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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메커니즘 - 르네 지라르 본문

신학하다

희생양 메커니즘 - 르네 지라르

이참리 2020. 6. 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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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메커니즘 - 르네지라르

희생양 - 르네 지라르

질투사회
국내도서
저자 : 정일권
출판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2019.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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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메커니즘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모방의 욕망이 있다. 이 모방의 욕망이 인류의 문명을 만들고 발달시켜왔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모방하며 언어를 배우고 지식을 습득하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모방의 욕망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모방 욕망이 건전한 쪽으로 방출되면 사회는 전반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간다.

 

그러나 모방 욕방이 꼭 건전한 쪽으로만 방출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 유명인사가 TV에 등장하며 들었던 가방, 입었던 옷 등을 통해 그 유명인사를 모방함으로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갖지 못했을 때에는 사회적 갈등이 유발되기도 한다. 마치 동생이 생기는 순간, 큰 아이에게 위기감이 찾아 오는 것처럼, 모방의 대상을 취하지 못함에 대한 갈등이다.

 

무엇인가를 이루며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이 선의의 경쟁으로 개인과 사회를 발전 시키는 반면, 욕망이 과열되고 경쟁이 심해질 때, 사회 전체는 극도의 긴장감에 빠지게 된다. 오늘날보다 훨씬 단순했던 고대사회의 모습을 보면, 경쟁이 과열되면 긴장감이 발생되고, 긴장감이 심해지면 폭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간은 그 폭력도 모방을 하여, 더 폭력적인 사회, 폭력이 보편화 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방의 욕구는 결국 사회의 폭력으로 귀결되는데, 한 공동체에서 갈등이나 폭력이 나타났을 때, 그 폭력을 잠재우고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사람들은 "희생제사" 제도를 만들어 내었다,

 

이것을 "희생양 메커니즘"이라 부른다.

 

인류문명이 발전하며 발생되었던 갈등을 "희생양 메커니즘"으로 풀게되고, 그러함으로 사회 공동체가 폭력으로 깨지지 않고 어느정도 평화를 유지하며 발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이런 일들은 일어난다. 한 때 , 대한민국 중고딩을 휩쓸며 등골브레이크 라고 불리던 특정 제품의 옷이라든지, 몇 해전 온통 겨울을 뒤업었던 검은 색 롱패딩이 모방 욕방의 대표적인 예이다.

 

처음에는 한 두명이 입기 시작하였을 것이고, 그것이 서로 모방하게 되면서 이제는 안입는 사람이 없고, 입지 않으면 그 공동체에 적응하기 힘들게되는 현상이다. 모방 욕망 때문에 내가 갖지 못하였다는 갈등이 생기게 되고, 갈등이 극대화 되면 폭력으로 나타나 갖은 자의 것을 힘으로 빼앗게 된다. 법이라는 울타리가 통용되지 못한 과거 원시사회는 더 그러했을 것이다. 힘 있는 자가 곧 법이요, 폭력이 강자가 된다.

 

이러한 상태를 르네 지라르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 불렀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원시 사회에서 이런 사회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희생양"을 찾게 된 것이다. 갈등이 심화되어 폭력이 나타났을 때, 그 폭력을 잠재우기 위해서 힘없고 능력 없는 어느 한 대상을 지목하게 되고, 그 공동체는 그 "희생양"에게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씌운다. 모든 죄를 다 뒤집어 쓴 "희생양"이 신에게 인신제사의 제물이 됨으로 그 사회에 나타났던 갈등과 폭력적 현상이 일시적으로 잠잠해 진다. 그 사회는 일정기간 갈등을 해소한 평화의 상태를 이룬다, 

 

희생양메커니즘이 공동체 내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 이 평화의 상태가 되면, 그 공동체는 희생양에 대해서 낭만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그 희생양을 신격화 한다. 르네 지라르는 거의 모든 신화에서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있음을 말한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기독교와 연관시킨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의 속국으로 지배를 받으며 갈등과 긴장 상태에 놓여져 있었다. 유대가 모방하는 나라는 막강한 힘을 가진 로마제국이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시온 언약으로 맺어진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며 다윗과 같은 힘 있는 왕이 등장하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그러나 모방 욕망이 큰 만큼,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갈등과 긴장의 상태가 극에 달하였고, 그들에게는 갈등을 해소를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로마제국과 같이 막강한 힘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모든 죄와 잘못, 유대 공동체에 나타는 모든 갈등과 폭력의 죄를 짊어 지고 죽을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 "희생양"을 예수그리스도로 삼았다,

 

