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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적 성령론(4-6부) - 유태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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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적 성령론(4-6부) - 유태화

이참리 2020. 5. 21.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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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적 성령론
국내도서
저자 : 유태화
출판 : 도서출판대서 200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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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부 성령과 구원

 

제 9장 20세기의 토론 중생과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세령세례가 단회적인가 아니면 반복적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성령론과 관련하여 20세기 교회의 핵심적인 화두였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적 문제만이 아니라 성도들의 신앙적 삶의 역동성 문제와 관련되면서 신학자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지대한 관심사였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중생과 성령세례가 서로 다른 경험이라는 주장을 한다. 중생과 함께 성령의 내주가 시작되지만,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는 한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계기를 가져오는 첫 사건이 바로 성령세례라고 주장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웨슬리의 구원론의 구조를 상속한 것이다. 웨슬리는 성화를 세 단계로 나눈다. 1) 중생과 함께 시작되는 성화, 2) 그 이후의 사건으로서 순간적이고 획기적인 성화, 3) 종말에나 완성되는 온전한 완전함, 즉 영화가 그것이다. 첫째 단계는 회심 직후의 단계로 "육체의 소욕""성령의 소욕"이 마주하고 있는 상태이다. 두 번째의 단계는 갈등과 고뇌가 끝장나는 상태, 즉 죄가 더 이상 힘을 못쓰는 상태이다. 특히 여기서 웨슬리가 말한 완전 성화의 "완전"의 개념은 율법에 문자적으로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 즉 완전성화의 단계에 진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성령세례이다. 성령세례를 통하여 역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는 성령 충만으로 나가는 것이다.

 

중생과 성령세례의 관계는 무엇인가? 고전 12:13, 고후 1:21~22, 디도서 3:5~7의 주석을 통해 성령세례, 성령의 씻음, 성령을 부어주심과 같은 것은 중생을 뜻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 혹은 성령으로 세례 받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첫 사건으로서 중생을 뜻하며, 그리스도인이 구원과 관련하여 성령을 경험하는 첫 사건을 중생으로 보는 것이 바울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5:5에는 중생과 함께 주어진 성령의 역사와 신자 안에서 현재적 성령 경험은 대단히 역동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것을 묘사된다. 요컨대, 바울에게서 중생은 성령세례와 동일한 것이지만, 성령 충만은 지속적이다. 중생, 즉 성령세례는 성령 충만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중생하기 전의 인간, 즉 자연인은 그 마음이 죄의 세력으로 인하여 전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또한 경배할 수도 없다. 중생의 변화는 인간에게 예수의 복음이 들려질 때, 성령의 역사와 함께 발생한다. 성령세례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 사건이어서 성령세례를 경험한 인간, 즉 중생한 인간은 자신을 새롭게 파악하기 시작한다. 살전 5:19~21에서 바울은 범사에 헤아려 주의 뜻을 분별하는 것을 성령 충만과 긴밀하게 연결하여 설명한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중생할 때 이미 주어진 성령의 인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이해하고, 찾아내어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그리스도인의 중생한 이성과 성령의 인도하심은 순종과 인도의 관계 안에 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이란 성령세례를 통하여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오신 성령의 지속적인 인도와 강권하심을 따르는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으로 복귀되는 것을 뜻한다. 이는 말씀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거하는 삶, 즉 말씀의 인도를 따르는 삶과 다르지 않다.

 

성령 충만에 이르는 삶은 항상 승리하는가? 아니면 항상 절망하는가? 루터적인 신학은 실패를 말하고, 웨슬리적인 시각은 항상 승리하는 삶을 지적한다. 로마서 6장에 우리는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다..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 속에 결정적인 단절이 개입된다. 이것은 죄성의 도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역이 옮겨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안에 여전히 죄의 속성이 남아 있으나,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전적인 지배 아래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의와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와 의의 종이 되었다.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았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죄성으로 인하여 완전한 승리에 이르지는 않는다. 내제적인 죄성으로 인하여 때때로 실패하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실패만 하는 자리에 이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종말론적인 구원의 보증으로 오신 성령을 통하여, 구원의 보증으로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의의 종으로, 의의 병기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 자리에 부름 받았다.

