련된 모든 초기(2성전) 문헌에 공정하게 그리고 똑같이 적용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둘째, 어떤 학자들은 언약적 신율주의의 구성이 환원법적 범주라고, 즉 각각의 제2성전 문헌들이 언약적인 공동체에 들어가고 머무는 것에 대하여 갖고 있는 균형의 다양성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셋째, 어떤 학자들은 언약적 신율주의라는 범주가 잘못 이끈다, 즉 독자들을 잘못 이끌어서 책에 있는 것보다도 더 획일성을 취하게 한다고 비난한다. 넷째, 어떤 학자들은 샌더스가 제2성전 문헌에서 언약의 역할을 과장했다고 믿는다. 다섯째, 이시기의 유대문헌이 어느 정도로 통속적인(즉 지역적인) 신학적 인식과 이해를 반영했는지 분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 라이트

모든 유대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잡혀간 상태에 처해 있으며 회복을 기다린다고 이해했다는 견해에는 세 가지 특별한 반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라이트가 주장하는 자신의 모델(27~32)을 강조하는 성경의 장들을 연구해 보면, 2성전 문헌에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이문헌들이 이 성경의 장들과 맞물리면, 라이트가 제안하는 -잡혀감-회복이라는 적절한 모델이 나오지 않는다. 둘째, 바울이 이 모델로 일했다는 분명한 지시는 없다. 바울이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이러한 모델을 물려받았다는 점을 분명하게 확증할 수 없다. 셋째, 신약에서는 사도들이 이를 그리스도의 의도된 잡혀감에 대한 해결책으로 믿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2) 학문적 재구성에 대한 잘못된 의존

새 관점은 바울의 해석이 유대교에 대한 학문적 재구성으로 통제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원리에서 작동한다. 새 관점 지지자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바울이 유대교를 반대한 것은 유대교가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2) 바울이 유대교를 반대한 것은 그 경계표지가 충분하게 총괄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3) 바울은 일부러 유대교를 행위종교로 거짓 설명하였고, 우리가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바울이 유대교 구원론의 부차적인 재구성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세 가지 문제를 부각 시킬수 있다. 첫 번째, 이러한 접근방법의 진실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문제의 고대 유대교 본문에 대하여 극복할 수 없는 많은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바울이 접근한 제2성전 문헌들을 확실히 안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하다. 두 번째, 2성전 문헌들은 해석이 필요하다. 이 본문들은 해석의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후예들이 성경을 바로 해석하기 위한 전통의 필요성이라는 로마교회의 교리에 반대하여 제기한 반대이다. 전통 자체는 해석되어야 한다. 세 번째, 일련의 본문들을 2차적으로 재구성한 것이 일련의 다른 원본문들을 읽는 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에 결함이 있다는 점이다.

 

3) 학자들의 제사장직?

새 관점은 학자들의 제사장직이 교회 안에 세워져야 한다고 제안한다. 새 관점 지지자들은 제2성전 유대교를 올바로 이해할 때, 바울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특별한 훈련을 거친 학자들만이 이러한 제2성전 문헌에 접근하여 읽을 수 있다. 바울을 연구하는데 이러한 모델은 바울이 자기 독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첫째, 바울은 독자들의 개인 판단이라는 권리를 인지하고 있다. 둘째,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 만일 바울이 자신의 가르침에 지속적으로 불순종하는 자를 출회한다면, 회중이 바울의 서신서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가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4) 구약 vs 2성전 문헌?

기능적으로 말하면 대부분 신약학자들은 구약과 제2성전 시대의 문헌들을 구분하지 않는다. 정경은 제2성전 시기에 구성된 가변적이고 꿰매지 않은 문헌에 독단적으로 부과된 것이다. 2성전 문헌들은 바울의 세계관, 즉 바울이 그리스도를 따라서 틀을 바꾼 세계관을 획일적인 방법으로 형성하고 구성하였다. 바울은 구약성경에만 권위를 인정하였다. 바울이 이경이 비교할 수 있거나 내재적인 권위를 갖는 것으로 인정했다는 암시가 없다. 성경과 전통에 대하여 중요한 바울의 구별을 인식하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바울에 대한 해석이 비틀어지게 된다.