결국 예수그리스도는 빌라도 아래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고, 불과 얼마전 예수를 향해 열광하던 수 많은 군중들은 돌변하여 예수를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되었다. 사회적 갈등이 폭력적 양상으로 나타나고, 폭력이 모방되어 극에 달한 것이다. 그들은 공동체의 긴장감을 예수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죄를 찾지 못하겠다고 말을 할지라도, 군중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할 뿐이다. 빌라도 또한 예수님을 "희생양" 삼이 이 폭력적인 상황을 잠재워야만 했다. 실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자, 잠시 동안 그곳에 평화가 찾아오는 듯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희생양"이 되신 것과, 다른 신화들에서의 "희생양"의 모습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 결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것으로 나타난다. 

 

신화는 항상 승자에 의해서 기록된다. 르네 지라르는 가해자의 기록이라고 표현하였다. 신화는 항상 승자의 편에서 기록된 가해자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미화한다. 그리스신화를 보면, 희생양은 죽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었고, 죽어도 마땅한 것으로 그려졌으며, 그를 죽이는 사람들은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로 여겨졌다.

 

그런데 성경은 정반대이다. 성경의 기록은 가해자의 기록이 아닌, 피해자의 기록이다. 즉 가해자들을 미화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이 악함을, 그들의 죄악을 드러낸다. 그리고 희생양으로 죽은 예수그리스도는 아무런 죄가 없다고 계속하여 말한다. 이것이 신화와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다. 

 

베드로는 성령강림 이후 모여든 사람들을 향하여서 이렇게 외친다. 

사도행전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희생양이 아닌 너희 대중이 악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한 너희들이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희생양으로 죽은 예수그리스도는 아무런 죄가 없음을 선포한다.

 

성경의 "희생양"을 연구하던 르네 지라르가 발견한 것은 인간 사회 역사 속에 끊임 없던 모방의 욕망, 모방의 욕망으로 나타난 갈등과 폭력을 상대로 이렇게 저항했던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근본적으로 모방의 욕망이 있기 때문에, 모방 심리로 인해, 군중속에 갖혀 있을 때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한다. 역사상 있어왔던 "희생양 메커니즘"을 예수그리스도에게 적용하면, 모든 죄는 예수에게 있고, 가해자였던 대제사장이나 바리세인들이 죄가 없다고 해야 맞는데, 오히려 성경은 반대로 예수는 죄가 없고 예수를 죽인 사람이 죄인임을 고발한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역사상 유일하게 집단 폭력이 악함을 고발하고 있다. 인류학적인 맥락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특별한 상황이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가해자를 미화시키기 마련인데, 오직 성경만은 그 집단적 폭력이 악하다고 고발하고 있다. 르네 지라르는 이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표현한다. 위로부터 오는 계시가 없었다면, 인간 스스로는 결코 자신들의 악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정당화 하던 집단적 이기주의와, 집단적 폭력을 깨뜨린 것이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그래서 르네 지라르는 결론적으로 성경은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이라고 말한다. 성경은 사실을 기록한  진리라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며 고백한다. 르네 지라르는 우리에게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다. 예수께서 희생양이 되심으로 더 이상의 폭력을 미화시키고 정당화 시키는 것을 막으셨던 것처럼,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 만이, 결국 인간 사회의 모든 갈등과 긴장을 영원히 벗어 날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리 주변에는 모방의 대상들이 많다. 우리는 아무런 여과 없이 실시간으로 지구촌의 모습들을 모방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수 많은 모방의 욕망, 모방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와 갈등 또는 무력감, 이러한 갈등 때문에 생겨나는 폭력적인 상황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노출되어 있는 갈등과 폭력적인 상황들을 쉽게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풀 수 있는 "희생양"을 찾는다. 소비를 통해서, 익명으로 쓰게되는 악성 댓글을 통해서, 남을 비난하고 헐뜯는 것을 통해서, 한 사람을 왕따 시키는 집단적인 폭력을 통해서, 갈등 해결의 희생양을 찾아 욕망을 배출한다. 희생양을 통해 잠시 얻게되는 거짓 평안을 찾는다. 그러나 자신은 평안함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 거짓 평안은 오래가지 못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근본 욕구 중에, 누군가를 모방하는 욕망이 있기 마련인데, 이 욕망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계속해서 잠시 잠깐의 거짓 평안을 만들어내는 "희생양"을 찾으며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잠시 잠깐의 거짓 평안이 아닌 영원한 참된 평안을 추구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를 모방하여,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서로 적대시하는 모방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비로소 참된 평안이 찾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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