 

제 5부 성령과 교회

 

제 10장 구속의 열매 : 성령의 공동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못지않은 구원사의 대사건이다. 사도 베드로는 요엘서 228~32정을 본문으로 하여 설교한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구약의 예언이 오순절에 역사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놓인다. 그의 설교에 따르면, 성령의 강림과 함께 시작되는 종말론적인 새 시대는 성부와 성자에 의하여 준비되었다. 성령강림은 역사 속에 뚫고 들어온 종말론적인 역사의 보편적인 확장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상징하고, 구원사의 획기적인 전기인 복음의 편만한 증거를 위한 교두보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마련한 것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퍼거슨은 오순절 사건과 바벨탑 사건의 구조적인 유사성을 거론하였다. 바벨탑 사건은 인류가 어떻게 흩어졌는지를 기술하는 것이었다면 사도행전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연합과 결속을 이루었는지를 말한다고 하였다. 마샬은, 왜 하필 그곳의 모인 사람들의 숫자가 120명이라고 보고하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120명이라는 숫자는 그 당시 법에 따르면, 자체 내 재판소를 갖춘 합법적인 공동체를 설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숫자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오순절 사건은 합법적인 공동체가 출범하는, 예수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즉 교회가 합법적으로 출범하는 역사적인 사건인 것이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215절에서 "그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라고 말하여 교회를 마치 인격적인 피조물인 듯이 선언한다. ,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창조된 이기적인 피조물로 교회를 상징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하나 됨을 경험하는 유기적 공동체인 교회를 그렇게 묘사한 것이다. 서로 적대감을 넘어 서로를 용납하며, 교제하는 결정적이고 획기적인 변화가 성령 안에서 비롯되었다. 공동체적인 성령의 임재와 경험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각각은 자아를 주장하는 자로서 머물지 않고, 교회아를 형성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런 유기적이고 인격적인 통합은, 성령 안에서 발생한다. 그 예를 역사적으로 예루살렘교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령께서 예루살렘교회에 임하신 후에 나타난 큰 변화는 그리스도인 각각이 더 깊은 사랑의 교제, 마음 깊은 곳에서 공감된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희년의 성취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를 희년을 선취한 공동체로 파악하는 것은 거의 일반화된 현실이다. 레위기 25장에는 안식일이 희년법의 중심에 있음을 말씀한다. 토지가 반환되고, 노예 해방되며, 부채가 탕감됨으로써 진정한 안식을 향유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회적 부조리와 온갖 사회 악을 일소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누릴 수 있도록 영적 갱신을 시도한다.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이 온 것은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구약의 경우 희년이 안식일 규정에 따라 규정적인 성격을 갖는 반면에, 신약의 경우, 희년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중심 하여 성령의 자유 안에서 행해진다. 희년이 되어 토지와 주택과 백성의 부채가 탕감된다면, 주께서 선포하신 주의 은혜의 해 역시, 인간의 빚을 탕감하여, 인간을 자유케 한다는 점에서 연속성을 볼 수 있다.

 

예루살렘교회는 "땅과 집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필요에 따라 서로 나누어 썼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없는 희년을 선취한 공동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교통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성령께서 창조하시는 새로운 마음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될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현존을 말씀 안에서 경험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새로워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성령 충만한 예루살렘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큰 특징은 신앙과 삶의 통합이다. 성령 충만이라는 것이 통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일상의 일은 세속적인 것으로, 기도와 예배는 종교적인 것으로 나누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의 사람과 예배가 성령 안에서 통합된다. 성령 충만이 신앙과 삶 전반에 걸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런 신앙과 삶의 통합을 통해,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교회를 성장하도록 하신다. 심지어 고난과 핍박까지도 성령께서 사용하신다. 스데반의 순교와 동시에 예루살렘교회는 모진 핍박을 당하지만, 고난당하는 교회의 지체들을 통해 삶의 통합의 능력인 복음은 곳곳에서 더욱 힘차게 선포된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우시고 성장케 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이다. 따라서 성령의 강력하고 주권적인 다스림이 나타나는 곳이 교회이다. 성령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자신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통하는 것뿐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 예수가 주라는 것을 고백함으로써 죄인은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을 이루어 생명과 힘을 공급받는다.

