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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를 말하다 - 톰 라이트

이참리 2020. 5. 23.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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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를 말하다

(Justification: God's Plan and Paul's Vision)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
국내도서
저자 : 톰 라이트(Nicholas Thomas Wright) / 최현만역
출판 : 에클레시아북스 2011.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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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 개관

 

제 2장 칭의는 무엇에 관한 내용이며, 왜 중요한가?

 

태양이 지구 주의를 회전하고 있다고 믿는 친구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내가 시작한 그 논쟁이 ‘성경에 대한 신선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천동설이 상징하는 신학적 주장은 나와 나의 구원이 기독교 신앙 전체의 중심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구원이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지만 우리가 우주의 중심은 아니다. 우리 관점에서 보면 ‘나와 나의 구원’이 기독교의 핵심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읽게 되면, 성경은 그와는 다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논쟁의 관건은 ‘칭의’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내용에 대한 이론을 세밀하게 조율하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구원이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더 큰 목적의 일부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파선된 세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목적 주의를 돌고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만일 종교개혁 전통이 바울 서신들만큼 복음서를 중요하게 취급했다면 이러한 실수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의 교리에서 핵심적인 요소들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께서 그와 맺으신 언약,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 부활과 새 창조,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 역사를 통해 지속된 하나님의 목적이 이끄는 계획이라는 의미에서 종말론, 그리고 특별히 성령과 기독교적 인격의 형성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같은 본문을 읽다 보면 이러한 주제들을 도입하지 않고는 칭의에 대한 문장을 고작 세 개를 쓰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특별히 두 가지를 강조해야 한다. 첫째는 바울이 구약을 풍부하고 절묘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성경을 인용할 때, 그는 단순히 인용하는 그 구절만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이 속한 전체도 언급하려고 한다. 둘째, 단일한 연속 내러티브로서 이스라엘과 전 세계에 관한 이야기에 대한 사도 바울의 이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내러티브가 메시아 예수 안에서 그 절정에 달했고, 이제 역사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언제나 의도했던 신선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믿었다.

 

진정으로 바울은 역사를 하나의 연속된 선으로 생각했으며,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단절되지 않고 진행되어 예수 자신과 그의 사역을 통하여 교회의 사역에까지 연결되는 그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 예수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세계의 역사 안으로 대격변을 일으키면서 침입해 들어오신다고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하여 세계와 인류를 구원하시려 했던 단일한 계획이 언제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단일한 계획은 이스라엘의 소명을 그 구심점을 삼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소명이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메시아 안에서 열매를 맺는 모습을 바울이 보았다는 사실, 이 사실들이 바울에게는 핵심적인 것이었지만, 옛 관점과 새 관점, 그 외의 관점들 모두에게서 거의 완전히 무시되어왔다. 갈라디어서 3장 29절에서 자신의 위대한 신학적 주제들(율법, 믿음,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 안에, 세례, 그리스도를 옷 입음, 유대인도 그리스도인도 아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하나)을 쌓아 올린 후에 바울이 내린 결론은 “그러므로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이다”도 아니며, “그러므로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써 구원을 받는다”도 아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이다.

 

2장 교전수칙(Rules of engagement)

 

바울에 대하여 혹은 그와 관련된 주제로 글을 스려고 할 때, 주해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다른 성경 본문도 마찬가지지만, 로마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증거 하는 책이다. 우리는 각각의 문장과 단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본적으로 바울이 말하는 주제는 무엇인가? 바울은 그에 관해 어떤 내용을 이야기하는가? 그러한 논의가 우리의 질문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바울 읽기의 역사는 실수들로 가득 차 있다. 사도바울과는 무관한 질문들에 대담하기 위해 성경 본문을 설교에 끼워 맞추거나, 이미 설정해놓은 주제에 적합한 핵심 단어와 구절을 찾아내느라 전체 단락은 대충 읽어내는 식의 실수가 있어 왔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본문 자체는 그와 별개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들의 목소리가 본문 속에서 메아리치는 것을 듣게 되는 것이다.

