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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시크릿(7장) - 복음과 세계 역사(레슬리 뉴비긴) 본문

The Missional Church

오픈 시크릿(7장) - 복음과 세계 역사(레슬리 뉴비긴)

이참리 2020. 12. 17.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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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_복음과 세계 역사

The Gospel and World History

 

예수께서 전파한 복음은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온 인류와 우주를 향한 굿 뉴스이다. 하지만 특정 문화와 특정한 사람, 특정한 장소들과 관련이 있다. 모든 민족 가운데 하나인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이고,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예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언어와 상징들이 동부 지중해의 문화에 속해 있는 만큼, 아프리카나 인도나 일본의 문화와는 생소할 수밖에 없다.

 

이 특수성의 문제는 선교사역의 중심 문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편성을 그분의 특정한 행위와 말씀에 연결시키는 문제이다. 하나님은 만유 위에 그리고 만유 안에 계신다. 참새 한 마리도 그분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행동하시고 말씀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양자는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만일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하는 보편적인 주님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특정한 행위에 대해 적절하게 말할 수 있을까? 보편성을 어떻게 특수성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로마서 10:12-13에, 바울은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끄런데 곧이어서 선교사가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롬 10:14-15). 요한복음 4:24에서는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흔히 종교적 형식이나 의례적 용어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본문으로 인용되는데, 이 구절은 사마리아인의 예배는 무지하며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 4:22)고 주장하는 구절 직후에 나오고 있다. 즉 보편성과 특수성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이다.

 

I.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특별한 선택이 지속적으로 이어짐에 따라 보편적 목적이 실행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창조자요 통치자요 지탱자요 심판자이지만, 모든 민족에게 동시에 또한 똑같이 어떤 계시자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그의 목적을 성취하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위한 축복을 매개하는 한 사람을 선택하는 분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선구자가 되도록 선택을 받았고, 그 것을 통해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을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속을 가져오는 대리자로 선택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온 땅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선택을 받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선택을 받았다(막 1:17). 교회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고 선택받은 공동체이다(벧전 2:9).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다. 다수를 이해 하나를 선택하는, 보편적인 것을 위해 특수한 것을 선택하는 논리이다. 

 

1. 그러나 문제는 인간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운명은 결국 자신만의 것이라는 인간 본성에 있다. 성경에서의 인간은 오직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리고 피조세계의 일부로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하나님의 형상이 이 "사랑의 관계" 안에 존재한다(창 1:27).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과업은 처음부터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되어 있다. 그 과업은 자연세계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다. 진정한 자아를 내면에서 찾으려는 종교와는 반대로 성경은 진정한 인생을 살아 있는 피조세계 속에서 상호관계를 맺으며 영위하는 삶으로, 피조세계를 위한 책임을 서로 공유하는 삶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의 마지막에 나오는 비전은 순전히 "영적인" 존재가 되는 비전이 아니라 "도시"의 비전이다. 도시는 하나님의 사명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수행한 최고의 업적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도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상호관계성과 땅을 정복하라는 사명이 가장 집약된 장소이다.

성경은 참된 인간성을 피조세계를 위해 상호 책임을 공유하는 삶으로 보라고 권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실제 인간들의 실제적인 세상의 견지에서 조망하라고 말한다.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은 단일체가 아니다. 인격 상호간의 관계성이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관계성을 떠난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아무도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는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관계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목적이 특정한 민족의 선택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성경의 주장은 인간 본성에 관한 근본적인 통찰에서 나온다. 만일 각각의 인간을 궁극적으로 독립된 영적 단일체로 이해한다면, 구원은 오로지 각 사람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진 행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일 참된 인간성이 성경의 묘사대로 상호책임성의 공유에 있다면, 구원은 우리를 다 함께 묶어 주고 우리를 참된 상호관계로 이끌어 주고 자연세계와의 참된 관계로 회복시켜 주는 행위임에 틀림없다. 이는 구원의 선물이 우리 상호간의 열린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지붕을 뚫고 들어오는 한 줄기의 빛과 같이 위로부터 우리 각자에게 직접 오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문을 열고 이웃을 초대하는 행위를 통해 이웃으로부터 올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이웃에게 보냄을 받아야 한다(롬 10:14). 축복의 전달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고 선택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 축복은 모두를 위해 주어진 것이다. 성경의 선택 교리는 역사와 자연에 함께 몸담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 교리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에베소서 1:3-4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목적이 우주적 범위를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한 특정 민족을 선택하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연결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염두에 두고 있는 목적은 온 우주(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일이다(엡 1:10).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그분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 것이다(엡 1:4). 이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에베소와 다른 아시아 도시들에 있던 작은 공동체들이 택함을 받고, 사랑 안에서 "예정"되고(엡 1:5),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도록 지명되고(엡 1:12),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의 "비밀"을 깨닫게 된 것(엡 1:9-10)은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분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궁극의 목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 피조세계가 통일되게 하는 것이다.

