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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교리를 사수하라 - 존 파이퍼

이참리 2020. 5. 22.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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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교리를 사수하라
국내도서
저자 : 존 파이퍼(John Piper) / 장호익역
출판 : 부흥과개혁사 200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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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 교리를 사수하라

 

1장 논증의 가정적, 교회적, 문화적, 국가적인 배경

 

우리가 교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 특별히 칭의 교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을 통해서 책 전체의 논지를 이끌어 가고 있다.

 

교회는 교리가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좋은 음악, 좋은 프로그램, 교회의 위치, 이러한 것들로는 충분하지 않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그의 책 [기독교적 관점의 실제]에서 영국의 도덕적인 약화를 교리적인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 기독교 윤리를 기독교 교리와 별개의 것으로 보는 치명적인 습관은 모르는 사이에 힘을 얻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고유의 교리는 점점 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어졌고, 예상했던 대로 도덕 체계에 생명과 양분을 공급하던 것을 상실하지 도덕 체계 또한 쇠퇴하고 붕괴되기 시작했다. - 더욱 놀라운 것은 윌버포스는 영국의 도덕적 개혁을 위한 간청에서 칭의 교리를 그 요점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자기 시대의 명목상의 기독교인의 영적이고 실제적인 모든 잘못은 기독교의 근본 원리에 대한 잘못된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칭의와 화목의 원인이 아닌 결과로써 거룩의 열매를 맺게 하는 구조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  윌버포스에게 있어 칭의 교리와 성화 사이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는 것 -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것 - 은 영국의 도덕적인 개혁의 본질이었다. 인종 문제와 생명의 존엄성과 문화적인 모든 문제를 위해서 교리적인 사람들의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교리를 이해하는 것과 훌륭한 사람들과 교회와 사회 사이에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교리, 특히 칭의 교리는 사회적 문제 뿐만 아니라 가정의 문제(결혼, 자녀)와 교회의 목회적인 모든 문제(비행청소년, 상담, 세계 선교, 교회 개척, 예배 등)에도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가정의 문제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그리스도 덕분에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하게 보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하여 주신 방식으로, 그리고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나를 도와주시고 축복하고 양육하고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의 가족(남편, 아내, 자녀)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가 우리의 가정생활을 더 탁월하게 치유할 것이다. 또 교회 목회적인 문제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선포하는 메시지를 통해 성경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온전하고 풍성한 성경적 복음을 통해 주 예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이 자라 갈 수 있다. 그리하여 원칙에 충실한 삶과, 고난의 때에 달콤한 위로와, 자녀들의 진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신앙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또한 칭의 교리는 비행 청소년이나 성도들과의 상담 속에서도 우리의 의가 되신 그리스도가 계심을 통해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를 통해서 세계 복음화에 대한 열정, 성경적인 교회 개척을 해 나갈 수 있고, 우리 인생의 최대 목표를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으로, 교회로 하여금 찬송하게 하는 진리로 이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는 수 세기에 걸쳐 즐거운 예배의 중요한 이유였고 많은 찬송가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를 다루어야 하는 모든 이유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반대하는 주장을 반박하고,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영광임을 증명하여 보자.

 

2장 현대의 도전

 

전가(imputation)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자. 전가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피와 의”,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삶과 죽음을 통하여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성취하신 의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죄인들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역(substitute), 즉 고난과 죽으심에서 우리의 저주와 정죄가 되셨다.(3:13, 롬8:3) 그리스도는 고난과 삶 속에서 우리의 완전함이 되신다.(고후 5:21).(고후5:21) 그리스도의 죽음은 한 편으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무마시키는 속죄의 고통의 정점이다.(롬 3:24~25).(롬3:24~25)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에게 전가된 완전한 의의 삶의 정점이다. 그러므로 의의 전가는 교회와 교회의 사명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칭의에 대한 도전