 

먼저 에베소서를 읽고, 다음에 골로새서를 읽고, 이 두 서신의 내용에 비추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나머지 서신들을 읽기로 결정했다고 해보자. 매우 유대적인 ‘우주적 구원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이다.(에베소서 1장 10절, 골로새서 1장 15~20절을 비교하라.) 그리고 우리는 그 계회의 수단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속 안에서, 그 구속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구출하셨다.(에베소서 1장 11~12절, 1장 13~14절). 그 결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합하여 이루어진 교회가 세워지고, 이들은 모두 믿음을 통한 은혜로 동일하게 구출되고(2장 1~10절), 이제는 하나의 가족 안에서 하나를 이루며(2장 11~22절), 세계를 위한 그리스도의 몸이 될 것이며(1장 15~23절),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지혜’의 증표가 될 것이다(3장 10절).

 

 

개신교 전통에 속한 ‘보수적인’ 교회들은 언제나 그들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해 왔지만, 반면에 전통의 노예가 되어있다. ‘새 관점’ 그리고 좀 더 최근의 바울 하계에 등장한 일부 다른 특징들에 맞서게 되었을 때, ‘보수적인’ 교회들은 되풀이해서 성경이 아닌 전통에 그 손을 뻗었다. 우리는 ‘교리들’과 교리들의 명제, 발전, 논박, 재진술 등을 그 당시의 다양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교회적이고 신학적인 환경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칭의의 개념에 대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켄터베리의 안셀무스는 ‘법정적인’ 맥락에서 그의 신학 작업을 수행했다. 그는 법과 ‘정의’라는 라틴 개념에 의존하였고, 그 개념들을 성경 자료에 적용했는데, 그 결과 성경 기록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본질적으로 히브리적인 사고 형태와 신약이 기록된 1세기의 그리스적인 사고 형태 모두를 왜곡시키게 되었다.

 

‘전가된 의’라는 개념이 조직신학적인 입장으로는 적법한 내용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로 바울 서신의 어디에서도 그 진술을 찾을 수 없는 내용이다. 마이클 버드는 ‘그 구절[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은 바울 안에 존재하지 않지만 그 의미는 존재한다.’고 말했다. “만약 ‘전가된 의’가 정말로 핵심적이고,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필수적이고 중요하다면, 바울이 결코 그에 대해 거침없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이상하지 않은가?” 바울이 말한 적은 있지만 실제로는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았던 내용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이라고 우리의 전통이 우리를 압박한다면, 우리는 이의를 제기해야만 한다.

 

성경 그 자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우선 신약이 기록된 1세기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한다. 이것은 사고의 형태, 수사적인 관습, 사회적 맥락, 함축된 내러티브 등 모든 수준에 적용되는 이야기이며, 특별히 단어들, 그 중에서도 전문적인 용어들을 그러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우리가 1세기 유대교에 대해서, 그리고 그 당시의 그리스-로마 세계에 대해서, 그리고 고고학과 사해문서 등에 더 많이 알게 될수록, 그 역사적 맥락에 우리의 성경 해석의 기반을 두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방대한 시대착오적인 자기 해석에 휘둘리고 사색적인 주해만을 하게 될 것이다.

 

바울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교전수칙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주해를, 그것도 역사적인 도구를 총동원해서 하는 것이 필요하다. 앞뒤를 살피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 부분에서 핵심 용어가 무엇인지 탐색하고, 더 큰 규모로 흘러가는 내러티브를 찾아내고, 바울이 이 두 문장 사이를 연결하는 접속사로서 이 단어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 바울이 일련의 주장 가운데 이 시점에서 그 특별한 성경 구절을 인용한 이유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러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바로 바울이 말하려고 했던 바를 정확하게 보게 될 것이다.

