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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issional Church

오픈 시크릿(3장) -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레슬리 뉴비긴)

이참리 2020. 10. 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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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the Triune God)

 

권위를 문든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변은 "예수의 이름으로"이다. 그런데 이 답변은 또 다른 질문을 불러온다. "예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이에 대한 자연스러운 첫 번째 응답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엿볼 수 있다. 힌두교에서는 예수를 이생에서 신성을 완전히 실현한 인물(jeevanmuktas)이라고 본다. 이슬람에서는 알라의 사자 가운데 한명으로 간주한다. 현대 서구인에게는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의 한 사람, [타임](Time)지의 '종교'면에는 나오지만, '세계정세' 면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 점에는 부처, 마호메트, 등도 마찬가지다)일 것이다. 

 

인도에서 다양한 단어로 '예수"를 설명할 때, 스와미(Swamy, 주님)로, 사트구루(Satguru, 진정한 선생)로, 아바타르(Avatar, 하나님의 화신)로, 혹은 사람이 된 카다발(Kadaval, 초월적인 하나님)로 소개했다. 이러한 단어들의 공통점은, 예수라는 인물을 힌두교 전통에 의해 형성되고 그 언어로 구현되어 있는 사상의 세계 내에 위치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단어들은 그리스어 큐리오스(Kurios)의 의미를 담지 못한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상대방의 언어와 사고구조를 사용해서 설명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속에 옛구조가 무너지는 사건이 필요하다.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은 혈육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선물이었다(마 16:16-17).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선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이루신 일이다(고전 12:1-3, 요일 4:1-3). 그것은 권위적인 성령의 사역, 곧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문화에 처한 남녀들을 불러 "예수는 주님"이라는 고백을 그들의 문화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하시는 일이다. 교회의 선교는 사실상 교회가 이러한 성령의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는 주님" 이라는 고백이 각 민족에서 그 고유한 언어로 고백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소개할 수 있을까? 마가복음은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마가복음의 도입부, 막 1:1-15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자, 그리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소개되어 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노예상태에서 구출하심으로 통치권을 널리 알리셨다 대대로 이스라엘은 "모든 나라 가운데서 ....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라고 선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시 96:10). 주권자이신 주님이 말세에 그분의 감춰진 왕권을 밝히 드러내어 정의롭게 모든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날이 밝아 왔다고 선언하신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통치가 임할 날을 기다렸지만 잘못된 방향을 바라보며 그것을 찾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선언은 방향을 전환해 다른 길을 보라고 요청하셨다. 한마디로, 회개하라는 선언이었다. 이스라엘은 근본적 방향 전환을 할 때에 믿음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이 비밀이 바로 교회가 "복음"으로 선포하는 "좋은 소식"이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있다. 아바(Abba)라는 호칭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단어였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하셨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교회에까지 전파되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아바라 부르는 것을 우리가 성령에 의해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표시라고 말하였다(롬 8:12-17).

 

3. 예수님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다. 구약에서 성령은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고 사람들에게 능력을 부여해 특별한 사역을 행하거나 계시를 받도록 하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능력이다. 구약의 많은 구절들은 장차 주님의 영이 보냄을 받은 자 위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사야 61:1-2을 자신의 사역을 예견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피하기 위해 회개하라고 촉구했다. 요단 강에서 베푼 세례는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출발을 촉구하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이었을 뿐이다. 진짜가 올 때 그것은 물이 아니라 삼키는 불, 곧 주님의 숨결일 것이다(막1:8, 참조, 눅 3:16-17).

 

요단 강에서의 세례는 단지 출발점에 불과했다. 그것은 예수께서 장차 죄의 무거운 짐을 짊어진 인류와의 하나됨을 행동으로 옮기는 그의 사역에 의해 완성되어야 했다(마 8:17). 그것은 그의 세례가 완성되는 장소인 갈보리에서 완전히 성취되어야 했다(눅 12:50, 막 10:38). 그리고 그의 세례가 완성됨으로써 그가 선택한 모든 사도가 똑같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의를 들고 열방으로 보냄을 받는 길이 비로소 열렸다.

 

바로 여기에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변이 있다. 그는 열방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전달자가 되도록 아버지의 보냄을 받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아들이다. 이분이 바로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세계에 선포했던 예수님이다.

 

1세기 유대교 사고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진정한 실재, 곧 만물의 궁극적 근원은 일상세계를 초월해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시간은 변화를 의미하고, 변화는 불완전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간을 초월한다. 공간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의 영역이고, 이것은 우리에게 절대진리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상 모든 사건은, 초시간적이고 변함없고 감정이 없는 순전한 영적인 실체, 궁극적인 존재의 그림자나 상징에 불과하다. 모든 사유 행위가 이분법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런 세계관 안에서는 순수한 존재와 다른 한편의 일상 세계 사이의 간격을 메워 주는 매체들이 필요하다. 예수를 이 중간층 어딘가에 위치시키는 것은 당시에는 자연스러웠다. 예수는 역사에 몸담은 실제 인간이었던 만큼 궁극적 존재와 동일시될 수 없었다. '아들'이라는 호칭이 종속관계를 의미하므로, 궁극적 존재에서 유출된 어떤 존재이거나 최초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로 이해되었다. 

 

기독교가 시작된 3세기 동안 이야기를 읽어보면, 이런 주제들에 관해 매우 다양한 논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고세계를 대상으로 교회의 지성은 긴 세월 동안 끈질기게 싸웠으며,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C. N. 코크런(Cochrane)는 [기독교와 고전 문화](Christianity and Classical Culture)에서 고전 사상이 로마 제국 아래서 찬란한 부흥을 이룩했다가 5세기 붕괴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5세기에 이르면 장차 천 년동안 서구 기독교 세계의 사상을 형성하게 되는 새로운 세계관이 등장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제공된다. 이 새로운 이해 방식은 삼위일체 교리로 구현되었다. 이 새로운 세계관에 따르면 궁극적 실재는 모든 인간 지식을 초월한 초시간적이고 감정이 없는 단일체로 생각하면 안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초 위에서 감각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 사이의 이분법은 해결된다. 하나님 자신이 실제로 육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께 사랑의 순종이 담긴 완전한 제사를 드린 아들은 그의 아버지가 하나님인 만큼 그 역시 진정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역사의 고난 속에 개입한 것이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이 고난에 동참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와 접촉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롬 8:18-27).

 

만일 우리가 권위의 문제에 대해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응답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리고 그에 따른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응답해야 한다면, 우리는 삼위일체적인 신앙을 담은 말로 응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게시하셨다.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는,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으로서의 선교, 아들의 삶에 동참하는 것으로서의 선교, 성령의 증언을 전달하는 것으로서의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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