천지의 창조주요 만물의 지탱자이자 존재 목적인 하나님이 그의 구원을 작은 공동체들 중심으로 펼쳐 나갔고, 그동안 구원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이 선택받은 사람들이 보낸 선교사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었다.

 

2.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딤전 2:4). 하나님이 맺으신 최초의 언약은 아무 조건 없이 모든 사람을 축복하는 것었고 이 인류를 위해 땅을 축복하는 것까지 포함한다(창 9:1-17). 그러나 인간이 오만한 제국주의로 이 축복을 저버리자(창 11:1-9) 하나님은 인류 가운데서 한 가족을 선택하여 모든 민족을 위한 축복의 통로로 삼으신다(창 12:1-3). 이 가족은 나머지 인류에 비해 우월한 면이 전혀 없다. 오히려 성경은 "이방인"의 행실이 더 고상하고 의롭다는 점을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아브라함과 바로(창 12:10-20), 이삭과 아비멜렉(창 26:1-11), 야곱과 에서(창 27, 33장). 그런데 구약은 선택받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은 특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재난에서 면제 되었다는 식의 환상에 빠져 있는 모습을 반복해서 그리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신실한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선택이란 고난과 굴욕을 위한 것임을 배워야 했다. 그들에게 재난이 반복되자 하나님이 언약을 잊어버리고 자신들(백성들)을 버렸다고 생각하고픈 유혹이 찾아왔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결코 자신의 언약을 취소하지 않았다는 것과, 이스라엘을 향한 변함없는 목적은 그들이 증인이 되어 만국에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일임을 상기 시켜 준다. 선택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책임을 지는 일이다. 

 

성경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 놓여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신과 묶어 놓기 위해 할례를 가시적 표시로 삼는 언약을 맺으셨다. 율법과 언약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언약이 출애굽 뒤에 갱신되었을 때, 언약에 '율법'의 가르침이 첨가되었다(갈 3:19에서 바울은 "더해졌다"고 말한다). 언약에 율법이 첨부되었다는 것은 언약에 약속된 축복이 율법의 준수를 조건으로 삼는다는 것인가? 언약에는 양방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언약 관계를 맺도록 선택한 사람들은 실로 두려운 책임을 지도록 부름받은 자들이다. 책임을 수반하지 않는 특권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선택받은 자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언약에서 그들의 몫을 담당한다면, 그들은 언약 밖에 있는 이방인이 갖지 못한 특권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입장을 무너뜨리기 위해 바울은 가능한 모든 논리와 열정으로 무장했다. 아무도 하나님께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하나님은 똑같은 기준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심판하실 것이다(롬 2장). 언약은 계약이 아니다. 그것은 순전하고 값없는 은혜의 행위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은 모든 민족을 포함하게될 보편적인 축복을 값없이 약속한 것이었다(갈 3:8).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조건으로 약속을 제공하는 계약이 아니다. 율법은 본래 언약의 일부가 아니다(갈 3:15-18).

