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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시크릿(4장) - 성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 (레슬리 뉴비긴) 본문

The Missional Church

오픈시크릿(4장) - 성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 (레슬리 뉴비긴)

이참리 2020. 10. 21.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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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성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

행동하는 믿음으로서의 선교

Proclaiming the Kingdom of the Father: Mission as Faith in Action

 

  마가복음은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4-15). 예수님의 전파 내용은 만물의 창조자요 지탱자요 성취자이신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며, 우주의 기원과 의미와 목적 그리고 우주 내에 있는 인간 역사의 기원과 의미와 목적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주의 역사라는 점에서 세계 여러 종교의 경전들 가운데 매우 독특한 책이다. 성경은 인간의 역사뿐 아니라 우주의 역사와 모양과 구조와 기원과 목표까지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자연을 단지 인간 역사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장으로만 보지 않는다. 개인의 참 존재의 비밀을 개인 속에서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국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를 하나님 역사의 큰 들 안에서 조망한다. 즉 하나됨을 이루는 성령 안에서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은혜로운 목적이 완전히 성취되는 지점을 향하여 나아가는 여정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곧 만물을 다스리는 분의 통치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이 곧 우주의 역사라면, 모든 역사는 선택과 생략의 과정을 거쳐 기록되기 마련인데, 성경은 그 선택의 원칙이 현대 역사가들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성경이 우주적인 관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는 각 단계마다 점점 좁아지는 과정을 거친다. 

 

I

인류의 홍수 심판 이후 노아의 이야기에는 하나님이 그의 모든 후손과 물리적 세계를 무조건 축복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제 인류는 최초의 언약적 성례인 무지개 아래에서 출발한다. 노아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말씀을 받는다. 그리고 곧 이어 그 축복의 열매로 '이방인'에 해당하는 70개 나라의 목록이 열거되고 있다(창10장). 그러나 이어서 나오는 내용은 그 나라들이 그들의 힘으로 하나가 되고자 하는 슬픈 이야기이다. 이것은 이후 모든 제국이 감행하는 모험의 원형이 된다. '제국주의'라는 이름은 인류를 하나로 만들려는, 모든 프로그램에 붙이는 호칭이다. 그 이름은 '바벨'로, 니느웨나 로마 같은 거대 도시의 원형이다. 이런 도시의 종말은 한마디로 파탄과 분열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인내하시며 또다시 새로운 출발을 허용하신다. 70개 나라 가운데 에벨의 가족에 초점이 맞춰지고(창 10:25), 그 중 아브라함이 택함 받아, 갈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자기를 부르는 분을 믿고 신앙의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족속을 위한 복의 약속을 받는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전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모든 자손이 그 축복을 전달하는 자로 택함 받은 것은 아니다. 이삭은 택함을 받았으나 이스마엘은 그렇지 못했다. 에서가 아닌 야곱이 택함을 받았다. 범위가 계속 좁혀지고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유다가 선택을 받았다. 

  복의 전달자로 선택받은 사람들은 나머지 모두를 위해 택함 받은 것이다. 노아의 언약은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그 약속된 축복은 결국 모든 족속을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끊임없는 유혹이 있었다. 선택받음은 특권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짊어지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선민이라는 이유로 믿음을 저버린다면, 그들은 벌을 받을 것이라 경고를 거듭 받아야 했다. 

  성경의 관심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그 속에서 인간을 창조할 때 품었던 본래의 목적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다. 투박하게 표현하면, 구속받은 영혼에게 역사에서 벗어날 길을 제공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진정한 목표에 도달하게 하는 하나님의 활동에 괂심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온전히 회복된 인류가 새롭게 된 창조세계 속에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그리는 비전들로 가득하다. 이는 내세에 받을 축복에 대한 비전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행복과 번영(시 82, 144편), 현명하고 정의로운 정치, 정글의 법칙 대신 사랑이 지배하는 자연(사 61:1-9) 등을 바라보는 비전이다. 