 

4. 주석적 문제

1) “율법의 행위”: 유대교의 구원론과 인간의 무능

바울의 율법의 행위가 어떤 면에서 신분이나 정체성의 문제를 포함하게 한다 하더라도 율법의 행위는 주로 인간의 행위를 포함한다. 인간의 무능력 위에 있는 율법의 행위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용어를 가지고 바울의 마음에 신분만 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2) 칭의와 믿음

샌더스, , 라이트 이 세 학자들은 모두 다음의 말에 동의한다. 첫째, 칭의가 논쟁적인 교리이기는 하지만 바울이 유대교 그 자체를 구원론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다. 둘째, 칭의는 믿는 자가 믿음으로만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셋째, 칭의에서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받는 수단이 아니다. 믿음은 칭의에서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칭의에서 믿음은 바울서신 여러 곳에서 신실함으로 번역될 수 있다.

바울의 칭의를 이렇게 말하는데 대하여 몇 가지 주장을 할 수 있다. 첫째 바울은 믿음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결코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 믿음은 본질상 항상 수단이다. 신학적 용어로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수단적 원인이다. 두 번째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가 칭의의 유일한 공로상의 원인이라고 곳곳에서 단언한다. 세 번째 칭의는 진행 중이며 어느 정도 믿는 자의 순종에 명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근거를 두고 있으며, 평화는 단순히 믿는 자의 지속적인 소유가 될 수 없다. 평화는 어느 때이건 믿는 자가 소유한 변형적 은혜의 정도나 분량에 따라서 흔드릴 것이다. 네 번째 새 관점의 교훈은 칭의교리가 은혜교리이며 자랑을 배제한다는 바울의 반복적인 단언을 약화시킨다. 다섯째 새 관점 교리는 하나님이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4:5)라는 바울의 선언을 반대한다. 여섯째 새 관점 지지자들은 믿는 자들이 그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5:9)고 바울이 왜 단언하는지 적합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3) 그리스도의 죽으심(고전5:21; 3:24~26)

칭의는 본질적으로 구원론적인 행위이지 본질상 주로 교회론적인 행위가 아니다. 칭의는 법정적 거래이고, 그 제체로는 이러한 거래에서 온전히 용납되었다고 생각되는 죄인의 주관적인 조건에 절대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법정적 거래의 근거는 그가 대표하는 사람들을 대신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용서가 되었고, 믿는 자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유로워졌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받아졌고, 하나님의 본유적인 의가 세상에 드러났다.

4)보편적 범죄(5:12~21) 그리고 바울의 양심

대부분 새 관점 저서들에서 안타깝게도 무시되는 것은 아담의 죄라는 범죄가 그의 후손들에게 전가되었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능동적 또는 수동적)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전가되었다는 바울의 가르침이다. 로마서 5장을 이해하는 것은 새 관점을 비평하는데 있어 중요하다. 첫째, 로마서 라이트가 5장을 해석할 때 제2성전 문헌에서 상상하여 추론하고 강요된 성경신학적 격자를 통하여 바울을 보도록 무리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 진다. 둘째, 로마서 5:12~21에서 바울이 논증함으로써 로마서 1~3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경험적으로 논증한 정죄가 더 잘 이해되도록 한다. 셋째, 바울의 논증은 사람의 문제가 죄라는 범죄의 논증에 초점을 맞추는 것같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서 해결책은 그 범죄의 해결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넷째, 바울의 논증은 자기 백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표성, 즉 칭의라는 행위에서 그의 의의 전가라는 전통적인 교리가 이해되도록 한다.

