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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 박영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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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부 성령충만의 회복
1. 시들게 하는 성령의 사역
성경에서 성령은 자주 바람으로 비유되었을 뿐 아니라, 특별히 이사야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시들게 하는 바람으로 묘사되었다.(사40:4~7) 칼빈은 이 대목을 주해하며 “하나님게서 자기 백성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실 때 하나님을 대적해서 높아진 육신의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을 시들게 하고 쇠퇴케 한다”고 했다. 스펄젼은 이 말씀을 본문으로 ‘시들게 하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했다.
이사야가 말한 ‘육신을 시들게 하는 성령의 바람’은 교회가 이스라엘처럼 성령을 거스르는 육적인 삶의 방식에 안주할 때 세차게 휘몰아친다. 여기서 육신이란 부패한 성품의 총체, ‘거듭나지 않는 인성’을 의미한다. 육적인 사람은 거듭나지 않은 마음의 성향, 즉 세속적인 마음과 욕망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이가 아니라 성령에 속한 사람이며 더 이상 육적인 사람이 아니다. 다만 그가 변화된 실재와 본분대로 살지 않고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사람 ‘처럼’ 살고 있을 뿐이다. 바울의 관점에서 육적이라는 것은 우선적으로 마음의 근본적인 지향성, 추구, 애착, 끌림과 관련된다. 즉 그들의 마음이 성령의 육신의 양극 사이에서 갈등하며 분열되어 육신 쪽으로 더 강하게 이끌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이 마음이 둘로 나뉘면 대게 약한 영적 소욕은 더 강한 육적 소욕이 추구하는 바를 성취하는 방편으로 봉사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열심마저도 세속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 버린다.
성령은 비상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을 깨우치신다. 그의 비상한 섭리 가운데 고통스러운 사건과 환경을 조성하시고 그 고난의 풀무불 속에서 육신의 완고함이 부스러지고 녹아지게 하신다. 청교도 목사 리차드 십스가 말했듯 “성령은 외적 환란을 통하여 내적 빈곤, 즉 가난한 심령을 창조하신다.” 신자가 성령을 대적하는 육신을 따라 살면 성령은 무엇을 하시는가? 그럴 때에 성령은 우리를 떠나시는가? 신자는 성령 안에서 예수와 연합하였다. 성령이 신자 안에 영원히 떠나지 않고 내주하기에 이 연합은 한 순간이라도 깨어질 수 없는 영원한 연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은 신자 안에서 근심하며 탄식하고, 그 은혜는 소멸된다는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오웬은 이 보다 좀 더 적극적인 이해를 제안한다. 그는 신자가 육신을 따라 살 때 성령은 점점 팽배해지는 옛 자아의 세력과 그를 통해 더욱 맹렬해지는 죄와 사탄의 공력으로부터 영혼을 보존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시며 엄청난 영적 에너지와 능력을 소모하고 계신다고 했다. 성령은 신자의 반역으로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손 놓고 계신 분이 아니다. 신자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한시도 쉬지 않고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으로 살리기 위해 우리의 육적 자아를 죽이는 것이며, 우리를 영적으로 세우기 위해 육적으로 허물어뜨리신다.
2.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성령충만을 이해함에 있어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성령충만은 인간의 피나는 노력의 대가로 쟁취할 수 있는 은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라는 사실이다. 성령충만은 우선적으로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주님의 행하심에 근거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해 모두 충족하셨기에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신 것이다.(딛3:6)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처음 믿을 때부터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특권이 주어졌다. 이 특권은 책임과 함께 맞물려 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택 사항이 아니라 절대적 의무 사항이다. 신자에게 있어 근본 죄악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죄 속에 빠지고 거룩하게 살지 못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실제로 성령충만을 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성령의 뜻보다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성령충만은 영적으로 침체한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은혜이다. 로이 헤슨이 지적했듯이, “성령충만은 우리의 신실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우리의 실패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충만의 축복은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데 성공한 제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히 실패한 제자들에게 주어진 선물이었다. 구약에서도 성령의 충만한 은혜는 범죄하고 타락하여 영적으로 황폐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되었다.