 

3장 1세기 유대교 : 언약, 율법 그리고 법정

 

요세푸스는 50년대 중반 예루살렘과 갈릴리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대해 묘사하면서, 혁명 당파들,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예언자적 운동들, 무능력한 로마 관리들, 그리고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을 탐독하고 있었던 열렬한 소수 집단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둘러앉아 천국에 가는 방법에 대해 토론하지도 않았으며, 신인협력설과 신성화와 같은 전문적 지식들에 대한 견해를 나누지도 안았다. 그들이 소망하고 갈망하고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것, 그분이 약속했던 일들을 이루시는 것, 그분이 천 년 전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에 행하셨듯이 다시 한번 역사를 돌이켜 원래 상태로 바로잡아 주시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바울의 신학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첫 번째, 1세기의 많은 유대인들은 역사의 시초로부터 고대 예언자들의 시대를 거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구원의 절정의 순간을 향해 뻗어가는 연속되는 내러티브 안에서 그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당시 다니엘 9장에 기초하여 연속되는 내러티브가 지속되는 ‘유배’ 상태를 가로지르는 긴 통로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1세기 유대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시기가 위대한 성경 내러티브가 연속되어 진행되는 시기라고 믿었으며, 그들 자신이 다니엘 9장의 ‘지속되는 유배기’ 안에서도 후기에 해당되는 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서 9장의 내용은 언약의 언어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명기 27~30장에 나타난 언약과 관련되어 있다. 거기에서 모세는 장차 임할 저주를 경고했고, 그 저주에는 이스라엘에게 임하는 끔찍한 심판과 유배가 포함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소송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언약의 관점에서도 하나님은 의롭다. 이러한 내용들이 바로 계약의 조건들이었는데, 이스라엘은 이를 어겼고, 그 결과 구체적으로 명시된 언약적 저주인 유배가 그 백성에게 임한 것이다. 이제 연장된 ‘유배’ 시기를 통해 진행되는 단일 내러티브, 유배와 하나님의 의의 성취로서 그 회복에 대한 기대, 이 모든 내용은 존 파이퍼가 그렇게 염려하는 제2선전 유대교의 본문에 대한 의심스럽고 난해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정경인 구약 성경인 다니엘 9장에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의’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첫 번째,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네가(전통적인 그리스어에서 ‘정의’를 의미하는 것과 달리 성경적인 그리스어에 반영된 히브리적 의미에서는) ‘규범에의 순응’을 의미하며, 이 의미가 하나님의 의라는 맥락에서 사용될 때 하나님 자신이 세운 규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충실함을 의미한다. 성경 안에서, 제 2성전 유대교 문헌 안에서, 그리고 바울 서신 안에서, 특별히 성경에 대한 바울의 해석 안에서 그렇게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펼치는 수단이 바로 이스라엘과 맺으신 그의 언약이었다.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하나님의 단일 계획은 곧 그 일을 이루심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신다는 것이다. 두 번째, 전가(imputation) 교리에서, 만약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관심’이라면, 이 의가 믿는 사람에게 전가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신자의 관심’이라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라고” 바울이 간주한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롬 4:24),(롬4:24),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의 ‘의’를 그에게 전가시켰다는 의미라고는 결코 이야기할 수 없다. 창세기 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한 곳이다. 이 언약 체결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의’는 그 언약에 충실하겠다는 그의 변치 않는 헌신을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을 통하여, 전 세계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단일한 계획’, 이것이 바로 내가 바울에 관한 글을 쓰면서 줄임 말로서 ‘언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율법, 유대교의 율법, 즉 토라는 이러한 내용들 안에서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그의 언약의 말씀을 구원받은 백성에게 주셨다.” 이 글귀는 바로 카슨이 편집한, 흠잡을 데 없는 옛 관점의 유래에 관한 책에서 보수적인 한 칼뱅주의자가 진술한 말로, 흥미롭게도 샌더스가 유대교 내부의 율법 준수에 대하여 주장한 내용의 핵심을 담고 있다. 그것이 바로 ‘언약적 율법주의(Covental nomism)’이다. “이제 너희가 언약 안에 있으니, 여기 너희가 지켜야 할 율법이 있다.” 하나님은 그가 이미 언약 안으로 불러들인 백성들, 그가 이제 노예 상태로부터 구출한 백성들을 위한 삶의 방식으로서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었다. 토라는 그 자체로 언약 헌장으로서 이스라엘을 다른 모든 나라들로부터 구분하였다. 그 후에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라는 문구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4장 칭의 : 여러 정의들과 난제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칭의 교리의 역사에 관한 2권짜리 책을 펴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제안하면서, 칭의 교리라는 세부적인 항목보다 더 폭넓은 규모의 이 구원의 행위를 강조한다. 이 내용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많은 성경적인 설명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같은 정도로 성경적이다. 그리고 칭의는 이러한 설명들 중에 하나이다.

