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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시크릿(8장) - 선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행동(레슬리 뉴비긴) 본문

The Missional Church

오픈 시크릿(8장) - 선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행동(레슬리 뉴비긴)

이참리 2021. 1. 5.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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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_선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행동

Mission as Action for God's Justice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 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믿는 것과 따르는 것, 신앙과 순종은 따로 분리시킬 수 없다. 만일 "주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 후에 그 뜻을 이루려는 가시적인 활동을 전개하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따라서 선교사역은, 복음선포를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행동으로부터 결코 분리시킬 수 없다.

 

그러나 때로는 분리시키려고 한 적도 있었다.  예를 들어, 처음부터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다른 활동은 전혀 하지 않겠다고, 순수한 복음전도자만 되겠다고 결심한 선교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단순한 복음의 논리 그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교육, 환자의 치료, 구제사업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활동들도 선교사역의 일환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양한 논리가 동원되었다. 복음전도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지역에서 발언할 기회를 얻기 위하여, 앞으로 본국을 복음화 시킬 강력한 토착 교회를 세우는 수단으로의 활동 들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보다 넓은 복음전도"의 일환으로 묘사되었다. "더 풍성한 삶"(요 10:10)을 위해 가난한 국민들을 위한 현대식 교육과 의료, 농업의 혜택이 풍성한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논리는 과거 백 년 동안 선교사상을 지배해 왔던 식민지 시대의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선교사역은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그들에 비해 덜 발달된 지역으로 건너온 것이었다. 식민지 시대의 선교사들은 1세기의 바울이나 17세기의 선교사들에게는 없었던 문제를 안게 되었다. 이 두경우는 선교사가 적어도 본국만큼 혹은 본국보다 더 발달된 문화로 나아갔던 사례다. 바울은 에베소나 고린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교육봉사나 의료봉사를 제공해야겠다는 의무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바울이 선교사로서 행했던 "표적과 기사"의 사역은 전혀 제국주의적인 색채를 띠지 않았다. 식민지 시대에 수행되었던 이런 선교사역은 식민지 제국들이 해체되는 기간에도 '기술 원조'란 이름으로, 나중에는 '개발'이란 이름으로 계속 이어졌다. '개발'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둔 모든 생각과 행습은, '개발'이 부유한 나라들이 통제하고 주도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다. 

 

교회의 선교사상에 관해서, 1960년대 말 이후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강자가 약자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의 개념에서 탈피하여 가난하고 무력한 자들이 자신들을 주관하는 힘을 이해하고 스스로 해방되기 위해 조직을 만드는 등 자신의 형편을 자각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강력한 운동이었다. 

 

냉전의 시대를 지나는 동안 자본주의의 작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상당히 널리 수용된 편이었고, 심지어 총체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배척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사회 결함을 인식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시간이 갈수록 '개발'과 '저개발'은 동일한 과정의 양면임이 더욱 분명해졌다. 이제는 선진국들이 다른 나라들을 자신들의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서 손을 떼고 착취자들이 그들의 희생자들에 상관하지 않는 일이 요청되었다. 1980년대 말에 그동안 세계를 양분했던 마르크스주의가 붕괴함에 따라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는 이제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이 되었다. 지금은 이를 필적할 만한 가시적인 세력이 없는 형편이다.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종교적 신앙의 차원에서만 그것을 다루고 정복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교회는 이 문가 가장 시급한 선교 과제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I.

 

이제는 하나님의 정의의 이름으로 해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중심으로 삼는 선교학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모세를 거쳐 예수에게로, 그리고 바울과 교회로부터 오늘 우리에게 이른 그 이야기는 결국 혁명적인 운동으로 귀결되는가? 이것이 과연 "구원의 역사"인가?

