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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하다

구원의 순서(구원의 서정)

이참리 2020. 5. 25.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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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서정

 

루터파 신학자인 프란츠 부테우스(Franz Buddeus)와 야콥 카르포프(Jacob Carpov)는 18세기 전반에 "구원의 순서(ordo salutis)"라는 말을 처음 만들어 냈다.

 

1.  로마 가톨릭 신학에서는 보통 구원의 순서를 은혜가 교회의 성사(성례)를 통해 매게된다는 관점으로 표현한다.
(영세 성사 - 견진성사 - 성체 성사 - 고해 성사 - 종부 성사)

 

2.  루터파 신학에서는 은혜의 순서를 인위적인 단계 구분 없이 성령의 복합적인 은혜의 사역으로 정의하고 구분하려는 개념이다.
(부르심 또는 소명 - 조명 - 회심 또는 회개 - 거듭남 - 칭의 - 신비로운 연합 - 새로워짐 또는 성화 - 보존)

 

3. 아르미니우스 주의

  (보편적, 외적 부르심 - 회개와 믿음 - 칭의 - 성화(그리스도인의 완전) - 견인)(배교의 가능성,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거룩함과 삶의 일관성을 추구해야 할 동기가 된다)

 

4. 개혁파 신학은 구원의 모든 측면이 은혜 언약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가운데 발생하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부르심 - 거듭남 - 믿음 - 회개 - 칭의 - 성화- 보존과 견인 - 영화)

 

5. 개혁주의 전통의 복음주의자들

  (택하심 - 효력있는 부르심 - 복음에 대한 믿음 - 회개 -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 거듭남 - 그리스도와의 연합 - 칭의 - 성화 - 보존과 견인 - 영화)

 

- 개신교 내의 각 전통에 따라 용어의 정의와 표현의 다각적인 면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아래 사진은 칼빈과 호크마의 구원의 서정이다. 특징은 구원의 순서를 일직선상에 놓지 않고 다각형 속에서 이해하였다는 것이다. 

 

 

 

 

후크마 : “구원의 순서”라는 말 자체를 버리고 구원의 다양한 국면으로 말하면서 동시성을 강조한다. 구원의 과정을 오각형으로 그리면서 중생은 새생명을 얻는 면, 회심은 새로운 방향 으로 돌이키는 것, 즉 믿음과 회개, 칭의는 새로운 신분이며 성화는 점진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이고 견인은 지속적인 새로움으로 표현한다. 동시 다발적이라고 설명한다.

 

 

 

기독교 강요 3권 1-18장 / 벌코프 조직신학 구원론 부분 참조

 

a.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1. 그리스도와의 연합함이 없이는 그가 이루어 놓은 모든 구속사역이 우리에게 무익하다. 우리는 성령의 신비스러운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unio)가 되는데,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또한 우리에게 성령을 주어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신다. 성령을 그리스도와 연결시켜주는 띠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령은 "아버지의 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들의 영"이기 때문이다(롬9:8). 또한 그는 생명의 영이시며(롬8:11) 살려주는 영이시다(고전 15:45). "성령의 교통함"이 없으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볼 수 없다(고후13:13).

 

2. 또한 성령의 하시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 우리를 복음의 광명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요1:12-13).

 

3. 완전한 구원이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된다고 할 때, 우리가 그 구원에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첫째로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며, 둘째, 그의 복음을 믿는 신앙의 빛으로 인도하시며, 셋째, 우리를 거듭나데 하셔서 새 피조물이 되게 하시며, 마지막으로 우리에게서 더러운 죄를 씻어 버려 깨끗케 된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성별하신다.

 

B. 믿음

 

1. 믿음은 한 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리스도 없이는 그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그에게로 갈 수도 없으므로 그리스도가 그 믿음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또한 성령께서 낳게 하시는 것이므로, 진정한 믿음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관계되어 있다.

 

2.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믿음과 밀씀은 태양과 광선처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말씀을 제거하면 믿음은 조금도 남지 않는다. 믿음이 배태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심는 사람의 봉사가 필요한데 그것은 교회의 본질과도 같아.

 

3. 믿음의 정의 : 믿음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굳고도 확실한 지식을 의미하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에 기초하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꼐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 - 기독교 강요 III.2.7 “divinae erga nos benevolentiae firmam certamque cognitionem, quae gratuitae in Christo promissionis veritate fundata, per spiritum sactum et revelatur mentibus nostris et cordibus obsignatur.”

