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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이참리 2020. 5. 16.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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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
국내도서
저자 : 이상웅
출판 : 부흥과개혁사 2009.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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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영국의 존 웨슬리는 에드워즈의 칼빈주의 신학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에드워즈를 가리켜서 "그 선하고 현명한 사람... 그 위대한 사람"이라고 평가했고, 칼빈주의 감리교도인 조지 휫필드도 "에드워지씨는 견고하고, 탁월한 그리스도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뉴잉글랱드 지역에서 그에 필적할 만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에드워즈는 비록 회중교회 목사였지만 미국 장로교회 목사들과 신학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가졌을 뿐 아니라 부흥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뉴라이트의 편에 서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중요성을 확인 할 수 있는 또 다른 지표는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그의 저술과 사상을 연구하여 왔다는 점이다. 민케마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설교(12편), 부흥과 대각성(13편), 선교학(5편), 윤리학, 미학(20편), 문학, 문화비평(36편), 철학, 심리학(57편), 역사, 전기(64편),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학에 대해 쓰여진 박사논문이 총 82편이다. 에드워즈는 단순히 신학을 넘어서 인문학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 사상 가운데 학자들의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은 주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에드워즈의 신론, 성경관, 교회론 그리고 칭의론, 언약 사상, 성화관, 종말론, 중생론, 체험의 신학, 설교론 등에 대해 많은 연구 문헌들이 산출되었고, 그의 성령론에 대해서도 학자들이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은 기정 사실이다.

본서는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을 체계적으로 깊이 연구하여 조직적으로 진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에드워즈 성령론의 역사적 배경

 

개인적인 배경

  조나단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에 코네테컷 주 이스트 윈저의 목사관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티모시 목사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1694년에 이스터 윈저의 회중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무려 61년 동안이나 목회를 한 사람이었다. 어머니 에스더 스토다드 에드워즈는 노샘프턴 교회의 목회자 솔로몬 스토다드의 4남 5녀 중 차녀였다. 에스더는 신학적 책들에 대해서 논평을 할 정도로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다. 티모시 에드워즈와 에스더 스토다드 사이에 딸 열 명과 아들(조나단 에드워즈) 한 명, 총 열한 명의 자녀들이 출생하였다. 에드워즈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의 뉴잉글랜드의 신앙 상태는 필그림 부조들이나 첫 목회자들(토머스 후커, 토머스 셰퍼드, 존 카일, 제임스 데븐포트 등)의 열정적인 신앙을 떠나 쇠락하고 있었다.

  “산 위의 도시” 라는 신정론적 이상을 가졌던 필그임 부조들의 이상은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이르러 여러 가지 요인들 때문에 무너지고 쇠락하였다. 1691년 이후 정부와 교회의 결속력이 느슨해졌고, 성만찬 참여에 대한 자격 요건도 중도 언약과 스토다드주의에 의해 점점 더 개방적이 되어 갔다. 하나님의 주권보다는 인간의 능력을 신봉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가 확산되고 있었고, 근대 자연 과학이나 존 로크 등의 경험론 역시 신세계의 지성인들과 목회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조나단 에드워즈가 칼빈주의적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의 대변자로 평생을 헌신할 수 있었던 데는 어린 시절 그를 양육했던 부모님의 공이 아주 컸다.

  어린 시절 에드워즈는 홈스쿨링을 통하여 대학 예비 과정을 다 이수하였다. 에드워즈는 아버지의 특별한 교육을 통해 일찍이 라틴어를 배우고 익혔기 때문에 후일에 예일대에 입학하여 라틴어로 글을 쓰고 말을 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티모시 에드워즈는 “엄격한 칼빈주의자”였다. 당시 목사관은 젊은 목사 후보생들의 실습장으로 쓰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에드워즈는 신학적이며, 목회적인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었다. 에드워즈는 이런 아버지의 목회 현장 속에서 종교적인 체험을 일찍부터 경험하게 되었다. 에드워즈가 쓴 「자서전」에서 “회심 전에도 내게는 두 번의 주목할 만한 신앙 각성의 시기”가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게 된다.