웨스트몬트 대학의 객원 교수인 로버트 건드리는 [책과 문화]에 연속으로 게재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자(believing sinners)에게 전가된다는 교리는 포기할 필요가 있다. 전가된 교리는 전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하물며 복음의 핵심도 아니다. 그 개념은 로마 가톨릭의 영향이나 자유주의 신학 때문이 아니라, 관련된 성경 본문에 대한 충실함 때문에시대에 뒤진 개념이다. 건드리는 신적인 의의 어떠한 전가도 비성경적으로 여길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우리 믿음 자체를 우리의 의로 여기시기 때문에 믿음 자체가 우리의 의라고 말하는 것이다. 건드리는 로마서 324~26에 대한 논평을 하면서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는 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에 돌리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구속은 노예 신분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에 구속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와 우리의 죄를 교환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오히려 구속은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그의 의가 문제가 되는 분이시다. 죄인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유다. 그러므로 죄인의 경우 칭의는 구속 [즉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으로 해석하는 반면에, 하나님의 경우 칭의는 명성, 명예의 유지로 해석한다.

 

이를 요약하면,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받는 대신, 의로워지도록 믿음을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결정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의다. 칭의는 신자들에게 신적인 의의 어떠한 적극적인 전가도 포함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는 언약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이다. 칭의라고 불리는 이 구원 행위는 전통적으로 성화라고 불리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즉 칭의는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과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죄인들에게 전가된다는 교리는 비성경적이므로 폐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우리의 죄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벌을 대신 지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전가되는, 우리를 위한 완전한 의가 되신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새로운 도전은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데 부족한 것이다. 하나님이 추하고 연약한 인간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피와 의의 기초 위에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찾게 하셨다면, 이 새로운 도전은 복음으로 죄인들을 구원하고 위로하는 목회 사역에 심각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3장 현대의 도전에 대한 주경 학적 응전

 

1. 우리에게 전가된 의는 외적인 것이고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는 증거.

 

로마서 42~6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1.1 바울은 칭의를 전가하는 것(imputing)" 또는 신용하는 것(crediting)"으로 생각한다.

 

로마서 43절에서 바울은 창세기 156절을 인용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위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 이와 같이 전가의 개념이 창세기 156절로부터 신용하다(credited)”, “여기다(reckoned)” 또는 “~로 보다(counted)” 또는 귀속시키다, 전가하다(imputed)”는 말로 도입되고 있다. 전가 또는 신용의 개념이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로워진 것이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로마서 42절과 연관되어 소개되고 있다. 이렇게 바울은 칭의(2절)와(2절) 전가(3)를 연결하여 병합하고 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는 사역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전가하는 사역, 신용하는 사역에 대해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1.2. 전가의 문맥은 기장의 은유에서 대차대조표의 대변에 금액을 기재하는(crediting) 것이다.

 

건드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전가는 외적이며, 신적인 의가 아브라함에게 계정 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진 어떤 것, 즉 믿음이 아브라함의 의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의 의로 취급되는 우리 내부의 어떤 것(믿음)이 아니라, 즉시 우리의 계정에 전가되는 외부의 어떤 것(임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4절과 5절의 전가에 대한 바울의 개념은 하나님이 우리가 가진 어떤 것을 의가 되는 것으로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우리의 것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1.3 로마서 45절과 46절의 관계로부터 확증

 

바울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과 복에 대해서 다윗이 말한 것과 같이라고 말하고 있다. 5절과 6절의 관계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6절의 일한 것이 없이5절의 경건하지 아니한 자사이의 유사성이다. 하나님이 일한 것이 없는한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는 5절에서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는 행위와 6절에서 의롭다고 여기시거나, 의롭다고 여기는 행위 사이의 유사성이다. 바울의 마음 속에 있는 칭의는 우리 안에 있는 의로 취급되는 믿음이라기보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말미암아우리를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다.