 

고백은 고백에 합당한 삶을 형성한다. 예수님의 잉태로부터 죽으심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과 동행하셨던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성을 전환점으로 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어지신다. 신자들 각 사람 위에 부어지시고, 신자들 각 사람 안에 사시기 시작한다. 그들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사,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시고 신앙하게 하신다. 이 신앙고백공동체는 따라서 그 신앙의 삶에 십자가의 도를 구현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증인으로서, 십자가의 증인으로서, 부활의 증인으로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삶을 규정한다. 성령 충만이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의 도를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부조리하고 불의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삶을 힘써서 살아가게 하시는 영이다.

 

제 11장 성령의 선물 : 공동체를 위한 은사

바울은 말씀을 선포할 때 성령께서 현시하시기를 간절히 열망하였고, 성령의 현시는 설복과 은사를 동반하였다. 은사는 은사로서 독자적으로 그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의 관계에서 그 독특한 의미와 역할이 살아난다. 주권자이신 성령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선물을 은사라 한다. 따라서 성령님을 제켜놓고 은사만을 기대하거나 혹은 성령님과의 사귐은 뒷전인 채 은사 그 자체를 바라보고 그것을 쟁취하려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오순절 성령오심을 명쾌하게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단서는 베드로의 설교이다. 베드로는 요엘 228~32절을 인용하면서 성령오심이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설명하려고 하였다. 성령께서 오시면 자녀들은 예언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으로 나타난다. 누가의 이해에 따르면, 예언의 영으로서 성령은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는 구원론적 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선교적이고 교회론적인 영으로서 구속사를 선도하시는 분으로 일하신다. 예언의 영이 사역하실 때는 항상 은사적인 현상이 동반된다. “예언의 영이 오순절에 임하신 이후로 예언하는 것과 꿈을 꾸는 것과 환상을 보는 것이 동반된 것이다. 그런가하면 ③성령의 충만함에 이르러 방언을 말하는 경우도 있다. 방언도 예언의 영이 부여하시는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 그런가하면 ④예언의 영으로서 성령은 교회의 지체들에게 은사적인 믿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신다. 교회의 성장과 함께, 교회의 필요에 따라, 교회를 위한 봉사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을 성령께서 일으키신다. 이런 의미로 믿음의 은사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예언의 영으로서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 또한 예언의 영이신 성령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능히 감당치 못하게 하는은사적 설교를 하도록 성도를 구비시켰다. 마지막으로 예언의 영으로서 성령께서 기사외 표적을 일으키신다. 그러므로 누가행전에서 성령을 예언의 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구원론적인 성령의 사역과 선교적인 혹은 교회론적인 성령의 사역은 전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건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고 기록한 것이다.

 

예언의 영은 사도행전 238절의 말씀처럼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은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 교회 안에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신앙 고백하는 모든 자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성령의 나타남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순절 성령 오심에서 역사하셨던 성령과 동질의 성령이 다시오셨다는 사실이다. 사도행전 817절에서 누가는 사마리아인들이 받은 성령이 오순절에 임했던 성령과 동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한다. 특히 성령이 내렸다. 혹은 성령이 임하였다는 표현들은, 오순절 사건을 회상케 하기에 족한 것이다. 따라서 한편에서 보면 오순절 성령 오심은 반복적이다. 누구에게나 모든 민족에게 지금도 오실 수 있다. 따라서 예언의 영으로서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질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각각의 시대마다 반복되는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예언의 영을 사모할 수 있다.

 

워필드는 진정한 의미의 표적과 기사는 사도시대로 제한하는 것이 옳으며 동시에 그 사역은 사도직의 종결과 더불어 종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견해를 벌코프도 상속하였으며, 완고한 개혁주의자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입장이기도 하다. 워필드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에 널리 신봉되던 소위 “상식철학”에 근거한 것으로서 그야말로 시대 제약적인 상황에 편승한 견해이다. 계시는 성경과 더불어 종결되었으며, 계속되지 않는다.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가 사건으로서 계시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마치 성례와 설교와의 관계처럼, 말씀 계시가 동반되지 않으면, 그 자체로서 명석한 계시로 기능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말씀 계시가 주어질 때, 표적과 기사가 동반되면, 전달하려는 바가 더욱 효과적으로 경험된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그런 표적과 기사가 동반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고전 2:1~3; 살전 1:5~6) 이것은 21세기 복음 사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씀 사건으로서 계시는 새롭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표적과 기사는 그때와 같이 지금도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은사는 다양하나 몸은 하나다. 은사는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분여하시는 선물이다. 그분이 분여하시기에 그분의 뜻대로 사용되어야 할 무엇이기도 하다.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다신의 성전을 아름답게 단장하고 구비시키는 데 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이다. 선물로 받은 갖가지 은사를 활용하여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서 선한 일에 힘쓰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것이 성령께서 은사를 주시는 궁극적인 이유이다.