바울에게 건전한 양심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첫째 스텐달과 다른 이들에게 범죄는 현저하게 주관적인 감각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대부분 범죄를 객관적으로 다룬다. 둘째,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단지 율법을 죄의 책임에서 변호하려하고 자기 자아를 무죄로 하려 한다는 스텐달의 견해는 논점에서 꽤 빗나가 있다. 스텐달과는 반대로 바울은 율법과 관련하여 자기 범죄를 매우 분명하게 인정한다. 셋째, 빌립보서 3:6이 바울의 유대교에서 삶에 대한 현재 긍정적인 평가를 지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바울은 죄 없는 완전한 상태를 주장하지 않는다.

 

3. 신학적 문제

1) 은혜, 율법주의, 공로를 혼동함

2성전 유대교에 대하여 새 관점이 최근에 이룬 구성은 은혜, 율법주의, 공로에 대한 논쟁을 혼란시켰다. 새 관점 학자들은 논하기를 유대교는 펠라기우스적 종교가 아니다. 바울은 펠라기우스주의와 싸우지 말았어야 했다. 그는 유대교와 다른 근거들에 동의하지 않았어야 했다.”라고 한다. 바울 당시 랍비 유대교의 두드러진 형식은 성격상 반펠라기우스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용어를 빌어 왔지만 본질상 전반적으로 은혜적이지는 않았다.

이것과 관련하여 세 가지 언급할 수 있다. (1) 종교개혁자들은 중세후기 가톨릭주의를바울 당시의 유대교와 비교한 점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두 개가 다르지만 중세후기 가톨릭주의와 유대교는 둘 다 성격상 반펠라기우스적이어서 이 둘을 비교할만하다. (2) 이미 주장한 것과 같이 바울은 반펠라기우스적이 아니지만 새 관점 지지자들은 바울신학을 반펠라기우스적이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철저하게 어거스틴적이다. (3) 많은 새 관점 지지자들에게 바울이 펠라기우스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을 충분히 뛰어넘을 수 있고 그러므로 역사신학과 바울신학의 관련성을 무시할 수 있다.

2) 전가를 무시함

새 관점은 바울의 전가교리를 조직적으로 거부하거나 무시한다. 바울 사상에서 전가교리를 제외한 결과는 비참하다. 사람은 자기 죄의 상태에 대한 충분한 깊이를 잊는 반면에 복음이라는 좋은 소식(외부에서 오는 의)는 동등하게 사람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구원은 자신의 행위에 있다고 들어왔다.

3) 범정적 은혜와 변형적 은혜의 균형을 뒤엎음

새 관점은 법정적 은혜와 변형적인 은혜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균형 있게 이해한 종교개혁의 업적을 무효화시킨다. 개혁파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항상 선행이 동반된다고 언제나 주장했다. 이러한 선행은 구원하는 믿음을 증거하며 이 믿음은 역사적 믿음이나 일시적 믿음과 구분된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행위는 칭의에서 의를 이루지도 않고 칭의에 있는 믿음과 신실함을 혼동해서도 안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공로라는 것을 근거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일관성 있게 주장한다. 믿음은 단지 그리스도의 의가 활용되는 수단이다. 믿음은 칭의의 역할에서 전적으로 수용적이다.

4) 칭의를 재정의 함

새 관점은 칭의를 구원론 교리가 아니라 교회론 교리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바울의 칭의가 교회론적이지 구원론적이 아니라는 교리는 바울을 가장 현저하게 도치시키는 것 가운데 하나다. 이 것은 억지로 이분법을 강요한 것 뿐이다. 이신칭의 교리가 개신교 운동의 존재 이유라는 점을 고려하면 새 관점의 교회론적 지지자들이 로마교회와 화해를 허락하기 위하여 이러한 이분법을 강요한 것에 의아해 할 것이다.

 

chapter 9 개혁파 기독교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가?