오직 빈 그릇만이 채워질 수 있듯이 성령충만은 충만과 정반대의 상태에 있는 이들을 위한 은혜이다. 심령이 텅 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은혜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통해 우리 안에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밀려들어 올 수 있는 가난하고 애통하는 마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을 창조하신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절박하다”는 뜻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절박하게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가난한 심령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더 이상 살수 없다고 느낄 정도로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이 은혜를 구하는 사람만이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심히 부끄러워하는 ‘거룩한 수줍음’으로 가득하게 된다. 그럼에도 자신의 영광과 명성에 집착하는 이들이 성령충만을 원하는 이유는 결국 자기성공을 위한 능력이다. 성공을 위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경건은 원치 않으면서 경건의 유익만 탐하는 것이다. 교인들은 거룩하게 사는 것보다는 현세적인 행복과 기쁨과 평안을 얻기 위해 성령충만을 구한다. 과연 나는 진정으로 성령 충만을 원하고 있는가를 냉철하게 돌아 보아야 한다. 내가 왜 성령충만을 구하는지, 성령으로 충만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동기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3. 애통하는 이들을 위한 은혜
성령충만은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이다. 그러나 실패의 자리에 마냥 주저앉아 있는 이들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은혜이다. 성령충만은 죄에 대해 애통하는 이에게 임한다. 성령충만이 임할 때 항상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래서 성령충만의 앞부분은 회개의 은혜이다. 회개해야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으며, 성령으로 충만해질수록 더 깊이 회개하게 된다. 성령충만한 이는 죄를 전혀 안 짓고 완벽하게 사는 이가 아니라 매일 죄를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회개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회개란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전인격과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다. 우리는 그동안 우상숭배로 더렵혀진 몸과 마음의 모든 죄를 회개해야한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회개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죄는 무서운 중독현상이다. 죄는 우리의 의지를 분열시킨다. 한편으로는 죄에서 헤어 나오기를 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죄에 계속 집착한다. 분열된 의지 속에서 계속 갈등하며 고뇌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죄에서 자유케 하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죄의 중독과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노력과 시도가 실패로 끝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은혜의 절대적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기에 죄의 속박은 가장 강력흔 은혜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존 스토트의 말대로, 회개와 성화는 자기절망에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가 죄에 빠져 절망의 밑바닥을 칠 때 홀연히 임한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십자가의 진리를 바로 알아야 한다.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사할 뿐 아니라 우리를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케 한다. 또한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한다. 성령충만을 회복하려면 성령을 따라 심어야 한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성령을 위하여 말씀을 심으면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속 좋은 생각과 지혜, 영감과 메시지를 공급해 주신다. 이러한 생각과 지혜를 따라 행하다보면 좋은 습관이 형성되고 이 습관이 기질화 되면 성품을 낳는다. 우리의 신앙인격은 습관화된 몸의 행동으로 나타난다.
4. 부흥케 하는 성령의 사역
부흥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그러나 부흥에 대한 관심이 많은 만큼 그에 대한 혼란과 오해도 많다.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기에 인간의 노력으로 끌어내릴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는 인간의 그릇된 피동성을 조장하는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칠 수 있다.
보편적으로 부흥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이며, ‘특별한 성령의 부으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재현 또는 획기적인 이차은혜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상실된 영적 은혜의 회복을 의미하는지가 확실치 않다. 어떤 성령론적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이에 대한 견해가 다를 것이다. 부흥을 논하는 이들 가운데 부흥의 정의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가 엇갈리지만 부흥이 성령의 충만한 역사라는 점에 대해서는 별 이의가 없다.
1) 성령충만이란 무엇인가?
성령충만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는 데 비해, 신약성경에는 이 용어가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 도합 15번 등장하는데, 그중 14번이 누가의 글(사도행전 10번, 누가복음 4번)에 나타난다. 먼저 충만이라는 표현은 우선적으로 성전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 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이 가득했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또한 구약에서 성령이 임하거나 충만케 하는 개념은 특별한 임무수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을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케 하셔서 성전을 건축하거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지혜와 능력과 영감을 주셨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성령충만은 특별한 임무수행을 위한 능력부여라고 볼 수 있다. 누가는 이런 관점에서 오순절 전후의 성령사역을 연결시키는 동시에 구별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의 영이 마지막으로 임박한 메시아 왕국을 증거한 엘리사벳, 사가랴, 그리고 세례요한에게 임한 것을 ‘성령충만했다’고 표현하므로, 오순절 후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성령충만한 것과 평행을 이루도록 묘사했다.