 

회심 체험과 계속되는 거룩에의 추구

  에드워즈는 1716년 9월 13세의 이른 나이에 예일대에 입학하게 된다. 에드워즈는 1720년 가을부터 예일대에서 석사 과정(M.A)을 시작하였다. 에드워즈가 회심 체험을 하게 된 것은 그가 예일대에서 석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던 1721년 봄에 일어난 일이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체험한 것이 단지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정”이었으며, “영적인 어떤 것 혹은 구원적 본성을 가진 어떤 것”이었다고 진술한다. 여름 방학이 되어 이스트 윈저로 돌아온 에드워즈는 아버지와 더불어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조나단은 이 대화를 통해 감동을 받았고, 혼자 들판을 거닐며 묵상하는 동안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또 다시 하게 된다. 에드워즈는 놀라운 회심 체험으로 만족하지 않고 “영혼의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더 나은 거룩함을 추구”해 나갔다. 에드워즈는 1722년 5월에 석사학위를 받고,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뉴옥에 있는 장로교회의 목사로 6개월 섬기게 되는데, 이 기간 에드워즈는 존 스미스와 그의 경건한 어머니가 사는 집에 거주하면서 영적으로 풍성한 삶과 성도의 교제를 만끽하게 된다.

 

경건 훈련을 통한 성장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린 시절부터 성경을 읽고, 성경에 대한 청교도적인 설교를 듣고 자라고, 성경의 교리들을 체계화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면서 자랐다. 에드워즈는 말씀의 연구와 묵상을 통해 영적인 양식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온전한 그리스도인,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목표를 추구해 나갔다.

  에드워즈의 열정적인 기도의 삶은 경건한 삶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훗날 목회를 할 때에도 에드워즈는 일어나자마자 기도로 시작하고, 아침 식사 전과 저녁에 가족과 함께 기도회를 가졌다. 또한 에드워즈는 금식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에드워즈는 전투, 전염병, 부흥 등 다양한 상황 속에서 전 교인 금식을 언급하거나 요청했다. 에드워즈는 1차 대각성 기간에 쓴 「균형 잡힌 부흥론」 속에서 목회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려면 개인적인 은밀한 기도와 금식에 힘쓸 뿐 아니라 함께 모여 기도하고 금식하는 일에도 힘을 써야 한다고 동료 목회자들에게 권면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성 훈련에 있어서 중요한 요수들 중에 빠트릴 수 없는 것은 공부와 글쓰기이다. 에드워즈는 노샘프턴 목회 기간에 하루 평균 열세 시간을 서재에 머물렀다고 홉킨스는 전해 준다. 개인 경건의 시간을 가지는 것, 설교 준비와 독서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이 그의 일과를 구성했다. 에드워즈는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뉴잉글랜드 신학자들의 글들과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의 저작들을 읽으며 청교도 신학과 경건을 배웠다. 그리고 예일대에 진학한 후에는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되어 있는 윌리엄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를 암기할 정도로 부지런히 읽으면서 청교도 신학과 윤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익혔다. 그리고 에드워즈가 개혁주의 신학과 교과서로 평생 동안 사용하면서 그 중요성에 대해 높이 평가했던 것은 네덜란드 신학자였던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신학」과 스위스 제네바의 신학자 프랑수아 투레티누스의 「논쟁 신학 강요」였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실천적이고 체험적인 성격을 지닌 청교도 저작들을 많이 읽었다. 그의 초기 일기 가운데는 토머스 맨턴의 「시편 119편 강해」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그의 대작 「신앙감정론」에서는 존 오웬, 리처드 십스, 존 플레이블, 존 프레스턴, 윌리엄 퍼킨스, 앤서니 버제스, 토머스 셰퍼드 등의 청교도 저서들로부터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드워즈가 평생 동안 사용했던 대표적인 주석적 전통은 매튜 풀의 다섯 권짜리 「다양한 성경 해석의 공간」, 매튜 헨리의 여섯 권짜리 「신구약 해설」, 그리고 필립 다드릿지의 여섯 권짜리 「가정용 해설서」 등이었다.

  에드워즈는 이와 같은 청교도적이고 성경적인 책들을 읽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유럽과 영국 지성 사회를 풍미하고 있던 여러 계몽주의 혹은 이신론적인 서적들도 즐겨 읽었다. 청년 에드워즈는 이런 저술서들을 읽으면서 자신이 물려받은 정통적 기독교 신앙 사이에서 적지 않게 갈등을 느낀 것 같다.