 

1.4 로마서 46절과 328절 사이의 평행

 

로마서 328절과 46절 사이의 어법상 평행을 보아야 한다. 로마서 46절에서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이라고 말하고 있다.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3:28)일한 것이 없이”(4:6) 사이의 평행은 의롭게 하다의롭게 여기다사이의 또 다른 평행이 너무 밀접하여 동의어를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의로워 지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의로 인정하거나, 여기는 것보다는 우리에게 전가된 의라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바윗이 말한 바”” 하나님이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의로 인정하신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건하지 않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갖지 않은 의를 전가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1.5. 로마서 49~11절의 사상의 흐름으로 본 증거

 

바울이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4:5)라는 구절을 우리의 의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바울이 의로 인정된 믿음믿음 때문에 인정된 의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고 이것은 인정된 의는 우리의 의로 구성된 의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 때문에 우리에게 인정된 의라는 처음 결론을 지지해 준다.

 

1.6. 로마서 1010절의 확증

 

로마서 1010에서 바울은 우리가 의에 이르도록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고백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이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의로 이끄는 것이다.

 

1.7. 에베소서 38~9의 증거

 

바울이 자신의 의를 소유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안에서발견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을 때,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기를 바라던 의는 바울 자신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의를 의미하는가? 이는 바울이 소유하기를 바라던 의는 그리스도 안에있는 덕분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 위에 기초한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그렇지 않다. 본문의 개념의 틀은 믿음이 우리 의가 아니라, 믿음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난 의를 소유하게 하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시 전가된 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의가 아니며, “믿음 때문에 우리에게 인정된 외적인 의라는 이전 결론을 지지하고 있다.

 

1.8. “믿음으로 의가 전가되었다.”는 것을 명쾌하게 밝히는 이유

 

믿음은 의로 인정된다”(4;3,9), 그리고 하나님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를 인정하신다”(4:6,11)

 

1.9. 결론 : 전가된 의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다

 

바울이 아브라함에 대해, 또는 아브라함과 같이 믿는 자들에 대해, 그들의 믿음이 ““의료 여겨진다”라고” 말할 때(롬4:3, 5, 9, 22, 23; 갈3:6), 바울은 의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단순히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전가된 의의 약속을 그들과 연결하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2. 우리에게 인정된 외적인 의는 하나님의 것이다

 

2.1 로마서 320절부터 46절까지 사상의 흐름

 

로마서 45절과 46절에서 바울은 칭의를 외적인 의의 전가로 이해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로마서 320절부터 로마서 4장에 이르는 칭의에 대한 온전한 사상의 흐름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로마서 320~22절 말씀을 읽으면서 전가에 대한 사도 바울의 용어들을 생각할 수 있다.

 

로마서 320~22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0절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로마서 328에서 거듭 주장되고 있다. 그리고 행위와 칭의의 문제는 로마서 42의 말씀으로 진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 320절부터 로마서 4장에 이르는 칭의에 대하여 일관된 사고의 흐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로마서 4장의 초반부에서 바울은 외적인 의의 전가로서 칭의를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로마서 320에 바로 이어 하나님의 의를 지적하고, 이 의는 칭의 안에서 우리에게 전가되는 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321에서 우리의 비참한 처지(, 우리가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구제책은 하나님의 의가 명백해지는 것”(또는 로마서 117절 말씀의 나타나서와 같다)이라고 말한다.

 

2.2 고린도후서 521에서 신적인 의의 전가에 대한 증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것의 의미가 무엇이든, 핵심은 여전히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로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전가하는 것을 제외하고(고후5:19), 전가라는 말 대신 연합(union), 화목(reconciliation), 이루어지는 것(being made), 되는 것(becoming)이라는 말들을 사용한다.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죄로 삼으신 것이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죄의 전가를 의미한다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의의 전가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라는 문장을 설명하기에 인위적이거나 부자연스럽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죄로 삼으신바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것이다. 그리스도는(죄의) 전가로 인해 도덕적으로 의로워지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가진 것으로 여겨지셨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전가에 대한 진실이다. 그러므로 의는 우리의 믿음에 의해 전가된 의가 아니라 외적인, 신적인 것이다.