누가는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 땅끝가지 복음의 증인이 되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기술하였다. 성령이 전적으로 주관했다는 의미로 성령으로 충만했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성령충만과 관련된 언급들은 우선적으로 누가가 보았던 구원역사의 틀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누가는 성령충만을 우선적으로 선교론적이고 구원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했다.
바울 역시 성령충만이라는 개념을 선교론적 교회론이라는 큰 틀에서 이해했다. 에베소서에서 그는 교회의 존재 목적과 본질적인 사명을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바울은 이런 시각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전이라는 그의 가르침을 발전시켰다. 교회의 이미지를 “충만”이라는 단어와 연관시켜 새롭게 표현함으로써 교회의 우주적 사역의 특성을 부각시켰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고 묘사한 것이다.(엡1:23) 곧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하여 세상 속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득히 채우고 만물을 그의 권능과 영광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해야만 바울이 소원한 그리스도로 충만함과 하나님으로 충만함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 안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거하는 공동체이며 삼위 하나님의 우주적 통합의 경륜을 이루어가는 새 언약의 백성들이다.
바울과 누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근본적인 공통점은 둘 다 성령 충만함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연결시켜 이해했다는 점이다. 결국 성령충만은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 되어(누가의 관점), 온 땅 위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영광이 충만한(바울의 관점)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실현한다. 이런 선교론적 관점의 큰 틀 속에는 성령충만에 대한 교회론적이면서 성화론적인 이해가 내포되어 있다.
성령충만은 문자적으로 무엇으로 “가득함”, “가득 채워짐”을 뜻한다. 여기서 채워지는 내용은 물질적인 것(술이나 물)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기쁨, 지혜, 믿음, 은혜, 능력, 성령)일 수도 있다. 성령이 비록 물질과 같이 보이는 형태와 질량을 갖지는 않지만 분명히 신자 안에 내재하는 영적 실체이다. 성령은 공간을 초월하면서도 공간 안에 내재하신다. 그러므로 문자적인 의미에서 성령충만이란 성령이 개인과 교회 안에 그의 영적 임재와 능력, 영향력을 풍성히 채워주심을 뜻한다.
또한 성령충만은 비유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충만을 술 취함과 비교한데서 이런 비유적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술에 취하면 술의 영향과 지배를 받는 것처럼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의 강력한 영향력에 압도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술을 마시면 술기운이 온 몸에 퍼지듯이, 성령의 새 술도 우리 안에 확산되어 우리의 전인에 영향을 미친다.
2) 성령충만의 단회성과 연속성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단회적인가 아니면 연속적인가의 논쟁이 부흥에 관한 논의의 핵심에 놓여있다. 오순절교회는 오순절에 나타난 성령세례/성령충만의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며 중생 후 받아야할 이차은혜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하여 전통교회에서는 오순절의 성령세례/성령충만은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 단회적인 사건으로 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을 때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에 더 이상 성령세례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성령을 부어 주사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부흥케 하리라는 구약의 종말론적 소망이 실현된 것이다. 이 약속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종료해야만 실현될 수 있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는 그 누구도 성령을 선물 받았다는 언급이 없다. 복음서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한 의미에서 성령의 소유자요 성령충만한 사람인 반면, 사도행전에서는 많은 제자들이 성령충만한 이들로 묘사되었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약의 종말론적 소망과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으로 인해 성취된 것이다. 이는 새 시대의 도래와, 새로운 성전으로서의 교회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특별한 구속사적 의의를 띤다.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는 단번에 이루어진 결정적인 사건이다.
오순절 전과 후, 성령사역의 근본차이는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점이다. 부활하신 주님의 새로운 존재 방식인 영적 임재는 그의 육신적 존재 방식이 끝나야만 가능했다. 오순절 성령충만은 제자들을 새로운 그리스도의 임재 속에 들어가게 했다. 제자들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동시에 성령으로 충만한 성전으로서의 교회에 속하게 된 것이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제자들뿐 아니라 오순절 후에 사마리아인들과 고넬료, 그리고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도 중생 후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마리아와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심은 유대인들의 베타적 의식을 깨고 사마리아와 이방인들을 합법적인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약교회의 정식 멤버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확증하는 하나님의 인침이다.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성령의 임하심은, 새 시대가 이미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리스도 안에 완성된 구속의 은혜와 성령의 오심을 알지 못한 채 옛 것(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신약교회로 편입시키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오순절교회의 성령세례 교리는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할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실제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중생 후 성령세례라는 구도 속에 모든 신자들의 체험을 획일화하는 것은 성령 체험의 다양성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신자들 중에는 중생 후 획기적 은혜체험 없이 점진적으로 성숙해가는 이들이 있는 반면, 이차은혜 뿐 아니라 수차례 획기적인 은혜체험을 하는 이들도 있다.