 

은사는 직분적 은사와 비 직분적인 은사가 있다.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와 목사와 복음 전하는 자와 같은 은사는 직분적인 것에 해당하고, 믿음과 치병과 능력 행함이나 예언이나 영들 분별과 방언과 통영과 섬김과 구제와 같은 은사는 비 직분적인 것에 해당한다. 이 두 측면의 은사들은 모두가 개인과 개인의 집합으로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데 소용된다. 달리 말하여 은사는 본질적으로 공동체 지향적이다. 따라서 은사의 방향은 근본적으로 섬기는 것으로서 그 진정성이 확인되어야 한다. 더욱이 은사는 성령께서 자신의 가쁘신 뜻을 따라 분여하시는 “선물”일뿐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가진 자는 성령께서 창조한 교회 공동체가 한 몸을 이루도록 한 마음으로 봉사할 뿐이다.

 

제 6부 성령과 그리스도인의 삶

 

제 12장 성령의 공동체의 삶의 원리 : 율법

 

멜랑히톤은 율법을 세 가지로 구별하여 윤리법, 시민법, 의식법으로 나눈다. 시민법과 의식법은 신약시대에 폐지된 것으로 여겼고 심지어 윤리법 조차도 폐지되었다고 보았다. 루터의 이신칭의론을 반영한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칭의론 구조에서는 철저하게 반립한다. 멜랑히톤에게, 율법은 진노를 촉발시키는 권능이요, 번개와 천둥과 같은 것으로 율법이 인간에게 들려지게 되면 죄를 고발하고, 죄를 들추어내며, 이로써 인간의 양심을 낙담케 한다. 반대로 복음은 죄인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살 소망을 불러일으킨다. 율법은 죄인을 용납하지 않으며 정죄한다. 복음은 인간을 칭의하고 인간을 위로한다. 이러한 반립을 철저하게 반영하게 되면 윤리법의 폐지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1,2차 대전 이후 독일인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부담과 책임감이 신학에도 그 영향을 미쳤고, 율법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유럽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 전통에서는 율법을 세 축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율법의 제1용법은 소위 시민법으로서 인간의 지를 고발하고 양심을 일깨움으로써 사회악을 억제하는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2용법은 인간의 영혼을 거룩하신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죄를 들추어내고 고발함으로써 십자가의 구속의 은총이 없이는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기능을 뜻한다. 3용법은 이미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며 살 것인가?라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질문에 대하여,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감사를 표현하는 구체적인 지침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율법 이해는 상당 부분 루터가 강조한 제2용도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인다. 문제는 루터신학의 건설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윤리 부재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데 오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 신앙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 있을 최후의 심판의 순간까지 칭의의 신앙 안에 구축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 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어떤 류의 성화를 위한 일을 하는 것이 곧바로 자기 의를 쌓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시도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의에 거하는 편이 더 낫다는 소극적인 성화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 구조 안에서 인간은 칭의의 대상으로 간주할 뿐이다. 성화를 개혁파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강조하지 않는다. 오직 칭의 하시는 하나님이 있고, 칭의 받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이에 반하여 제3용도를 강조한 것은 사실상 개혁신학의 몫이었다. 남아공의 신학자 베트마르는 칼빈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윤리적 삼단논법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칼빈의 구원 이해의 중심축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로써 칭의와 성화를 나란히 말한다. 칼빈의 이중은혜론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나눌 수 없는 전통적인 분으로서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의 은총에 참여하게 되면 동시에 성화의 은총에도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칭의에서 성화로 수평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칭의가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주어지는 것처럼 성화도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주어진다. 이 구조 안에서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강조되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와 성화 사이의 관계가 신앙의 현실에 있어서나눌 수 없이 긴밀하게 역동적으로 관련된다. 칭의와 성화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두 가지 은총이요, 이 두 가지 은총은 나뉘지 않으시는 한 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상호 환원의 관계에 떨어지지 않고, 칭의만큼 성화가 필수적이며, 성화만큼 칭의가 본질적인 것을 강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칼빈의 실천적 삼단논법이 승인되는 신학적인 구조이다. 따라서 참된 신앙은 그 신앙에 합당한 삶을 그 결과로 가져올 수밖에 없다.