 

2.3 결론 : 하나님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당신의 의를 전가하신다.

 

바울은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은혜의 선물로서 외적인, 신적인 의를 전가하신다고 가르친다.

 

3. 칭의는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이 아니다.

 

로버트 건드리는 칭의라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전통적으로 성화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하며, 이는 죄의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관계가 있다.”라고.” 설명한다.

 

3.1 성경신학의 지배적인 패러다임?

 

구원 행위란 말은 너무 광대하고 모호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거의 모든 일이 그 안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에 이 개념이 거짓됨을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이 그 한계를 넘었다는 신호 중 하나는 일부 주석학자들이 바울이 칭의에 대해 주의 깊게 표현한 몇몇 진술에서(전통적으로 소위 성화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해방의 행위를 광범위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게 한다는 것이다. 건드리는 칭의가 죄의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관계가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칭의란 바울의 일관된 생각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을 의미하는 것이며, 결코 거룩하게 하시고 순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행위는 구원적이며, 우리를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칭의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성화 사역 모두의 기초이자 예비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두 행위(칭의와 성화)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가장 넓은 의미에서 칭의는 죄의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관계가 있다. 자유하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포함하여 의롭게 된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축복들이 신적 의의 전가에 계속하여 오기 때문에, 칭의는 신적 의의 전가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성화와 관계가 있다.

 

3.2 새로운 패러다임은 로마서 324~26을 타당하게 다루고 있는가

 

건드리는 로마서 324절의 속량의 의미를 노예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자기 입장을 세우고 있다. 물론 속량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종류의 구원(rescue)과 연관될 수 있다. 바울이 로마서 324절에서 말하는 속량이라는 단어의 특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 본문들의 초점은 용서로서의 구속이며, 죄의 권세로부터 거룩하게 하는 구원으로서의 구속이 아니다. 이것은 화목 제물(propitiation)을(propitiation)을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설명하고 있는 로마서 325절로 확증된다. 로마서 324~26절의 쟁점은 하나님이 어떻게 (과거, 현재, 미래의)미래의) 죄를 간과하실 수 있는 가이지,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을 변화시키실 수 있는가가 아니다. 그 대답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화목하는 것이며, 그 결과는 죄를 참으로 간과하며 용서하는 속량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죄책을 면제하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가리키고 있다.

 

3.3 새로운 패러다임은 로마서 66~7절의 칭의를 어떻게 그릇 취급하고 있는가

 

새로운 패러다임은 로마서 324~26절 외에, 로마서 66~7을 근거로 칭의를 실제적인 범죄로부터의 해방으로 보고 있다. 즉 성화와 중복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3.3.1. 로마서 67,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의 의미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이 칭의에 이어지는 해방의 필수적인 근거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도, 건드리가 그것을 죄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추측하는 데는 아무런 논거가 없다. 죄책과 정죄로부터 자유롭다는 선언인, 칭의 없이는 죄의 지배에 대한 전투를 시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3.3.2. 로마서 66~7절에 대한 또 다른 이해

 

칭의는 성화를 포함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바울이 로마서 6~8장을 기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6~8장을 통해,왜 하나님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하신 그분 자신의 의가 이 세상에 무법천지의 결과를 가져오지 않고 오히려 필연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 66~7절에서 보존하고 있는 성화와 칭의의 관계를 혼동할 이유가 전혀 없다. 즉 칭의는 반드시 성화에 앞서는 기초이다. 죄로부터 법적으로 무죄하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인, 칭의는 죄의 노예로부터 자유롭게 될 가능성의 근거이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다는 희망을 일깨워 우리를 노예로 삼는 죄의 속박에 대하여 투쟁할 수 있는 가능성과 기반을 창출한다. 그러므로 7절에서 의롭게 하다(justify)”는 본래 의미를 보존하는 것이 주경학적으로도 합당하며, 실제적으로도 중요하다.