오순절 교리의 또 다른 문제점은 한번 성령세례/성령충만을 받으면 높은 수준의 영적인 상태가 항상 보장될 것이라는 잘못된 기대감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번 획기적으로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해서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이 교리는 성령세례/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 여러 조건들을 요구하는 율법주의적 올를 드러낸다. 또한 한번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모든 죄와 약함과 갈등의 문제가 일격에 해결되리라는 완전주의적 기대와 영적인 충만함을 단번에 획득하려는 영적 요행심을 조장한다.
올바른 부흥관의 정립을 위해서는 오순절 성령충만의 단회성과 연속성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필요하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다시 되풀이 될 수 없는 단회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과거 제자들을 충만케 하셨듯이 지금도 우리를 충만케 하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를 항상 충만한 은혜로 인도하려 하신다. 성령충만은 중생 이후에 받는 이차적인 은혜가 아니라 예수를 믿을 때부터 누릴 수 있는 은혜이다. 모든 신자들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고 그 성령으로 계속 인도함을 받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이,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충만한 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인 동시에 인간의 책임이다. 이 둘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충만케 하는 성령의 행위는 주권적이며 항상 선재한다. 이 성령의 주권적 역사가 신자에게 임하게 하기 우해 인간의 어떤 책임이나 조건이 요구된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성령충만의 상태를 유지하는 데는 신자의 책임이 따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한다. 죄를 버리고 거룩한 길로 행해야 한다.
성령충만의 특권은 책임과 함께 맞물려 있다. 성령은 항상 우리를 충만케 하고 주관하려 하므로, 이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지 말고 잘 순종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하지만 이 책임을 성령충만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책임을 다 완수함으로써 성령충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의 은혜가 그 책임을 가능케 한다.
제 2부 임재의식의 회복
5. 하나님의 현존과 그 인식의 가능성
과연 하나님의 임재를 생생하게 감지할 수 있도록 체험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체험이 확고한 성경적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의 내재는 신학의 중요한 명제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무소부재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내제성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제한되었다.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하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인격적인 교제를 위한 하나님의 내주하심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내재는 오직 죄 없으신 인간 예수님 안에만 온전히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며 끊임없이 그 임재를 의식하며 사셨다.
하나님의 임재는 기독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적인 교제와 사랑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하는 임재, 풍성한 구속의 은혜와 새 생명을 누리게 하는 임재, 하늘의 권능을 입혀주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얼굴빛을 비춰 주는 임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다원주의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임재를 기독론적 바탕으로부터 분리시켜 이해할 때 결국 범신론적인 개념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임재의 모델인 동시에 중개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한 하나님의 내재하심이 나타났다. 예수의 죽으심으로 그 안에 내재하던 성령이 많은 사람들 안에도 내주하게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의 촉각으로 느끼고 눈으로 보는 듯이 감지할 수 있는 것인가? 이미 오래 전에 임마누엘 칸트는 철저한 인식론의 연구를 통해 그것이 불가능함을 주장하였다. 칸트는 하나님을 경험과 지식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칸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오감을 통해 감지할 수 없으며 순수이성의 추론을 통해서도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신앙의 본질은 지식이나 교리가 아니고 ,도덕이나 행위도아닌 ‘느낌’ 또는 ‘감정’에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감정’이란 신체의 오감에서 오는 감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감정은 이성과 같이 자기 나름의 ‘앎’의 기능을 가졌다. 일종의 선험적 직관이다. 거룩한 존재 앞에서 심히 두렵고 떨리는 감정, 두려운 동시에 놀라우리 만큼 평안하고 포근한 느낌이 바로 그런 것이다. 절대의존감에 대한 슐라이에르마허의 견해가 인간 자의식의 분석에 머무른데 비해 오트는 좀 더 거룩한 존재와의 만남에서 오는 느낌을 탐구하려고 했다.