 

“칭의 교리는 그 성경적인 기원과 아주 동떨어진 의미를 발달시키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수립되는 수단으로써의 의미이다. 교회는 칭의라는 교리 안에 하나님과 사람의 화해에 간한 논의를 포함시켰고, 그 결과 칭의 개념은 신약 성경에는 존재하지 않는 강조점을 가지게 되었다. ‘칭의 교리’는 교리 신학 안에서 바울 서신과는 아주 독립적인 의미를 품게 된 것이다.”

 

만약 지금까지 교회가 ‘칭의’라는 말로 의미했던 바가 바울의 의도와는 별개의 것이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것이 과연 중요한 문제인가? 그리고 성경적인 기원과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새로운 성경의 단어와 개념을 마음대로 사용할 자유가 교회에게 있는가?

 

맥그래스가 옳다. ‘칭의 교리’가 어거스틴 이래로 지향해온 방향이 있지만, 바울을 바울 자신의 맥락에서 진지하게 읽게 되면 그가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칭의에 관한 바울의 이해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구약의 확언을 통해서 확고하게 해석되어야 하며, 이 신실하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놀라운 방식으로, 하지만 분명한 방식으로 확증되었다.”

 

그렇다면 ‘칭의’는 무엇에 대한 것인가? 맥그래스가 지적했듯이 그 단어에 인류를 자신과 화해시키려 하는 하나님의 행위 전체를 묘사하는 책임을 부과해 왔다는 것이다. 그 던어에 하나님의 값없이 배푸시는 사랑과 은혜로부터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 복음의 전파, 성령의 사역, 사람의 마음에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 기독교인의 인격과 행동의 발달, 궁극적 구원의 확신, 마지막 심판을 안전하게 통과하여 그 종착점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의미를 포함해야 했다.

 

‘칭의, 디아키오시스’는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하지만 바울은 훨씬 더 자주 사용하는 ‘의’ 관련 단어들을 요약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 법정이라는 맥락 속에서 ‘의’는 그 법정이 누군가의 손을 들어주었을 때 그가 지니게 되는 상태를 지시한다. 법정이라는 상황에서 ‘의’가 법정이 판결을 내린 후에 승소한 사람의 상태를 가리킨다면, 우리는 어거스틴이 ‘의롭게하다’를 ‘의롭게 만들다’로 해석한 것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그 오래된 문제를 일거에 날릴 수 있다. 어거스틴과 그 후계자들에게 의롭게 ‘만들다’가 의미하는 바는, 칭의 안에서 하나님이 작고 예비적인 방식이기는 해도 그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디카이오,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의 핵심 의미는, 그 말이 어떤 사람을 변화시키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어떤 상태를 부여하는 선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칭의’라는 행위에 의하여 변화되는 것은 그 사람의 상태이지 인격이 아니다.