 

3.4. 로마서 83~4의 사상과 흐름

 

로마서 83절의 죄를 정하사1(“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에서 사용된 말들을 생각나게 한다. 이것은 칭의의 실재를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이 되셔서 죄의 정죄를 받으셨다. , 그는 우리의 정죄를 담당하셨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될 때 그리스도 안에서정죄로부터 자유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1) 의로워진 상태와 죄의 노예 신분에서 자유하게 된 우리의 상태 간의 관계는 무엇일까? 4절은 율법이 우리 안에서만족되었다고 하면서, 성화의 실질적인 진전을 가리키고 있다. 3절과 4(성화)3(칭의)의 결과이며, 또한 목적이라는 논리적인 관계있다. 달리 말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그리스도와 연합하므로 우리의 칭의가 보장된다. 그리고 이 칭의는 결과적으로 우리를 도덕적인 변화로 이끈다.

 

3.5. 결론 : 칭의는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이 아니다.

 

칭의에 죄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포함하도록 하는 어떤 주경학적인 근거도 찾을 수 없다. 건드리의 논증은 칭의 안에서 신적인 의의 전가를 발견하고, 칭의와 이어지는 성화 사이를 필연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하는 전통적 개신교의 성경 이해를 전복시키지 못한다.

 

4. 신자에게 전가되는 신적인 의는 그리스도의 의인가

 

전가에 대한 역사적인 개신교 견해에 대항하는 새로운 도전의 네 번째 부분은 신약 성경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대한 교훈이 없다는 것이다.

 

4.1. 그리스도의 전가에 대한 고린도후서 521의 근거

 

고린도후서 521저에서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죄가 되신 것과 우리가 의가 된 것사이의 평행이 드러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그는 지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로 스스로를 동일시하셨고 죄의 형벌과 최후의 심판인 죽음으로 고통당하셨다. 그리므로 우리의 인격과 행위에서 우리가 아직도 죄인으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로 여겨 왔다.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의 사람들에게 전가되기 때문에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논리적 결론이다.

 

4.2.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대한 빌립보서 39의 근거.

 

빌립보서 39절은 바울이 가진다라고 한 의는 그의 것이 아니라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나의 것이 아닌 의를 가지는방법이다.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명백히 말하지는 않지만, 여기에서 다른 증거와 함께 그것이 이 구절의 자연 스러운 해석임을 나타낸다.

 

4.3.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대한 고린도전서 130의 근거

 

고린도전서 130절에서도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셨다고 명백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의가 되신 것이 전가된 의를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있는 의와 관련된 다른 구절들은 칭의와 관련이 있으며(갈2:17), “우리 것이 아닌의에 대하여(빌3:9), 그리스도께서 죄가 되신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즉 전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고후5:21) 말하고 있다.

 

4.4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대한 로마서 104의 근거

 

모든 믿는 자들의 의를 위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의가 되신다는 고린도전서 130절의 개념과 잘 어울리고, 그리스도의 칭의를 위하여 신자들에게 전가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힘쓰며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믿는 모든 자들의 의를 위하여 율법의 표적이 되신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깨닫는 데 실패한 것에 기인하고 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의그리스도의 의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이며, 믿음이 행하는 것은 의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가 되신다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를 갖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된다.

 

4.5.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 교리에 대한 로마서 512~19의 근거

그리스도의 의와 순종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가되는 하나님의 의의 표현이라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훈이다. 아담 안에 있는 자에 대한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의 결과 사이에 결정적인 대조를 통해 절정에 이르게 한다.

 

4.5.1. 로마서 512절의 미완성 문장

 

바울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 즉 죄에 대한 심판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다음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확정하면서 이 죽음이, 이 심판이 한 사람에게 한정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라고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와 아담 사이의 전체적인 대조는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는 칭의의 자유와 탁월함에 대한 강력하고 유일한 성명 방법이다.