 

목회 현장에서의 체험

  조나단 에드워즈가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하게 딘 것은 1726년 8월 29일에 노샘프턴 교회 부목사로 청빙을 받아, 1727년 2월 15일 부임하면서부터다. 에드워즈는 연로한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 목사를 보조하는 부목사로 부임하여, 1729년 2월 11일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노샘프턴 교회 3대 담임목사로 시무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에드워즈의 목회는 두 차례에 걸친 부흥의 체험, 새로운 예배당의 신축, 저작가와 설교자로서의 명성, 열한 명의 자녀들로 구성된 유복한 가정생활 등 다양한 결실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만찬 참여 자격 논쟁과 그 결과로 1750년 6월 22일에 열린 공동회의에서 목사시무 사면을 당하기 까지 만 23년 동안 지속된다.

 

코네티컷 강 유역 계곡의 부흥(1734~1735)

  에드워즈가 노샘프턴 교회의 목회자로 시무하면서 처음으로 체험하게 된 부흥 역사는 1734년에 시작되어 1735년에 이르기까지 노샘프턴 교회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던 성령의 놀라운 역사로서 이 성령의 역사는 불타고 있는 벌판의 불길처럼 코네팀컷 강 계곡에 소재한 마을들로 번져 나갔다.

  1734년에서 1735년에 걸쳐 진행된 노샘프턴 부흥 기간 에드워즈는 반 아르미니우스주의적인 설교를 강단에서 선포하였다. 특히 목요 강좌에서 전한 “이신칭의론”과 같은 설교를 읽어보면 부흥의 역사의 도구가 되기에는 너무나 교리적이면서 논증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이신칭의 강론이 오히려 영적 각성에 도화선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 외에도 “하나님 나라에로 침노해 들어감”, “룻의 결단”, “죄인들의 정죄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등을 주제로 하여 설교하였다. 이와 같은 노샘프턴 사람들의 영적인 각성의 소식은 뉴햄프셔 카운티 안에 있는 다른 마을들과 코네티컷 주에 있는 많은 마을로 전해졌다. 에드워즈는 부흥의 역사에 나타나는 비범성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하였다. 첫째, 부흥의 역사는 보편성에 있어 아주 뛰어났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쳤다. 둘째, 구원의 확신을 얻은 자들의 수에 있어서 예사롭지 않았다. 이일 후 교회 성찬에 참여하는 수는 620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는 노샘프턴 마을의 성인을 거의 망라하는 숫자였다. 에드워즈는 반년 동안 약 300명이 그리스도께 나아왔다고 보고한다. 셋째, 하나님의 역사는 그 속도에 있어 아주 뛰어났다. 넷째, 성령의 영향의 정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즉, 각성의 깨달음, 체험의 정도와 범위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1차 대각성 운동(1740~1742) 중의 노샘프턴 부흥

  1734~1735년 부흥의 역사가 끝났지만 에드워즈는 변함없이 강렬한 열정으로 새로운 성령의 부어주심을 사모하면서 목회를 해 나갔다. 그리고 1730년대 후반 내내 에드워즈는 부흥의 때의 열렬함과 현재의 무감각함을 비교하며 교인들을 책망하는 설교를 전했다. 에드워즈는 고전 13장의 연속 강해를 통해 감정이 아니라 지속적인 열매가 성령의 역사의 진정성을 증명하며, 성령의 내주는 거역할 수 없는 사랑의 능력이며, 부정적인 자아의 죽음보다는 적극적인 열매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