 

1. 논쟁 중인 교리들

1) 신학적 방법

논의에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계시와 그 해석의 본질이다. 샌더스와 레이제넨은 성경을 계시로 이해하는 방법을 문제시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내용과 그 시적인 배열(편지의 실제적 논증)에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니고 편지의 언어 밑으로 파고 들어가서 편지의 내러티브 배열(바울이 이끄는 넓은 세계관과 신념체계)까지 닿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 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경이 어떤 영원한 진리들을 가리키는 책으로 해석할 것인가?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평적이 되도록 두루뭉술하게 할 것인가? 그래서 내세에 대하여 뚜렷한 관심이 없이 주로 지금 여기에만, 기초적인 세계관에만 관심을 갖는 것을 말할 것인가?

2) 성경교리

새 관점은 제2성전의 지적인 구조가 바울에게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신학적 유형을 남기고 있음을 볼 수 있고, 그 신학적 유형으로부터 한 가지나 두 가지 요점으로 갈린다고 일반적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구성은 구약성경의 규범적인 권위와 뒤에 나타난 유대교의 문헌을 바울에게서 구별하는 것과 구약성경의 신적인 권위만을 바울이 충분히 인정한다는 것을 기능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
3) 복음이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개신교는 복음이란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님이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다스리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구원을 이루셨다는 선언으로 이해해왔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사이에 라이트와 던이 박은 쇄기를 정통 개신교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4) 칭의는 무엇인가?

5) 칭의에서 믿음의 역할을 무엇인가?

새 언약 지지자들은 칭의에서 믿음이 신실함과 같다고 종종 이해하였다. 따라서 칭의의 선언은 그 주체의 신실함이 언약을 지키는 것으로 보았다. 전통적으로 믿음은 칭의의 역할에서 전적으로 수용적이라고 보아왔다. 달리 말하면(물론 이 믿음만은 아니지만 직 이 믿음은 믿음의 열매인 행위가 동반하지 않을지라도) 믿음은 의롭다 하기만 한다. 바울에게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의를 붙잡아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지도록 외부의 의만을 의지한다고 강조해 왔다. 이러한 의미에서 믿는 자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3“9)가 있다고 한다.

6) 예수 그리스도는 왜 죽으셨는가?

새 관점의 글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속죄적이고 화목적으로 단언하는 데 바울의 용어를 일반적으로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말할 때 믿는 자가 자신을 억압하는 죄라는 전 주인에게서 자유로워졌으므로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 것으로 강조하는 부수적인 경향이 있다. 전통주의 자들이 바울을 따르는 것은 속죄적이고 화목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바울의 사상에서, 적절한 위치를 주는 점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실제적인(명목적이 아니라) 의미에서 믿는 자의 칭의의 유일한 근거됨을 단언하는 점에서이다.

7) 중생교리

라이트가 정의하는 복음은 공동체에 소속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주되심이지 구원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경시되는 것은 중생교리(새 생명)이다. 복음적인 종교에 따르면 죄인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결정적인 이동을 경험한다.

8) 믿는 자는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믿는 자의 확신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믿는 자는 언약의 조건에서 순종하며 사는 것에 달려있다. 달리 말하면 믿는 자의 확신은 본질적으로 언약적인 신실함에 근거한다. 확신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약속하신 것에 근거했던 전통적인 개혁신앙의 단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9)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세례의 역할은 무엇인가?

참여를 강조하면서 법정용어를 경시하면 새 관점의 견해가 사용될 때, 세례교리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가? 우리가 참여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단지 협력한다면, 그의 변형하는 능력이 삶에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2. 개혁파 기독교 안에서 새 관점