 

4.5.2.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12)에 대한 로마서 513~14절에서의 명확한 설명

로마서 513~14절에서 바울은 죄는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 있었다(13a). 다시 말하면, 그는 단지 아담의 죄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죄가 모세 이전에도 세상에 만연되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을 때 죄는 죄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14a)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실상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죄의 결과를 감당했던 것이다.

 

4.5.2.1. 가능한 반론들을 다루는 바울의 방법

 

반론은 모세의 율법 이전에도 노아와 아브라함과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법에 불순종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모세의 율법 이전에 다른 종류의 율법이 있었음을 인정하지만,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사망이 왕 노릇 하기 때문에 죄짓는 것을 선택한 적이 없이 죽은 사람들이 있다. 바울의 논지를 가장 적절하게 예증하는 사람들은 유아들이다. 사망은 모든 사람, 율법을 알거나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조차 왕 노릇 하였다.

 

4.5.2.2 바울은 왜 아담-그리스도의 연결을 이곳에서 도입했는가

 

바울은 가장 중요한 평행이 이곳에서 보이기 때문에 아담이 그리스도의 모형, 또는 형식 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평행은 아담의 죄의 법정적 결과는 아담이 그랬던 것과 같이 자신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아담의 죄가 그들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겪고 있다. 요점은 그 평행의 초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의의 법정적 결과를 그리스도와 같이 의로운 행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인류가 가진 문제는 모든 사람이 다양한 종류의 지를 짓는다는 것이 전혀 아니다. 개인적인 죄는 실제적이고, 거대하며, 우리를 충분히 정죄하고, 그리고 우리의 정죄에 실제로 역할을 한다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모든 타락과, 우리의 모든 죄책과, 우리의 모든 범죄의 배후에는 아담과의 깊고 신비한 연결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결 때문에 아담의 죄가 우리의 죄가 되며, 그의 심판이 우리의 심판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와 위험으로부터 구원하는 구주는 두 번째 아담으로서 아담의 자리에 서 있는 구주이다. 그는 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행한 것을 취소한다. 그는 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실패했던 것을 성취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의인이 되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를 받았다.

 

4.5.3. 로마서 515~17절의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대조

 

아담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순종을, 또는 그리스도의 의를 대조할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에 놀라운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들이 받는 선물이라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이것은 실제로 선물이라는 말이 의의 선물로 정의되어 있는 17절에서 명백해 진다. 아담의 범죄는 그리스도의 의와 대조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는 선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아담의 범죄가 많은 사람에게 사망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의가 선물로서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는 것을 함축한다.

 

4.5.4. 로마서 518~19절의 중대한 대조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평행과 대조로 발전시켜 왔던 것을 결론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의에 기초한 칭의의 실재의 탁월함을 명백히 하고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아담과 연결되었던 사람들에게 정죄가 이르게 되었다. 아담이 죄를 지었고, 우리가 그와 연결되었으므로, 그 안에서 정죄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의를 행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다. 아담의 죄는 우리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의 의의 행위는 우리의 것으로 여겨진다.

 

4.5.5.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는 그의 순종의 삶을 가리키는가

 

건드리는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가 그의 삶과 죽음 모두를 포함한다는 것을 부인한다.