 

자유대학의 교의학 교수를 지냈던 에흐몬트는 개혁파 구원론의 중심축인 칭의와 성화 사이의 필연적인 요소로서 자유를 간파해 냈다.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으로써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는 선언과 함께 양자의 신분을 획득하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 자유로부터 성화를 말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때 자유는 율법의 제2용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제2용도의 모든 요구를 다 준수하시고, 그 의를 그리스도인에게 전가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 율법을 향한 어떤 의무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율법의 의무와 책무로서의 그 무엇이 아니라, 자유에 참여한 그리스도인의 감사의 표현인 것이다. 3용도로서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통합적인 삶의 방향을 보여준다.

 

제 13장 성령 : 영감과 조명과 설교의 인도자

개혁신학의 성경해석과 설교와 성령의 관계

 

오직 성경이 신학의 원천이다. 이것은 개신교, 특히 개혁교회의 경우 아주 분명하다. 그러나 이 원리를 취한다고 하여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여전히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객관적 해석원리요, 둘째는 주관적 해석 원리이다.

 

루터는 그리스도는 성경이라는 수학의 마침표다.” 혹은 성경은 전체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성경 해석을 위한 열쇠는 기독론이라고 보았다. 이 관점은 성경 해석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전망을 열어준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잣대를 제공한다. 기독교 자체 내에서뿐만 아니라 유대교와의 결정적인 관점의 차이 역시 기독론에서 발생한다. 언약의 실체로서 그리스도를 인정하는가 하는 중요한 문제가 여기에 관련되어 있다.

 

개혁신학은 루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성자는 성부와 위격적인 면에서 구별되지만 사역에 있어서 성부의 사역을 지속하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 이것은 이미 성부와의 관계를 전제하는 것이며,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그 중심에 두고 신·구약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론적인 전망으로까지 확장할 필요가 있다. 삼위일체론적인 전망으로 확장한다는 말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통일성 있는 행동으로서 신·구약성경을 언약을 중심으로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언약은 그 실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정하며 동시에 성령으로 인하여 인간의 심비에 새겨질 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루터와 달리 칼빈에게는 율법의 제3용도가 강조되는데,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된 인간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베푸신 은총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대하여, 그것은 십계명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 십계명은 주 하나님의 뜻을 본질적으로 담아내는 것이다. 십계명은 창조 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과 다르지 않다. 창조와 함께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인간에게 밝히 드러내신 자신의 도덕성과 다르지 않다. 시내산에서 새로운 계시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창조와 함께 계시되었던 하나님 본래의 마음이 십계명의 두 돌 판에 명문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을 영감하신 이는 성령이시다.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인 성경은 성령의 주관적인 개입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객관적인 계시인 성경에 성령의 숨결이 불어넣어 졌고, 그 영감 된 책을 읽고 해석하는 자 역시 동일하신 성령의 내주를 가진 자라는 사실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분이시기에,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이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충분하고 명료하게 드러난 책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바빙크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는데, 삼중의 과정을 고려하여야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성령께서 성경의 저자들을 영감하심으로 성경을 기록하였다. 저자들을 영감하신 이가 또한 성경을 영감하셨다. 여기까지는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이다. 하지만 바빙크는 한걸음 더 나아가는데, 21세기의 독자가 그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 저자들을 영감하시고 성경을 영감하신 동일하신 성령이 21세기의 독자를 또한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흔히 21세기의 독자를 향한 성령의 사역은 조명이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바빙크는 이례적으로 주관적 계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성경과 저자와 독자를 가로지르는 분은 성령이시다. 저자를 영감하신 성령과 성경을 영감하신 성령과 독자를 향하여 일하시는 성령은 동일하신 성령이시다. 그 동질의 성령이 독자들에게 임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바빙크는 주관적 계시라는 강력한 단어를 채용한 것으로 보인다.