 

4. 믿음은 일종의 지식이나 감각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고상하고 확실한 지식이다. 그리하여 이해 (Comprehension)라기 보다는 확신 (assurance)이다. 그것은 합리 적인 논증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진리성에 의해 더욱더 강화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은혜를 값없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의미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은 지 식으로 정의되어 있으나 결코 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인적인 신뢰(trust)이다.

 

5.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전체를 믿는 것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자 비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바로 첫째로 값없이 주는 약속에 도달하기까지 믿음이 견고하게 설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결하지 않으면 믿음은 우리와 하나님을 전혀 화해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6. 그러므로 복음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고 그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 는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된다.

 

C. 회개와 중생

 

1.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는 여러 가지 결과 중에 회개가 그 첫 번째인데, 우리는 믿 음을 통해서 회개에 이르게 되고 죄 용서가 따른다. 칼빈은 회개와 죄 용서는 복음의 전체라 고 보았으며 그와 상응하는 짝으로 중생과 화해를 들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회개와 죄용 서는 믿음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닌 것을 강조하며, 이와 같은 순서는 시간적인 순서가 아닌 논리적으로 그러하다. 즉 자기가 하나님 것임을 알지 못하면 사람은 진심으로 회개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는 자기가 하나님의 것임을 참으로 믿을 수 가 없기 때문이다.

 

2. 회개의 말뜻은 우리가 우리자신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향하며, 우리의 이전의 마음을 벗어 버리고 새 마음을 입는다는 것이다. 즉 그 정의는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 쪽으로 전향하는 일 이며, 그를 순수하게 또 진지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기는 전향이다. 회개의 요소는 옛사람 을 죽이는 것과 성령에 의한 삶으로써 성립된다.

 

3. 우리가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것 (convertio ad Deum)은 우리의 혼 자체가 변화를 받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참된 두려움에 의하여 야기된다. 참된 두려움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 할 때 생기는 두려움으로 우리의 죄를 회개케 한다. 이러한 회개의 두 요소는 우리 안에 있는 육을 죽이고 (mortificatio carnis) 영을 살리는 것 (vivificatio spiritus)이다. 육을 죽이는 것은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자기 부인이 없으면 새로운 자아로 태어날 수 없다. 영을 살리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감정으로 그의 거룩 함에 깊이 잠기는 것을 의미하며, 의와 공의와 자비를 향한 마음을 가지게 되어 그와 같은 열 매를 맺게 되는 것을 말한다.

 

4. 이와 같은 이유로 회개는 곧 중생(regeneration)이며,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회개의 목적이 된다. 중생의 영의 사역으로(the Spirit of regeneration) 새로운 생명으로 태 어난다는 것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 즉 엡 4:23ᅳ24의 말씀과 골 3:10절의 말씀과 같이 잃었던,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하는 것이다. 이는 아담 때문에 잃었던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의 은혜 로 얻은 중생에 의해서 회복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5. 즉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값없는 의를 전가 받게 된다. 이것은 칭의라고 하는데 칼빈은 죄 용서라고 표현한다. 회개에는 죄 용서가 뒤 따른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믿음의 결과이나 구분 되어야 한다.(III, iii, 19)

 

D. 칭의

 

1. 중생 , 회개 , 성화 <=> 칭 의, 죄용서, 화해는 각각 상응하는 개념들임.

 

2. 칭의 :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 또한 죄를 용 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 하는 것이다. 즉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용 납이며(reception—acceptance) 죄의 용서(forgiveness of sins)다. 롬 3:24; 4:6一7; 시 32:1-2. 고후5: 18-21- “화해됨”과 “의로 인정 됨”이 같은 뜻이라고 봄.

 

3. 칭의는 중보자가 하시는 일로서 중생한 사람의 행위라 할지라도 칭의를 얻을 수가 없음.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그의 몸에 접붙임을 통해 그의 의를 나눠가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와 같은 이유로 복음에 약 속된 의는 “믿음의 의”(righteousness by faith)이며 이런 의는 자기의 의와 행위의 의또는 율법의 의와는 다른 것이다. 율법의 약속— 행위를 조건으로 삼음. 복음의 약속—값없이 줌. 아무도 율법으로는 의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 (롬 1:17; 롬 3:20-22; 10: 3- 10).