바르트는 참된 하나님의 의식은 인간 안에서 “아래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지속적이고 영구적으로 내재한다는 개념을 약화시켰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실 뿐 아니라 그 임재를 계시하신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의 임재의식은 인간의 생래적 종교의식의 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조명에 의해 우리 마음 가운데 산출된 것이다.
6. 감동체험의 위력과 함정
인간 안에 성령의 조명을 받아들이는 채널은 무엇인가? 이성인가? 감성인가? 아니면 제3의 감각기능인가? 전통적으로 이성을 성령의 조명을 수용하는 가장 안전한 통로로 생각해 왔다. 이성은 진리를 인식함에 있어 객관성과 합리성을 확보해 주는 반면에 비이성적인 것, 즉 감정이나 체험은 주관적이고 혼란스러워서 진리를 파악함에 있어 열등하고 주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로인하여 신학과 체험, 지성과 감정 사이의 심각한 분극화 현상이 나타났다. 신학은 주지주의, 교리주의로 치우쳤고, 이는 다시 경건주의와 신비주의의 반작용을 불러왔다.
이러한 양극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감정의 역할을 재평가해야 한다. 하나님의 신비를 합리적 이성으로 다 파악하고 설명할 수 없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합리적인 이성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성주의 전통과 감정적 충만한 열정주의 사이에 적절한 종ㄹ과 상호보완이 필요하다. 감정과 체험에 대한 강조는 결국 반교리주의로 치우치게 한다는 선입견을 탈피해야 한다. 참된 신학과 체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진정한 감동 체험은 삶 속에 나타나는 그 열매로 평가된다. 교회가 영적 부흥을 체험할 때마다 종교적 감성과 열정이 고조되었고 이로 인한 혼란과 논쟁이 계속되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사탄의 전략은 우리를 양극단으로 치우치게 하는 것이다. 사탄은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거짓 감정을 살짝 혼합하여 광신적인 혼란을 야기한다. 이러한 현상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판명되면 사탄은 그의 전략을 즉시 바꾸어 모든 감정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설득하여 “마침내는 우리가 체험하는 영적 감정들로부터 우리의 마음 문을 꽉 닫아 버리게 만든다.” “다라서 영적 감정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는 모든 감정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요, 모든 감정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요, 오직 그것들을 잘 분별하는 것이다.”
거룩한 감정의 핵심은 사랑이다. 성령은 사랑의 영이다. 사랑의 영으로 충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삶은 불가능하다.
7. 하나님의 임재의식
하나님의 임재의식은 특별히 영적 부흥의 때에 강렬하게 체험된다. 교회역사 속에 일어났던 부흥에 대한 기록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것은 사람들이 강렬한 임재의식에 압도되는 경험이다. 신약교회는 성령 안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충만히 내주하는 영광스러운 성전이다. 구약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듯이, 신약의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충만하게 드러나야 한다.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지속적으로 의식하며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의식은 인간의 생래적인 영성이나 종교성에서부터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하는 말씀과 성령으로부터 산출된 것이다. 이 의식은 인간이 심리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자신의 임재를 우리 마음에 계시해 주실 때만 가질 수 있는 의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의 계시, 역사하심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능동적인 역할은 없는가? 하나님의 임재의식은 성령의 산물이지만 이 의식을 지속적으로 배양하는 데는 인간의 책임이 따른다. 하나님을 항상 의식하며 살기 위해서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믿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교회가 삼위 하나님께서 충만히 거하는 새로운 성전이라는 사실에 대해 확고한 믿음은 우리의 교회생활과 예배드리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는 예배를 드리며 그 임재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행할 것이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기에 교회에 성령의 임재는 특별히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또한 신약성경은 교회뿐 아니라 개개인 신자가 성령의 전이라고 했다. 주일 예배 시에 체험한 하나님의 임재를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으로 옮기는 움직이는 성전의 역할을 한다.