'해방신학'은 성스러운 역사와 세속적인 역사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구원의 역사는 인간 역사의 핵심이다"라고 주장한다. 초시간적인 "영적" 진리와 시간의 제약을 받는 구체적인 역사 상황을 나누는 이분법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참딘 신학은 관념의 영역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것은 실천(praxis)과 함께 시작한다. 미구에즈 보니노(Miguez Bonino)는 "인간들이 행위자로서 관여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의 바깥이나 위에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한다. 구원은 역사 속에서 행하는 하나님의 행동인 만큼, 진리는 이 행동에 참여하는 일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는 해방신학기 고간념철학의 개념을 사용하는 신학보다 훨씬 더 성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신을 모세에게 계시하는 장면은, 가서 포로 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라는 소명의 형태를 띈다. 하나님은 스스로 해방자 하나님으로 나타내신 것이다. 이 구출은 곧 하나님의 구원이다(출 14:13, 15:12). 구약성경의 어느 곳을 보든지 우리는 선지자들과 시편 기자들이 구원을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의 견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성경의 저자들은 "주님을 아는" 것이 지적인 관조나 신비한 연합과 같은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정의와 자비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과 정의는 별개의 개념이지만, 정의가 부정되는 곳에서는 사랑도 당연히 부정된다. 해방신학의 기본은 진리와 행동을분리시키는 일을 거부하는 데 있다. 출애굽은 대표적인 해방의 패러다임에 해당된다. 그러면 출애굽을 성육신, 십자가, 부활과 어떻게 연관시켜야 할까?

 

전통적으로 출애굽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실현한 내면적이고 영적인 해방을 상징하는 일종의 비오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성경이 일관성 있게 부정하는, 사람의 외면과 내면을 분리시키는 이원론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는 해방을 세 가지 의미로 거론하였다. 첫째,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상이의 갈등에 강조점을 두는 정치적 해방이다. 둘째, 역사 내내 인간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의식적 책임을 떠맡는 지속적인 과정으로서의 해방이란 개념이다. 이를 가리켜 문화적 측면이라고 부를수 있다. 섯째,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인 해방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출애굽을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개인적이고 영적인 해방의 알레고리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정치적 해방과 같은 부류로 간주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 정치적 해방을 원했던 유대인들의 열망과 관련하여 십자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신약성경은 장차 펼쳐질 역사에 대해 묵시적 용어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런 용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우리가 개인적 해방과 정치적, 문화적 해방을 모두 지향하는 "통전적인 복음전도"(holistic evangelism)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만, 실질적으로 어떻게 이 둘을 모두 붙잡을 수 있을까? 해방신학이 가지고 있는 종말론과 인식론은 무엇인가?

 

II.

해방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영적 존재로 보는 관념론적 견해를 배격한다. 서구 문화는 성경적 인간관을 견지한 적이 없었다. 다만 그리스왕 로마 문화에서 물려 받은 이방적인 견해와 불편한 긴장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이었다. 17세기의 종교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진 후에 종교를 인간사의 사적인 부분으로 분류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관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훨씬 쉬워졌다. '종교'는 인생의 특정한 측면, 곧 사적이고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측면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른바 '영혼'과 관계된 것이다. 종교는 역사의 바깥에 있는 '구원'을 바라본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몸과 영혼이란 두 측면을 지닌 단일한 존재로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인류와 세계의 이야기는 한 덩어리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각 사람의 생애는 그 전반적인 이야기의 일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유기물과 무기물로 구성된 세계의 일부로서 다른 인간들가 관계를 맺음으로 비로소 인간다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구약은 철저히 현실주의적으로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다룬다.

 

1.  죽음은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총체적 해방을 바라는 모든 희망을 조롱하는 어두운 신비이다. 죽음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현실주의적이고 통전적인 인간관을 끝까지 견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 버린다. 인생의 의미를 나라는 주체의 장래의 운명에서만 찾을 것인가? 아니면 내가 동참한 인류의 공동생활의 장래에서만 찾을 것인가? 세계의 주요 종교들은 인생의 중요성과 궁극적인 의미를 이 세상과 동떨어진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안녕과 기쁨을 누리는 것에서 찾는다. 이러한 위안은 내 인생이 공적인 역사에 기여한다는 궁극적 의미가 부정되는 대가를 치르고서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고통을 인내하도록 돕는 진통제, 곧 "민중의 아편"을 제공해 준다. 두 번째 선택을 단호하게 탐구한 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였다. 역사 해석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궁극적으로 인류의 공적인 삶의 뜻깊은 미래를 내다보는 구약의 비전에 기대고 있다. 성경적 희망의 세속판인 셈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 경험의 다른 차원에서 완전히 등을 돌림으로써 나름의 일관성을 이루고 있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오로지 만인을 위한 자유와 정의가 실현될 미래에 대한 비전에서만 찾는다. 새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죽는 사람, 그래서 그 시대에 결코 참여할 수 없을 사람의 인생은 그 자체로는 이무런 의미가 없다. 사람은 단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이용당하거나 버려질 운명을 지닌 원재료일 뿐이다.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 주의의 우발적인 결과가 아니었다. 