 

4. 그러므로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의미하며 이 화해는 곧 죄의 용서를 내포한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고 원수 되게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과의 화해는 이 죄 용서함 을 내포한다. 고후 5:19-21; 롬 4:6-8; 시 32:1-2

 

E. 성화

 

1.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면 우리에게 그의 의가 전가될 뿐만이 아니라 그 의 거룩함도 우리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전 1:30)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뿐 아니라 거룩하다고 일컫는다. (성도) 이런 의와 거룩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즉 칭의와 성화는 개념적으로 구분되나 실제적으로는 하나로 온다. “이중 은혜 (duplex gratia): 칭의의 은혜와 성화의 은혜”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한 은혜의 두 측면이다.

 

2. 성도의 칭의와 성화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은혜이고 그것은 믿음을 통해 받게 되기 때문에 믿음은 수단이다. 그러므로 참다운 믿음을 가지게 되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어 회개하고 거듭나서 죄사함을 받게 되고 거룩하게 되어 선행의 열매를 맺게 된다.

 

3. 벌코프는 성화를 “칭의 받은 죄인을 죄의 부패로부터 해방하고 그의 본성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며 그가 선행을 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자비롭고 지속적인 사역” 이라고 정 의한다. 그리하여 성화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이며 인간전체의 변화를 의미하며 옛사람의 죽임과 새사람의 소생을 내포한다. 여기서 칼빈은 성화를 중생과 회개와 구분하지 않고 있다.

 

4. 칼빈은 선행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행임을 강조하고 믿음이 없이는 선행 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모든 선행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마치 우리 의 것으로 여겨서 우리에게 상주시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5. 벌코프를 비롯한 많은 개혁 주의 신학자들은 이 세상에서의 완전한 성화는 불가능하다고 보는데 반해 많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완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를 가르친다. 특히 웨슬레는 3단계의 성화를 가르치며 이는 중생의 단계, 완전성화의 단계, 죽음이후에 오는 최종적 온전함의 단계인데 완전 성화의 단계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단계로서 중생체험 이후 의 특별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보다 더 성숙한 단계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두 번째 성령의 역사라고 했다.(the second blessing) 그러나 여기서의 완전은 이 세상에서의 불 완전, 실수 등을 포함한 것으로, 단지 의도적인 죄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한다. 여기서 웨슬리 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율법의 기준에 못 미치는 상태나 행동” 이라는 죄의 개념 대신 “자신 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자발적인 불순종” 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약화된 죄 개념임 을 알 수 있다. 또한 완전주의자들은 중생과 성화를 분리시킬 뿐만 아니라 칭의와도 분리시켰 다. 완전주의자 : 마 5:48; 엡 4:13; 살전 5:23; 히 13:20-21 / 불완전주의자 : 요일 1:8一10; 롬 7;7-26; 갈 5:16-24; 빌 3:10-14.

 

6. 존 머레이는 성화의 두 가지 속성을 구분하여 결정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우리들이 죄에 대해 죽고 새로운 의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우리에게 단번에 일어나는 일회적 사건으로서, 이를 “결정적 성화(definite sanctification)”라고 부르고 이러한 결정적 성화는 점진적 성화의 근거가 된다. 로마서 6장 1-11절 ; 벧전 2:24, 4:1, 2; 요일 3:6, 9, 5:18 등에 의거하여 결정적 성화는 더 이상 죄가 지배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죄와의 단절을 말한다. 이와 같은 죄의 통치에서 벗어나며 죄 와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은 죄가 완전히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죄가 더 이상 그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의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점진적 성화는 이와 같이 의의 병기로 자신을 계속적으로 드리는 것을 말 하고, 남아있는 죄의 세력 들을 물리치는 것을 의미한다.

 

6.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시작되는 데 그에 따르는 모든 유익들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회개와 중생을 통해서 죄 에 대해 죽고 새로 태어난 새 생명은 결정적 성화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후에 계 속적인 죄와의 싸움과 우리 안에 있는 이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점진적 성화는 회개로 점철되 는 그리스도의 이생에서의 삶의 특성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 . “simul justus et peccatur.”

 

F. 영화 (glorification)

 

1. 영화는 죽음이후에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부활의 육체를 입을 때 일어나는 단계로 구 원의 최종완성의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고전 15:51-54; 롬 8:23; 빌 3:21 영화는 하나님의 백 성들이 그들의 혼과 육체를 포함한 인격 전체가 영광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할 때를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한 순간에 일어남.

 

2. 영화는 신자들에게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의 완전한 회복을 의미한다. 롬 8: 21-23; 벧후 3:12一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개인뿐만 아니라 우주전체의 구원을 의미 한다.

 

3. 결국 구원은 이 종말에 대한 소망을 굳게 붙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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