8.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눈뜨는 영성
영적인 삶을 일상의 평범한 영역과 제대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교인들이 안고 있는 문제이다. 요즘 “흩어지는 교회”가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 교인들을 자꾸 교회로 끌어 모으려고만 하지 말고 세상 속에 흩어져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들로 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말씀대로 모이기를 더욱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와 함께 이제는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사명에 좀 더 역점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성령은 교회를 세상과 분리시킴과 동시에 세상과 함께하게 하신다.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불러 모아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세상과 구별된 성결한 무리가 되게 하시고 세상에 다시 파송하신다. 선교는 해외의 미전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선교사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이다. 바울은 성령의 사역을 복음전파를 위한 능력부여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과 관련해서 이해한다. 성령은 신자를 새롭게 하여 빛의 열매를 맺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며, 세상 속에서 빛 된 사명을 감당케 한다. 사도행전에서 언급된 성령충만은 거의 대부분 복음전파와 밀접하게 관련된 반면 바울 서신의 성령충만은 교회론의 맥락에서 공동체적 성화와 연관되어 있다. 이 두 가지 관점을 통합할 때 교회의 선교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이르게 된다.
9. 어두운 밤을 지나며 깊어지는 신앙
숨겨진 하나님의 얼굴, 이것이 신자의 삶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그 얼굴을 감추시는가? 왜 그들의 고통과 신음과 부르짖음에도 침묵하시는가? 그 이유를 다 알 수는 없다. 다만 성경을 통해 몇 가지 원인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가장 단순한 대답은 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가 계속되는 죄 속에 살면 성령이 근심하며 성령의 은혜가 소멸된다. 성령의 위로와 기쁨이 떠나가고 구원의 감격은 사라져 심령은 사막과 같이 메마르고 황량해진다. 하나님은 범죄한 그의 자녀들이 죄에서 철저히 돌이킬 때까지 그 얼굴을 숨기신다.
신자가 겪는 고난 중 가장 고통스러운 형태가 징계로 오는 고난일 것이다. 이 고난이 견디기 힘든 것은 대개 아무런 내적 위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심은 징계를 더욱 효력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죄를 깊이 의식하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신다.
영적 어두움은 꼭 죄에 대한 징계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선진들은 이것을 영적 성숙의 과정에서 겪는 하나의 홍역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우리 신앙의 성숙을 위한 영혼의 젖떼기 훈련을 시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멀리 떠나신 것 같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으며 아무런 도움의 손길이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어둡고 실망스러울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대단한 신앙을 요한다.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얼굴을 잠시 가리시지만 그의 진노하심으로 그 얼굴을 가리시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우리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철저하게 버리심을 당하셨기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 참혹한 저주의 버리심은 없다. 우리를 무한한 기쁨과 사랑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은 전혀 변화가 없다. 다만 성령의 교통하심과 성령의 효과적인 사역을 거둬 가실 뿐이다. 비록 성령의 기쁨은 떠날지라도 그 기쁨의 성령은 여전히 내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재는 단지 우리 의식의 차원에서 그렇게 느낄 뿐이지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부재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사실의 분명한 반증이다.
제 3부 성화의 회복
“왜 그리스도인들이 변하지 않는가?” 한국교회를 향해 끊임없이 제기되는 의문이다. 한국교회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들을 ‘성화’되게 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그 동안 은혜에 치중한 설교가 한국교회 안에 윤리적인 나태와 방종을 조장했다면,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윤리를 강조하는 설교는 율법주의에 치우쳤다. 복음의 양면성, 즉 칭의와 성화의 긴밀한 연결성과 구별성을 균형 있게 강조하는 성화론의 정립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10. 무율법주의와 율법주의를 넘어서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면서도 그 둘 사이의 긴밀한 연결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항상 함께 가는 것이며 실제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다만 논리적으로 구별될 뿐이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지체 없이 그리고 필연적으로 성화가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그와 동시에 거룩하게 된다. 바울은 유대 율법주의에 맞서서는 성화와 구별된 칭의를 강조하였고, 무율법주의의 반론을 배격하기 위해서는 칭의와 연결된 성화를 논하였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성령의 열매를 산출할 수 있다. 오직 믿음이란 말은 육신의 열심과 교만에서 비롯된 율법적 행위를 배격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믿음만이 성령의 은혜로 인한 참된 선행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루터와 칼빈은 의롭다함을 받은 믿음은 반드시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누누이 역설하였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이들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따르게 된다고 하였다.