첫째,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초점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만약 그리스도의 죽음의 속죄의 측면이 우리에게 성부와의 바른 관계를 갖게 하는 모든 것을 제공한다고 가정할 경우에만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둘째, 건드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이전의 율법에 대한 순종의 삶을 포함하고 있다는 어떠한 문맥상의 표시가 없다.”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하여 네 가지 대답을 제시하면, 첫째, 로마서 519절에서 순종이라는 말이 아무 제한 없이 그 자체로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가? 건드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 하나의 순종의 행위로 묘사하는 것이 쉽고 자연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둘째, 18절에서 의의 행위라고 번역된 말은 로마서 84절에서, 단수로서, 율법이 요구하는 전 범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셋째, 16절과 18절 사이의 평행을 기억하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와 순종을 선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의의 선물이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가된 아담의 죄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라는 문맥의 요구임을 알아야 한다. 넷째, 예수의 생애에서 어떤 불순종이나 불의의 행위도 우리의 의(또는 우리의 대속 제물)가 되는 것으로부터 그를 실격시킬 것이다셋째로, 건드리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이전의 삶에 대하여는 극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는 극도로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라고.” 지적한다. 다섯째로, 건드리는 “수식어구인 ‘’(one)으로 아담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의의 행위 모두를 단수화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5. 그리스도의 피와 의의 관계

 

바울은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의롭다 하심을 받았고(롬5:9), 또는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롬5:10, 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3:24~25)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구절들은 모두 칭의의 실재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관시키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명백하게 죄 용서와도 연관되어 있다.

 

5.1. “의롭게 하다의 의미

 

의롭게 하다(δικαιω)”용서하다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보통 법정에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죗값을 치르게 하지 아니하고 그냥 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와 용서를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5.2. 의의 전가를 가리키고 있는 본문들

 

의롭게 하다의 의미 외에, 이미 앞에서 검토했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를 전가하신다거나, 우리의 것이 아닌 의를 소유하게한다고 말하는 본문들이 있다.(즉 롬4:5,6,11,24; 5:17,18,19; 10:4; 고후5:21; 빌3:9) 이 본문들에서 사용된 의의 전가라는 말은 결코 용서로 바꿀 수 없다. 이 구절들은 우리 죄를 우리의 것으로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즉 이 구절들은 죄의 용서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들은 어떤 의가 우리 계좌에 기록된 것을 의미한다.

 

5.3 칭의와 죄 용서 : 로마서 4장에서 시편 32편을 이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이것은 칭의가 단지 용서를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며, 그러므로 신적 의의 전가는 불필요하다는 의미일까? 바울은 로마서 45절에서 하나님은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라고.” 말한 후에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절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복이 있도다.”(롬4:6~8)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용서가 없다면 칭의, 즉 적극적인 의의 선언과 전가도 없다고 가정하고 있다. 용서는 칭의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이다. 누군가를 의롭다고 선언할 때 죄는 반드시 지워지고 감추어지고 용서되어야 한다. 바울은 만일 구원의이 어떤 사람에게 선언되었다면, 그는 반드시 의롭다고 여겨져야 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다윗이 말한 복을 아브라함의 칭의로 설명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유이다.

 

4장 결론

 

건드리는 칭의의 필수적 의미로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법정적 선언을 굳게 붙들고 있는 것이 나타난다. 건드리는 우리에게 의로 여겨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라고 대답한다. 건드리가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의로 여긴다는 것에 부여한 의미는, 우리 의는 우리 의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행위와 구별된 믿음이 의로 여겨지므로, 믿음의 의란 하나님이 믿음을 의로 인정하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의이다. 건드리는 칭의의 근거로서 이 전통적 가르침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자리에 우리의 믿음의 반응을 대치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스도의 삶에서 순종의 요구는 줄어들지 않고 절대적이다. 만일 순종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합되었다거나 의롭게 되었다고 믿을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러나 거룩과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요구 속에서 발전의 유일한 희망은, 우리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하는 우리의 불완전한 순종 외에 또 다른 견고한 발판 위에 있다는 희망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역사적 프로테스탄트의 견해는 하나님께 용납되는 것과 영생의 희망의 기초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죄 용서와 완전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고난과 죽음에서 우리의 저주와 정죄가 되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최종적인 고난과 죽음에서, 전 생애에 걸친 고난과 의에서 우리의 완전함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린 속죄의 고난의 절정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전가된 의-하나님의 의-의 완전한 삶의 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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