 

우리는 일종의 딜레마에 빠진다. 역사적 차원의 의미를 부정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개인의 의미를 찾든지, 개인적 차원의 의미를 부정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역사적 의미를 찾든지 해야 하는가?

 

2. 복음은 이 딜레마의 뿌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인생을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 곧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개인의 내면 생활과 개인이 참여하는 공적 생활 사이에 쐐기를 박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어느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자연이 계속 새롭게 되는 순환 과정의 필요한 부분, 곧 단순한 생물학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자연주의적인 모델은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 삶과 공적인 삶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한다.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이란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모든 의미를 부정하는 사건이다. 죽음이란 죄의 삯(wages of sin)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외적 징표이다. 내가 서 있는 장소와 저 지평선 위에 있는 거룩한 도시의 영광스러운 모습 사이에는 깊은 계곡이 가로지르고 있다. 복음이 좋은 소식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고, 그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가 저 너머에 있는 고지로 향하는 길을 열었으며, 그럼으럼으로 내가 갇혀 있던 딜레마에서 나를 해방시켰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나아게 거룩한 도시를 향하여 여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으며, 나는 이 여정의 끝이 나의 개인적 역사와 내가 참여한 공적인 역사가 모두 완성되는 진정한 종착점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 자신과 그의 대의를 완전히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고 계곡으로 인도하는 길을 따라 내려갔다. 예수님은 배척당하고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며, 그의 대의는 패배하고 말살된 것이었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예수와 그의 대의가 정당함을 입증했고, 그를 기꺼이 신뢰하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 도시의 비전이 신기루가 아니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심으로 그 도시의 삶을 미리 맛보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신뢰하며 하나님의 대의를 섬기는 일에 헌신할 수 있고, 비록 그 도시를 건설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의 불로 연단한 뒤에 그 도시의 삶에 참여할 수있게 해주실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 개인적인 삶의 의미와 공적인 삶의 의미 사이에 딜레마에 빠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사회와 역사와 자연으로 구성된 실제 세계의 일부로서 참된 인생을 풍성하게 영위할 수 있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살아계므로 주 안에서 하는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고전 15:58).

 

서구 문화는 이방의 종교성에 사로잡힌 결과, 예수님의 부활이 마치 개개인과만 관계가 있는 것처럼 거론하고 있다. 부활은 흔히 개인의 장래를 보장해 주는 근거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부활은 새로운 세계를 보장해 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바울은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며,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반대하는 모든 것이 멸망하고, 온 우주가 하나님께 복종하게 되는 것도 포함한다(고전 15:20-28). 

 

인간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을 모두 포괄하는 기독교적 소망의 통일성을 가장 완전하게 설명한 대목은 로마서 8장이다. 로마서 8장은 이미 성취된 해방과 함께 시작한다. 이것은 이미 성취된 해방이다. 모든 해방ㅇ이 그렇듯이 이는 정권 교체이다. 성령의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결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선물은 생명과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롬 8:1-8).

 

성령의 정권은 순전히 내적이고 비가시적인 것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전 인격을 새롭게 하는 능력을 발휘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단지 "영적인"(오늘날 "정신적" 이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사용) 사건이 아니었던 것과 같이, 성령의 정권은 몸과 영혼의 이분법을 뛰어넘어 전 인격을 새롭게 하는 것에까지 확장된다(롬 8:9-11). 

 

새롭게된 인간의 특징은 첫째, 종의 영에서 구출되어 자녀의 영, 곧 양자의 영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둘째, 아들은 또한 상속자인 만큼 소망이 있는 것이며, 셋째, 예수께서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는 길을 열었듯이 우리도 그 고난에 동참하라는 소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롬 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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