11. 성화의 복음
인간은 자신의 의로움에 의존하는 교만한 성향 때문에 칭의의 은혜를 확신하고 누리기가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단지 칭의에만 국한되지 않고 성화의 과정에서도 지속된다. 많은 교인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아놓고는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지속적으로 누리는 것은 자신들이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 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적인 열심은 성화를 다이나믹하게 진행하는 성령의 역사에 오히려 거침돌이 된다.
칭의뿐 아니라 성화의 전 과정은 오직 믿음의 바탕 위에서 진행된다. 우리는 오직믿음으로 의롭게 될 뿐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 성화의 과정은 인간의 행함이 ‘오직 믿음’이라는 채널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오직 십자가만이 칭의의 공로인 것같이 또한 성화의 근거임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함을 얻는 것 같이, 오직 십자가의 효력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성화를 이루어간다. 그것은 십자가에서부터 죄를 이기는 능력, 거룩하게 사는 효력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복음사역의 두 축은 십자가의 도와 성령이다. 십자가를 통해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함께 십자가의 도의 실체를 죄인의 심령에 체험적으로 와 닿게 하는 성령의 사역이 한데 어우러질 때 효과적인 복음 사역을 낳게 된다.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사랑에 매료되고 우리가 이 사랑에 사로잡힌바 되면 우리는 거룩하게 살게 된다.
12. 제2의 축복
웨슬리는 즉각적, 또는 온전한 성화를 말한다. 이 은혜를 체험하면서부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온전해지며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웨슬리와 성결운동에 이어 일어난 “더 풍성한 삶 운동”과 유명한 케직 사경회에서는 이 획기적인 성화의 은혜를 자주 제2의 축복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 은혜체험을 “자아가 죽는 체험”, 또는 “롬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체험”,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전환하는 체험”등으로 묘사하였다. 간혹 제2의 축복을 “성령세례” 또는 “성령충만”이라고도 불렀는데 20세기 초부터 성령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면서 점차 이러한 명칭은 선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적인 근거가 희박하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죄와 분리된 성결한 삶은 회심 후 제 2의 축복을 체험할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시작된다. 신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죄에 대해 죽고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결정적인 성화가 일어나며 동시에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특권이 주어진다. 따라서 성경이 제시한 정상적인 성회의 삶은 예수를 믿을 때부터 성령으로 충만하여 죄와 결별된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즉각적인 동시에 점진적이다. 성령충만은 즉각적으로 임하는 주권적 은혜이며, 이 획기적인 체험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성령충만해지는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들어가게 한다.
비록 제2의 축복이나 이 교리는 성령세례의 가르침이 이와 같은 신학적인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 교리는 성화와 오순절에 임한 성령충만 사이에 중요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일깨워주는 공헌을 하였다. 곧 거룩한 삶, 능력있는 사역은 오직 성령충만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오순절 성령충만의 축복이 성화의 원동력을 제공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과의 논쟁 속에서 성화의 불완전성을 크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면, 웨슬리는 불완전교리가 남용되는 상황 속에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추구를 새롭게 불러 일으켜야 할 사명을 느꼈다. 웨슬리는 “이미” 쪽으로 편중되므로 과장된 승리주으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을 극복하지 못했다. 대조적으로, 칼빈은 ‘아직도’라는 종말론적 포커스를 통해 성화를 고찰함으로써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완전주의적 망상과 영적 우월주의를 추방해 버린다. 동시에 성화의 참된 다이내믹인 겸손을 불러일으킨다.
제 4부 성령충만한 교회의 회복
13. 교회의 영광, 삼위 하나님의 충만
오순절 성령의 부으심의 결과는 영광스러운 교회의 탄생이었다. 새 언약의 실현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하나님의 거처요, 성전으로서의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신약교회는 성령강림의 첫 열매이며 처음부터 성령충만한 공동체로 출범하였다. 참된 교회는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시는 성령의 전이다. 바울은 교히를 그리스도로 충만할 뿐아니라 하나님으로 충만한 성전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도했다.(엡3:19) 더 나아가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이 충만히 거하는 성전이다. 따라서 오순절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아 삼위 하나님께서 충만한 성전으로서의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공동체이며 삼위 하나님의 우주적 통합의 경륜을 이루어가는 새 언약의 백성들이다. 삼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부분적으로 실현된 천국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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