  1740년부터 1742년에 이르기 까지 성령의 부어 주심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는 교회사 가운데 “1차 대각성 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성령의 역사이다. 1차 대각성 운동은 규모면에서 식민지 전체에 영향을 미친 광범위한 부흥 운동이었으며 특히 뉴잉글랜드 지역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차 대각성 운동의 중심 인물은 영국에서 온 순회 설교자 조지 휫필드 목사였다. 휫필드는 총 7차에 걸쳐 미 식민지를 방문했는데, 1차 대각성 운동은 그의 2차 방문 기간 중에 일어났다. 휫필드는 1740년 10월 7일부터 4일 동안 노샘프턴에 방문하였다. 휫필드가 머무는 동안 노샘프턴은 옛날 1734~1735년 때의 부흥과 같은 은혜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1741년 8월과 9월은 가장 주목할 만한 시기였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죄를 깨닫고 회심했으며,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크게 부흥되고 소생하고 위로를 얻었으며, 이런 일들이 외부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외침, 기절, 경련 같은 일들이 가득 차는 것은 흔한 일이 되었다. 에드워즈는 이 여름 동안 특별히 어린이들에 대한 성령의 부으심이 괄목할 만했다고 말한다.

  1742년 2월에 새뮤얼 부얼이 노샘프턴을 방문하여 출타한 에드워즈를 대신하여 강단 사역을 하면서 다시금 강하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일종의 황홀경에 빠지는 이들이 생겨났고, 하늘에 올라가 영광스럽고 즐거운 것을 보는 것 같은 채험을 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에드워즈는 이 지경에 이르자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 사람들이 열광주의로 넘어가지 안도록 많은 주의와 수고를 쏟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진정한 부흥의 변호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1741년 9월 10일 예일대 졸업식에 설교자로 참석하여 “성령의 역사의 구별되는 표지”를 설교하였다. 에드워즈는 요한일서 4장 1절을 본문으로 삼고 열광주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에드워즈는 이 설교에서 부흥 시 발생하는 강력한 체험, 특히 부흥에 대한 열광주의적인 극단으로 인해 초래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보고 부흥 자체까지 반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밝혔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증거를 살펴볼 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참된 부흥임을 강조했다.

  뉴잉글랜드 부흥이 진행되어 가면서 특히 부흥에 대한 양극단으로 치닫는 현상이 가속화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한 쪽은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부흥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다른 극단에는 부흥 체험을 너무 열광적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양극단에 속한 사람들이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고 결국은 퇴조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였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 현재의 신앙 부흥에 대한 소고」를 저술하여 1743년 3월경에 책으로 발간하였다. 에드워즈의 책은 전체 5부로 구성되어 있다. 부흥 반대주의자와 부흥 광신주의의 양극단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균형 잡힌 부흥론을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먼저 1~3부는 부흥 반대주의에 대한 답변이고 4부는 부흥 광신주의, 즉 열강주의에 대한 반박이다. 마지막으로 5부는 참된 부흥을 유지하기 위한 권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드워즈는 현장에서 체험과 성경과 신학 연구를 바탕으로 마침내 결정적인 저술을 1746년에 내놓게 되는데, 「의지의 자유」, 「원죄론」 등과 더불어 3대 주요 저서라고 일컬어지는 「신앙감정론」이 바로 그 책이다. 「신앙감정론」은 1742~1743년 어간에 노샘프턴 교회에서 전한 연속 강해 원고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는 명제를 교리로 제시한 후에 신앙에 있어 감정이 차지하는 위치와 중요성에 대해 논증한다. 그리고 나서 에드워즈는 신앙 감정이 진정으로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 열두 가지를 논하고(2부), 진정으로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을 뚜렷이 구별해 주는 표지 열두 가지를 제시한다. 에드워즈는 외적인 진기한 체험이나 몸의 영향보다는 본성의 변화, 새로운 감각,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 등을 중시하고,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열매를 중시하였다.

 

교회 개혁

  에드워즈의 노샘프턴에서 목회 사역은 두 차례에 걸친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양적 성장을 가져왔다. 노샘프턴에 거주하는 성인 인구가 거의 대부분 교회에 출석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노샘프턴 교회 회중은 1750년 6월 22일에 열린 공동의회를 통해 230대 23표라는 표결로 자신들의 목회자 시무 사면을 결정하게 되었다. 에드워즈가 노샘프턴 교회에서 축출당하게 된 과정은 단시간 내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1744년에서 1750년에 이르는 수년의 기간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비극적인 결말을 낳게 한 것도 단순히 성만찬 참여 자격 논쟁만이 아니었다. 드와이트는 이 사건의 원인으로 1744년에 일어난 “젊은이 성경” 사건과 성만찬 참여 자격 논쟁 문제를 거론하여 설명한다. 이 두가지 문제에 곁들여서 사례비 인상 문제를 또 다른 주요한 요임으로 포함해야 한다.