지난 수년간 개혁파 기독교 안에서 새 관점의 가르침과 입장은 점점 더 개방되고 있다. 첫째, 라이트는 복음기록의 일반적 역사성을, 예수님과 바울의 역사적, 신학적 연속성을 그리고 신약학이라는 과제의 정당성을 방어하는 데 현저하고 뛰어난 역할을 했다. 둘째, 라이트는 샌더스의 모델을 그리고 그 모델과 함께 오는 학문적 신뢰를(분명하게) 상실하지 않고서도 샌더스가 가져온 난제로부터 빠져나가는 길을 제시하려고 한다. 샌더스의 해결에서 곤궁이라는 가정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유대교, 유대교와 바울의 관계에 대한 센더스의 이해를 인정한다. 셋째, 언약에 대한 새 관점의 관심과 언약교리에 대한 개혁파의 관심에는 형식적인 병행이 있다. 많은 새 관점 지지자들은 홀로코스트 이후 상황에서 일하면서 유대교와 화해를 추구했다. 그들은 유대교와 신약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초기 학자들이 인정하거나 강조한 불연속성을 경시하거나 제거하였다. 넷째, 새 관점 지지자들은 언약을 드러낼 때 바울과 유대교에게 언약의 조건에 대한 순종이 각각의 체계에서 중심적이고 규정하는 역할을 강조했다. 다섯째, 새 관점 사상을 불편할 정도로 개혁파 기독교에 있는 경험적인 종교와 잘 어울린다. 신복음주의의 발흥과 더불어 개혁파인들 가운데서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도예빌트와 같은 이들의 신학에 대한 관심이 일었다. 이 운동의 하부에는 기독교 재건주의가 있다(신율적 표현을 포함하여).

라이트에게서 가장 매력적인 네가지 항목은 1) 라이트는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통치를 강조하되 이 교리를 복음으로 정의하기까지 한다. 2) 이와 비슷하게 라이트는 바울의 신학적 반성으로부터 구원론적인 범주를 추방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바울의 관심은 이러한 사건이 역사의 흐름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에 있되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는 곳에서 이루어진 제도적 변화에 주로 있다. 3) 라이트는 바울의 교리로부터 관조적인 범주와 관심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바울의 기독교를 규정한다. 4) 라이트는 능동적인 삶을 현저하게 강조하는 방식으로 바울의 기독교를 생각한다. 라이트는 이러한 능동적인 삶이 교회일치운동을 추구함,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삶에 적용함, 거룩을 추구함에 있다고 이해한다. 라이트는 일반적으로 거룩을 관조적으로(묵상, 기도, 자기점검) 이해하지 않고 능동적으로(도덕성) 이해한다.

 

3. 개혁파 기독교에 준 결과

개혁주의 기독교 안에서 새 관점을 받아들임으로 인하여 어떠한 신학적이고 실천적인 결과가 생기는가?

1) 하나님과 개인구원의 수직적 논쟁

(1) 선택

쉐퍼드는 언약이 선택을 결정하지 선택이 언약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는 전통적인 개혁파 교리를 비난하되 개혁파 복음주의를 언약교리로 향하게 하지 않고 선택교리로 향하게 한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설교자는 나누려는 관점을 가지고 사람들을 선택과 유기로 혼합된 무리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복음주의는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반역함으로 언약을 깨뜨린 자로 부르고 그들에게 하나님과 연합하고 교제하는 언약적인 삶을깨닫게 한다.”

(2) 중생

쉐퍼드는 요15:1~8을 해석하면서 외적으로그리스도와 연합한 가지와 내적으로 또는 구원론적으로그리스도에게 [참으로] 연합한자의 특징을 부정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이해는 언약을 언약의 관점에서 선택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관점에서언약을 이해한결과라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설명은 쉐퍼드의 사상에서 중생교리의 문제를 제기한다.

 

2) 본유적인 의

새 관점의 둘째 접촉점은 본유적인 의에 대한 기능적 집착이다. 즉 칭의의 역할에서 믿음은 실제적으로 언약적 신실성으로 인식된다.

 

3) 세례교리

새 관점의 세 번째 접촉점은 세례교리와 관련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세례적 중생에 대한 슈바이처의 견해, 즉 그리스도 안에 신비적으로 참여한다는 그의 견해에서 바로 나오는 견해, 세례에 놓인 높은프리미엄에 있는 병행을 주목한다. 세례가 중생과 그 증거를 단순하게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가 하나님과 관계의 진리와 실재를 분별하는 주요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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