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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신학의 양대 흐름 루터신학 vs 웨슬리 신학

이참리 2020. 5. 18.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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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신학의 양대 흐름
국내도서
저자 : 장기영
출판 : 웨슬리르네상스 2019.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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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신학의 양대 흐름 루터 신학 vs. 웨슬리 신학』을 읽고

-창조적 종합(Creative Synthesis) - 종교개혁의 시작에서 종합까지

 

  본서는 개신교 신학의 양대 흐름이라는 제목으로 루터 신학과 웨슬리 신학을 비교하고 있다. 루터 신학과 웨슬리 신학의 단순 비교가 아닌, 개신교 신학의 큰 두 흐름에 대해서 논지를 이끌고 있다. 저자가 서론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개신교 신학의 큰 흐름을 한편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와 칼빈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제외한 교부들과 아르미니우스와 웨슬리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기에 거시적 관점에서부터 미시적 안목에 이르기까지, 두 신학의 거대한 흐름이 어떻게 다르며 어떠한 흐름을 지니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아마도 신학을 처음 접하거나, 한쪽의 신학만을 공부하였던 사람들에게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과거 학부시절 수업시간에 모 교수님으로부터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하였고, 칼빈은 성숙시켰으며, 웨슬리는 종합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루터란이나 칼빈주의자들도 그리 생각할까? 하며 ‘피식’ 웃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지금, 본서를 통해 그 순간 얼마나 내가 무지하였는가를 새삼 깨닫는다. 본서를 읽으며 머릿속에 계속하여 떠오른 단어는 “창조적 종합(Creative Synthesis)”이라는 단어였다. 웨슬리는 종교개혁을 균형과 종합으로 이끌었음이 분명하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 웨슬리는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여 한쪽으로 치우쳤던 교리들을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았다.

“웨슬리는 다양한 기독교 전통 속에 각기 흩어져 존재하던 성경적 진리의 파편들을 녹여 자신의 신학으로 창조적으로 종합해낸 신학적 천재였고, 그의 신학은 루터가 터부시하고 배제해버린 성경적 진리의 중요한 요소를 개신교 신학 내에 다시 회복시키는 성경적 균형을 가졌다.”

 

  책을 읽으며 새롭게 깨닫게 된 두 가지는 첫째, 웨슬리 신학은 분명 성경적이라는 것이고 둘째, 웨슬리가 말하는 바, 삼위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에 그의 구원 사역도 인격적으로 행하신 다는 것이다.

 

  웨슬리 신학은 분명 성경적이다. 결코 사변적이지 않다. 논리의 귀결로 신학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경륜을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원의 은혜를 다양한 장르와 방식으로 여러 관점에서 우리에게 계시한다. 일방적이지 않으며 단조롭지 않다. 성경은 우리가 흔히 복음 제시를 할 때 사용하는 방식으로 구원의 복음을 도식화하여 계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경은 단권으로 이루어져있지 아니하고 66권이라는 다채로움과, 시간과 공간, 그리고 관점의 다양함 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계시한다. 어느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또 다른 본문에서는 인간의 책임을, 어느 본분에서는 믿음을, 또 다른 본문에서는 행위를 강조한다.

 

  웨슬리 신학의 탁월성이 여기에 있다. 사변적 논리의 귀결로 예지예정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경륜적 방법으로 계시를 종합한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인간 행위 구원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한 루터는 노예의지를 말하며 인간의 전적인 무능함을 말하였다. 창세전에 미리 결정해 놓으신 선택과 유기라는 예지예정을 앞에 놓고 신학을 풀어나간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역동적이며 생명력으로 개혁해 나가던 개신교 신학이 그 본래적 성격인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메마른 사변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웨슬리의 신학에는 성경에서 계시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놓치지 않는 유연함과 조화가 있다.

 

“웨슬리가 구원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가르친 이유는, 구원의 최종 근거를 인간의 결정에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으시는 관계의 “궁극적 토대”를 “하나님의 본성과 특징 그 자체”에 두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인격적 응답을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하시기에 그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구원의 “조건”과 “공로”의 구분이었다.”

 

  또한 삼위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신 분이다. 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신 분이라는 말은, 우리의 감정과 의지, 즉 인격적인 응답을 무시한 채 일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주의 백성들을 통해 일하셨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주의 백성들의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며 일하셨다. 출애굽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출애굽 시키셨고, 광야에서도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또 사사시대에 사사를 보내실 때도 그리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며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것을 요청하셨다. 복음 전파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이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성경은 증거 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시며 이루어나가시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데, 그 인격적 응답을 어찌 공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웨슬리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뜻에 인격적으로 순응해야 함을 가르쳤을 뿐, 구원의 공로와 영광을 인간에게 돌리지 않았다. 웨슬리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신앙의 결단과 순종조차도 구원을 위한 “절대적” 또는 “공로적” 가치가 될 수 없다고 가르친 것은, 그가 인간의 행위와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에 사람의 인격적 반응을 원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신자가 섭리 사역의 파트너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가르침은 웨슬리의 다양한 글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 섭리 모두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그 관계를 확장시켜 나가는 능동적 존재가 되기를 원하신다,”

 

  보통 웨슬리를 신학자이기보다 목회자나 설교자로 평가하거나, 그의 신학은 구원론에만 초점이 모아져 있는 현장신학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또 웨슬리를 결국 인간의 행위 구원의 여지를 남겨 놓은 펠라기우스 혹은 반펠라기우스주의자로 여기는 오해들이 있다. 웨슬리에 대한 이러한 오해들은 본서를 읽은 후에는 말끔히 해결될 것이다. 웨슬리는 신학 천재였으며, 어떻게 이토록 조화롭게 표현하였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수많은 구절들을 발견하게 된다. 웨슬리만큼 율법을 아름답고 탁월하게 표현한 신학자가 있을까? 인간의 상태를 어찌 이만큼 정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탁월함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 의지, 믿음과 행위, 이성과 체험 등을 탁월하게 조화를 시키며 종합을 이룬다. 가히 창조적 종합(Creative Synthesis)이라 말할 수 있다.

 

  칼빈이나 루터 신학에 비해 웨슬리 신학이 국내에 비교적 덜 소개되어 접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을 신앙인들에게 참 귀한 책이다. 이제 막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신학생으로부터 한쪽의 신학만 공부해 왔던 신학자 혹은 목회자에 이르기까지 탐독하기에 충분하다. 구원 이후 성결의 은혜를 사모하며 신학적 관심이 있는 비전공자들에게도 권장하고 싶은 책이다. 다년간 연구의 결과물로 우리에게 개신교 신학의 양대 흐름을 정리하여 우리에게 소개해준 장기영 박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목회자로서 늘 옆에 두고 곱씹으며 읽어볼 만하다. 웨슬리가 평생을 두고 고민하며 전하였을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성결의 은혜를 나도 전하며 살아내고 싶은 도전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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