  1744년에 일어난 “젊은이 성경” 사건이란 마을의 몇몇 남자 청년들이 여성 해부학 책자를 비밀리에 돌려보면서 음담패설을 즐기고 여자 청년들을 성적으로 희롱하는 말을 하다가 발각된 사건을 가리킨다.

  사례비 논쟁이란 당시 뉴잉글랜드에서 목회자와 회중 사이에 자주 일어났던 문제였다. 당시 교회는 목회자 사례비를 현금으로 지불하지 않고 상당부분 현물로 지급했다. 교인 개개인이 할당받은 부분을 목회자에게 직접 가져다주거나 아니면 목회자가 받으러 가야만 했다.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는가에 관련된 논쟁은 에드워즈의 해임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원래 영국의 청교도들은 성찬 참여 자격으로서 믿음과 회개의 증거를 요구했을 뿐이지만, 뉴잉글랜드의 비분리적인 청교도들은 입교하여 완전한 교회 회원권을 가진 자들에게만 성만찬 참여 자격을 주었다. 완전한 교회 회원권을 받으려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교리를 고백하고, 생활에서는 경건의 열매를 맺어야 하고, 유효적인 소명의 본질에 대해 입증할 뿐 아니라 교리적, 영적, 실천적 자질을 나타내 보여야 했다. 그거서도 회중 앞에서 약 15분 동안 회심 체험을 증언해야만 했다. 성만찬에 참여 할 수 있는 자역을 가진 교인은 “가시적 성도” 이어야만 했다. 자신의 회심 체험을 전제 회중 앞에서 증언할 수 없는 사람은 교회 회원권을 얻을 수 없었고, 성찬에 참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자녀들이 유아 세례를 받는 것도 거절당했다.

  가시적 성도만이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초기 원칙은 노샘프턴 교회의 초대 목사인 엘르아자르 매더 목사가 목회할 때뿐 아니라 그의 후임자인 솔로몬 스토다드가 목회하는 32년 동안에는 변함없이 지켜진 원칙이었다. 그러다가 1704년에 이르러서 스토다드 목사는 성찬 참여 자격에 대한 변화된 입장을 공개화하게 된다. 스토다드는 외견적으로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찬 참여를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했다. 그는 성찬이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죄를 발견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의 필요성과 충족성을 배우는 한 방법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스토다드는 성찬은 회심의 규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앙 고백과 삶의 증거가 있는 자들에게 성만찬 참여자격을 부여하는 방식을 1748년에 실제적으로 노샘프턴 교회에 도입하고자 했다. 1748년 12월과 1749년 4월에 성만찬 참여 자격을 요청한 두 청년이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에드워즈가 제시한 신앙 고백의 방식을 따르기를 거절하고 만다. 이로써 성만찬 참여 자격논쟁이 노샘프턴 교회에서 본격적으로 불이 붙게 된다. 교회 위원회는 에드워즈가 요구하는 성만찬 자격 부여 기준을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1750년 6월 19일에 노샘프턴 교회 문제 해결을 위해 모인 마지막 지역 목회자 협의회에서 에드워즈의 해임안이 결정되었고, 3일 뒤에 열린 노샘프턴 교회 공동의회에서는 자신들의 목회자 해임여부를 놓고 투표한 끝에 내보내자는 쪽이 230표, 반대하는 쪽이 23표로 결국 에드워즈 목사의 해임안이 가결되고 만다.

 

스톡부리지의 선교사

  노샘프턴 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상실한 에드워즈는 스톡브리지의 인디언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한다. 에드워즈는 1750년 10월에 스톡브리지에서 첫 설교를 했고, 1751년 2월 22일 스톡브리지의 지역 교회 목사 겸 인디언 선교사로 청빙 받게 된다. 스톡브리지의 인디언 선교 사역은 에드워즈가 1758년 초 뉴저지 대학 학장으로 부임하기 까지 약 7년여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에드워즈는 스톡브리지에서 몇 권의 대작들을 산출하게 된다. 1752년 여름에 이르러 성만찬 참여자격론에 대한 「오해를 교정하고, 진리를 옹호함」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1754년 12월에는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반아르미니우스의 저작은 「의지의 자유」를 출간하게 되었고, 1755년에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 목적」과 「참된 덕의 본질」을 저술하였다. 또한 1757년 5월에 완성되어 1758년 그의 사후에 출간된 「원죄론」이 있다.