 

텍스트와 해석자 사이에 의미적 연관을 생성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바른 성경해석을 위해서 해석자는 성경을 영감하신 성령의 인도를 간구하여야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께서 해석자의 해석 과정에 관여하신다는 것이다.

 

조직신학의 성경해석이란 곧바로 설교와 그 맥락이 맞닿아 있다. 사도신경의 순서에 따라 말하자면,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문구는 거룩한 교회와 상도의 교제를 포함한다. 교회는 은혜의 수단인 말씀과 성례가 베풀어지는 장소이다. 이때 “말씀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즉 설교를 일차적으로 의미한다. 따라서 설교란 본질상 성령론적인 것이다. 바빙크는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세 가지 중요한 구별을 제시한다. 루터파의 경우,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말씀을 통하여혹은 말씀 안에서개혁파의 경우 말씀과 더불어재세례파의 경우 “말씀 없이로 구별한다.

 

말씀을 통하여의 경우,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일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이 주장은 첫째,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협력한다는 사상을 전제하거나 둘째, 자동주의적인 생각을 동반한다. “말씀과 더불어는 성령이 말씀에 대하여 주로서 일하실 수 있는 여지를 만들게 된다. “말씀 없이는 외적인 은혜의 방편인 하나님의 말씀 없이 성령이 직접 인간의 내면에 역사한다는 재세례파의 주장을 잘 요약한 표현이다.

 

선포되는 설교의 들음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은혜를 베푸신다. 설교를 통하여 성령께서 신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신다. 설교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이 전체로 증언하는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구원의 은덕이 신자들에게 제공되며, 성령이 주로서 이 말씀을 사용하여 신자에게 은혜를 정용한다. 이것은 말씀 자체가 내포하는 능력을 성령께서 주관적인 현실로 바꾸는 사실이다. , 이해와 설득과 큰 능력으로 신자들에게 주관적인 계시의 사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설교와 성령은 분가 분리의 관계 안에 있는 것이다.

 

제 14장 삼위 하나님과 영성

 

영성이란 말을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파우스투스 폰리츠로 알려져 있다. “유익을 위하여 영적으로 행동하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영성신학이라는 전문적인 용어로 이해되었다기 보다 성령을 좇아 살라는 일반적 의미를 가진 단어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 시대의 신앙적인 분위기 속에서 영성신학이란 것은 가톨릭교회에서 관심을 가지고 형성해온 신학의 한 분야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관점일 것이다. “교리신학”과 차별화 된 것으로 “금욕신학” 혹은 “신비신학”을 뜻하는 단어였다. 자연과 초자연의 관계를 계층적으 이원론으로 파악하고 자연적인 것도 선하고 아름답지만 더욱 아름다운 것은 초자연에 속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구조에서 자연은 그 자체로 선하다. 창조세계는 하나님을 향하여 긍정적인 반응을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상태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등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와 더불어 상실되었던 덧붙여진 은사, 즉 초자연적인 은총을 더하신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인간에게 천상의 영적 세계로 비상할 수 있는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며, 따라서 인간이 그 일에 몰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영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연 상태를 더욱더 발전시키는 것에 해당한다. 자연 상태에 덧붙여진 초자연적인 은사를 통하여 가능성의 존재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통을 추구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반면에 종교개혁의 전통은 자연과 초자연을 계층적 이원론의 구조 안에 두거나 마주 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선하고 아름다웠으나 죄로 인하여 그 선함과 아름다움이 훼손되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이 부패하여 창조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통전적으로 찾아 발견하기가 어렵게 되어버렸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 초자연의 상태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본다.

 

개혁신학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할 뿐만 아니라 강조한다. 이와 동시에 이 세상에 인간의 부패와 타락을 인하여 사망이 왕 노릇 한다는 사실 또한 한 치의 양보 없이 강조한다. 이 두 긴장의 한복판에서 구속이라는 빛이 비춰오는 것이다. 구속은 창조를 긍정하고 이 세상 안에 있는 사망을 향하여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한다. 성경은 구속을 말할 때 기독론적이고 인간론적인 관심사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구속과 함께 창조를 동시에 취하고, 인간론적인 측면과 함께 우주론적인 측면을 동시에 취할 때 그리스도인이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그러한 이해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누어지는 구원과 생명이 더 많은 영역에 미칠 수 있음을 드러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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