 

하나님이 가진 목적에 대한 바울의 관점은, 창조자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족을 통하여 이 세계를 곤경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이야기의 기초이다. 세계를-위한-이스라엘을-통한-단일한-계획이 존재하게 된 것은 온 세계가 처한 곤경을 제시하고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으로서이다. 죄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 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은혜와 죄 용서와 칭의와 영화를 주는 것 - 이 모든 것이 창조로부터 시작되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단일한 언약의 목적이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 이스라엘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그 사실이 바울에게 핵심적이었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사실 바울의 기독론과 바울에게 십자가의 의미,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가된 의’가 반쪽 설명밖에 되지 않는 그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완전하고 최종적인 유일한 길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라는 선물을 주신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로마서 4장 11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레의 징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창세기의 원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할례가 그 둘 사이의 언약의 징표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바울은 언약 체결에 관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언약”이라는 단어를 “의”라는 단어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이 ‘온 세계’를 유업으로 상속 받게 되는 것이었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죄의-문제를-처리하고-죄로부터-사람들을-구원한다는 개념과,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과-이방인이-한-가족으로-통일된다는 개념이 언제나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유이며, 그 내용은 바울에게도 사실이다.

 

성경적 칭의 교리, 특히 바울의 칭의 교리가 지닌 그다음 차원이 종말론이다. 이 종말론은 법정과 언약의 차원과 밀접하게 한 세트로 묶여있다. (가) 바울은 그 당시의 많은 동료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의 단일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과 전 창조세계의 궁극적인 구출이라는 명백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전진해오고 있다고 믿었다. (나) 하지만 바울은 기독교를 믿지 않은 동료 유대인들과는 달리, 하나님이 염두해 두셨던 그 명백한 목표가 메시아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이미 개시되었다고 믿었다. (다) 바울은 어떤 면에서 쿰란 종파와, 그리고 다른 그룹들과 유사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 ‘새 시대’가 개시되었고, 따라서 ‘지금-그리고-아직은-아닌’ 시기가 도입되었으며, 그 결과 예수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지속되는 ‘옛 시대’, 그리고 좀 더 결정적으로 이미 개시된 새로운 시대, 양쪽 모두 안에서 살게 되었다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말에 내리실 미래의 판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미래의 판결이 현재에 어떻게 선취되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기독론이다. 첫째, 용어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라는 단어 속에는 ‘메시아’라는 유대교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절에는 예수가 메시아,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이 될 것을 약속했던 다윗의 후손이라는 의미, 그리고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이 “주”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예수가 아닌 메시아로서 만물 위에 높임을 받았고, 피조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획득하였고, ‘퀴리오스’가 담당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그 역할 안에서 그를 이해해야 한다. 둘째, 메시아십의 의미는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장구한 역사를 정해진 목적으로 이끌어가는 인물이다. 따라서 ‘메시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 메시아 안에서 집결되는 인물로서, 그에게 적용되는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게 된다. 메시아가 “아브라함의 씨”인 것은 단순히 한 인물로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이스라엘-계획의 목적으로서 그 자신 안에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포함하고’있기 때문이다. 셋째, 메시아가 이루어낸 업적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려야 했지만 드리지 못했던 ‘순종’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피스티스-크리스투(pistis Christou)", '메시아의 신실함‘의 전정한 의미이다. 넷째, 메시아의 신실한 순종음 복음에 대한 바울의 요약문에서처럼(고전15:3) ”성경대로 일어난 죄를 위한“ 그의 죽음에서 절정에 달했고, 이 순종은 보통 메시아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었다. 다섯째, 바울에게 메시아의 부활은 전체적인 새 창조의 시작이다.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를 다시 살리셨을 때, 그 사건은 예수가 처음부터 줄곧 진정으로 그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신적 선언이었다. 여섯째, ”아들의 영(갈4:6), “메시아의 영”(롬8:9)이 메시아의 백성들에게 부어지고,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그러한 존재라고 이미 선언한 그 존재로 실제로 변화된다. 일곱째, 바울에게 메시아성은 그를 마지막 날의 재판관으로 자리 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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