 

3 삼위일체론적 성령론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 - 자료와 간략한 연구사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이 담긴 자료

  에드워즈의 신학적 사유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신학묵상집」 속에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많은 묵상과 연구 결과들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론과 관련된 여러 성경 구절들에 대한 에드워즈의 묵상 혹은 연구 결과들도 그의 「성경 노트」나 「여백 성경」 등에 담겨 있고 온전한 형태로 출판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1730년대 중, 후반에 쓰기 시작한 “삼위일체론”이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정통성 시비와 연구사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이 출간된 것은 에드워즈의 출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1903년이었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 본문과 피셔 교수의 해설문 등을 통해 에드워즈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친화성을 밝혀지고, 그의 삼위일체론이 이단적인 것이 아니라 니케아 정통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 졌다. 그러나 구 프린스턴의 워필드교수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의 존재론적 증명을 아주 매력적이라고 하면서도 일종의 사민론적인 경향을 가졌다고 비평을 가하였다. 그런가하면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신학부에서 헤르만 바빙크의 지도 아래 에드워즈의 신학에 대한 연구로 1907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얀 리델보스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 속에 양태론적 경향이 있음을 비판하였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

  조나단 에드워즈에게는 기독교 신앙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계몽주의의 도전에 대하여 얼마든지 변증 가능하다고 하는 분명한 입장이 초기부터 있었다. 에드워즈의 입장을 정리해 보면 에드워즈는 삼위일체론의 신비를 다 파악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으며, 오직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해준 만큼”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성경적 토대 위에 굳게 서는 한편, 동시에 기독교인의 경험에서 나온 이성적 추론과 동시에 아름다움으로서 존재에 대한 관계론적 개념에서 삼위일체를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당대의 합리주의적 사조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론이 비합리적이라고 배척하는 이들에 대항하여 삼위일체론에 대한 신앙을 이성적으로 변증 가능하다고 보았다.

 

에드워즈의 새로운 실재 개념과 성향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이해

  조나단 에드워즈는 실체 개념에 대한 존 로크의 도전에 직면하여 전통적인 의미에서 실체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실재 개념을 만들어 냈다. 전통적으로 실체는 속성의 소유자로 이해되었으나, 에드워즈는 행동의 행위자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실재를 ‘성향’ 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향이나 경향성은 존재론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며, 법칙적으로, 원인적으로 작용하는 힘이기까지 하다. 실체들과 마찬가지로 경향성이나 성향도 영속적인 요소로서 기능하고, 하나의 실제의 성질을 가진다고 이해하였다. 또 역동적인 힘을 발휘하는 주체라고 보았다. 이처럼 실재를 본질적으로 성향적이라고 보는 것은 실재 자체를 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보는 것이며, 행동과 사건을 만드는 성향이라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에드워즈는 모든 존재가 어떤 실제적인 힘과 경향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또한 에드워즈는 존재란 비례적 균형, 곧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상현 교수가 정리하는 바에 따르면 “성향과 아름다움은 똑같은 실재를 바라보는 두 개의 방법이다. 성향은 아름다움의 역동적 측면을 나타내는 반면, ‘아름다움’은 성향이 나타내는 방식, 곧 방향을 말한다.” 또한 존재란 더 많은 관계와 행동을 향하는 경향이다. 존재는 본질적으로 반복되는 성향을 지니며 자기실현을 증대한다. 이 말은 존재가 실제적이며 동시에 자기실현적이고, 또 계속해서 자기를 나타내며 이로 말미암아 더 실존하고 아름답게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심과 풍성하심과 지혜와 의와 진리 등을 드러내고자하는 성향을 가지셨으며, 자기 자신을 밖으로 전달하려는 성향을 가지셨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주장이다. 바로 이러한 본성 때문에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신적 본질 안에서 복수의 위격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생각하였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이라는 성향을 가지신 존재인데, 이는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관계적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에드워즈는 아름다움이란 동의의 관계, 즉 비례와 조화의 관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수가 아니라면 관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본원적으로 복수이며 관계적이다는 것이 합당하게 도출되는 것이다. 하나님 존재 자체의 본성이 하나님 안에서의 내적 관계성과 복수성을 요청한다고 보았다. 1723년 말에 작성한 “정신”의 첫 항목에서 에드워즈는 탁월성에 대한 철학적 숙고로 시작하여 복수성이 없는 존재는 탁월성이 있을 수 없다고 추론해 낸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탁월하시다면 복수성을 가지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두 모형?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한 포우에 따르면 에드워즈는 두 종류의 삼위일체론적 모형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두 모형이란 하나님이 자신을 알고 사랑하는 정신과 유사하며, 또한 셋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혹은 가족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첫째 모형은 심리학적 모형이라고 불리며 간접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에드워즈는 “삼위일체론” 속에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심리적 모형을 활용하여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전개해 나간다. 에드워즈는 성부의 관념으로서 성자의 구별된 존재 또는 위격을 논증하고 나서, 사랑과 기쁨으로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의 3위격인 성령에 대해 논증해 나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해 나갔다. 에드워즈가 사용하는 두 번째 모형은 사회적 모델이다. 이 모형은 12세기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인 빅토르의 성 리처드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리처드에 따르면 어떤 인격의 완전성은 다른 인격을 사랑하는 데서 발견되기 때문에, 하나님도 인격적 존재들의 공동체 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고, 또한 둘 뿐이라면 서로 간에 누리는 행복의 기쁨을 소통하고 공유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사랑과 의지의 완벽한 일치로 연합된 세 인격적 존재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내재적 삼위일체