  이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인류에게 주어지는 보편적 계시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을 전달하는 소수가 선택되었다. 그들은 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선택된 것이다. 이는 곧 한 인물로 좁아지는 데, 그는 그 인격 속에 우주적 구원을 담고 있는 자요 아버지가 기뻐하는 자요 사랑하는 아들로 칭송받는 자다. 이 사랑받는 아들, 이 선택받은 자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하나님의 통치가 마침내 가까웠다고 선포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다. 

  그 선포에는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지지를 호소하는 운동, 지지도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되는 그런 운동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이며, 예쑤가 아버지로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이 모든 민족과 만물을 다스리는 주권자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임박한 실재, 지금 모든 사람에게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거대한 실재이다.

 

II

 예수님과 하나님의 통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 나라의 권세"가 예수님 안에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를 증거하되 악의 세력을 압도하는 일이 아니라 십자가의 무게를 온 몸에 짊어지는 일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하지만 패배처럼 보이는 그것을 통하여 오히려 승리를 얻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는 비유를 통해서만 선포할 수 있는 실재다. 그것은 감춰진 동시에 드러난 "비밀"이며, 이는 곧 비유의 언어가 지닌 특징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그들에게는 주어졌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수수께끼와 같아서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선택의 원리는 여전히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소수만이 하나님의 목적의 비밀을 전하도록 부름받는다. 하나님의 통치는 능력 있는 모습이 아니라 연약한 형태로 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동시에 감춰져 있기도 한 최고의 행위, 곧 최고의 비유는 바로 십자가이다. 그는 유월절(민족 해방을 기념하는 절기)을 맞아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겸손한 왕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올라가셨고, 온 몸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세력의 공격을 순순히 끌어안게 되었다. 여기에 최고의 비유가 있다. 저주 받아 십자가에 달린 그 죽음 속에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없었다면 과연 어느 누가 이 진리를 믿을 수 있겠는가? 십자가의 약함과 어리석음 속에 담긴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아는 일은 평범한 인간의 분별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혈육"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고전 1:24). 부활은 패배의 역전이 아니라 승리의 증거이다. 그리고 이 증거는 "모든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미리 택하신 증인"에게만 주어졌다(행 10:4). 부활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들은 그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증인이 되도록 선택된 것이다.

 부활은 장차 도래할 추수의 "첫 열매"이기도 하다(고전 15:23). 장차 하나님의 모든 일이 끝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에 복종하게 되고, 만물이 그분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을 보여주는 첫 열매인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나ㅏ나신 것은 그분이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에게 장래에 있을 과업과 약속을 확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애초에 선포된 "좋은 소식", 곧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은 부활에 의해 확증된 셈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의 말과 행위 속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 속에 드러나 있는 동시에 감춰져 있다. 이 통치는 그 비밀을 위탁받은 사람들을 통해 모든 나라에 선포되어야 한다.

 

III

신약성경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에 비추어 세상에서 일어나는 공적 사건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신약성경에서 묵시적 대목들, 마가복음 13장의 '작은 묵시록'과 그 병행구절들, 그리고 요한계시록들은 세계의 공적 역사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채색된 형태로 개관해 준다. 반복해서 나오는 "인자가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병행하는 것은 "이런 일이 있어야"한다는(막 12:7) 역사적 환난과 관련된 주장이다. 즉, 십자가의 형태가 세계 역사의 그림을 가로질러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승리를 즉시 얻어내는 성공적인 싸움에 관한 순조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환난과 신실한 증언,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정한 때에 그분의 방식으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밀을 알게 된 자들은 항상 준비를 갖추고 깨어 있으며 주어진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막 13:32-37). 이 비밀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에게 위탁되었다. 그들은 이 비밀을 만국에 증언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 메시아적 환난을 통하여 이것을 증언할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그들의 본분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일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선교는 행동하는 믿음이다. 그것은 역사의 모든 사건을 가로질러 복음전파와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믿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기도 -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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