  조나단 에드워지는 성부 하나님을 “제일의, 기원이 없고, 가장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시는 신성”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리고 성부는 “존재의 제일, 무한한 탁월성을 가진 직접적인 실유이시다.”라고 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부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보편적이시고, 모든 것을 포괄하시는 실유이시기 때문에 최고로 탁월한 존재이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무한하게 동의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 전부터 자기 자신을 향휴하시고 무한히 행복하신 분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지식처럼 관념을 매개로한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의 관념과는 달리 하나님의 관념은 지식에 있어 완벽하고 완전하시기에 사물 그 자체라고 하는 것이 다르다. 즉,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가지시는 관념은 자신과 똑같은 본질, 똑같은 완전성, 똑같은 실체를 가진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숙고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실질적인 형상이 출생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직접적으로 존재하시는 신성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 자신에 대한 성부의 완벽한 관념으로 출생하신 신성이신 성자가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구절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사랑은 본질적이고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은 자기 사랑일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 될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똑같아야 하므로 삼위의 이위격이신 성자 외에는 그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는 상호적인 사랑이 존재한다. 이와 같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주고받는 상호적인 사랑이 다름 아니라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이다.”라는 것이 에드워즈의 주장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생자들에게 적용하시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성령 자신이 중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한다.

 

경륜적 삼위일체

  조나단 에드워즈는 내재적 삼위일체론뿐 아니라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제시하였다. 에드워즈는 창조 사역뿐 아니라 구속 사역에 있어 삼위 하나님이 동등하게 관여하셨다고 말한다. 성부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어 그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이신 외아들을 내어 주셨고, 성자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자신을 주셨다. 그리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시기에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시기 위해 오셨던 택자들을 향하여 흘러넘쳤다. 따라서 영광은 삼위 각위에게 다 돌아가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하였다.

 

성령의 신성과 위격성

  서구의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은 성령을 “사랑의 끈”이라고 칭함으로써 3위격을 추상화하고 비인격화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에드워즈도 역시 성령을 성부와 성자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라고 말한다든지, 아니면 성부와 성자 간의 연합의 끈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은혜론”에서 우리는 성령을 “구별된 위격적인 행위자”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에드워즈는 다른 위격들에게 신적 본질(또는 신적 속성)이 귀속되 듯이 성령께서도 귀속된다는 점을 주목한다. 다르게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나누어지지 않고 독립적인 신적 본질”을 가지셨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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