바울은 율법의 역할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갈 3:19-29). 율법은 "범법함으로" 덧붙여진 것이었다. 사실 율법은 하나님에 대해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지 못하게 한다. 고 언약을 계약으로 해석하지 못하게 한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열어 놓은 문 이외의 모든 문을 닫아 버린다. 그리고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덧붙여진 것이다. 장차 성자의 오심으로 가능하게 될 양자의 관계를 내다보며 그것에 의해 대치될 잠정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삼위일체의 영광에 참여하는 삶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갈 4:6, 참조 요 1:14; 17:22-23). 또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제정되었다. 이 사실은 율법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직접 대면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에게 종속된 하나님의 대리자(고전 2:5-8, 롬 13:1-6, 골 2:15)를 대하는 것임을 말한다.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해방된 자들이 다시금 율법이 자신을 주관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갈 4:8)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울의 논리는, 언약을 계약으로 변질시켜서는 안된다. 계약을 성취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는 거래의 관계가 아니다. 언약은 값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받아야 할 무조건적인 축복의 약속이다.

그렇다면 언약은 무조건적인가? 믿음을 조건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바울은 자신의 민족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했다(롬 9:1-3).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 하나님의 언약 백성, 하나님의 사랑받는 민족이다(롬 9:4).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그분이 만드신 것을 다스리는 창조주로서 그 주권적인 자유를 보유하셨다(롬 9:6-29). 사실상 이스라엘은 언약을 계약으로 변질시키는 죄, 스스로 율법을 지키는 것에 기초해 하나님에게 권리를 요구하려는 죄를 범했다(롬 9:30-10:17).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복음을 배척하는 일을 통해 복음이 이방인에게 흐르게하였고, 이것은 후에 이방인으로부터 복음을 되돌려 받게 하기 위함이다(롬 11:11-16). 이방인들도 하나님에게 요구할 만한 권리가 없다는 점을 똑같이 인정해야 한다. 

로마서 9-11장에 나오는 논리를 추적하면 성경이 말하는 선택 교리의 내적 일관성을 가장 뚜렷이 볼 수 있다. 삼위 하나님의 본질인 영원한 사랑의 관계를 반영하는 상호관계성을 떠나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은 선택의 경로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 선택을 받고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아서 다른 누군가에게 구원의 말씀을 들고 가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는 일과 다름 없다. 다른 영혼들과 피조세계로부터 동떨어진 독립된 단일체로서의 "영혼"을 염두해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세계에 함께 참여하고 그 세계를 더불어 책임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엮여 있는 인간을 염두에 두고 있다. 

 

II.

지금까지 설명한 선택의 교리는 결국 '보편구원론'(universalism)으로 귀결되는가? 선택의 교리는 성경적인 세계 역사관을 당연시하고 있다. 즉, 세계 역사는 하나님이 그분의 보편적인 축복의 전달자로 한 민족을 선택하고 부르고 보내는 행위와 같은 일련의 "하나님의 행위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간주한다. 이러한 역사관은 현대 역사학이 말하는 세계 역사관과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1. 성경의 관점은 인류와 우주의 전 역사를 포괄하고 있다. 맨 처음 노아와 맺은 언약은 온 인류를 향한 무조건적인 축복의 약속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도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을 것을 내다보고 있다. 신약성경도 바울은 "온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영입 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명백한 어조로, 다가오는 심판과 버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많이 나온다.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에 나오는 경고의 목소리는 비할 데가 없을 만큼 엄중하다. 

그러므로 성경의 보편주의적인 관점과 심판받고 버림받을 가능성에 관한 명백한 가르침 모두를 굳게 잡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기에 모든 영혼을 구원 할 수밖에 없다는 합리주의적 보편구원론을 배격해야 한다. 이 견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와 책임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 억측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최후 심판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보면, 처음된 자가 나중되고, 자중된 자가 처음될 것이다. 영원한 구원과 심판의 문제는 다른 사람의 운명에 대해 억측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주어진 심각하고 실제적인 문제다. 심판의 경고는 일차적으로 선택받은 자에게 주어진다. 만일 구원받는 자의 수를 수학적 견지에서 주장한다면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그분의 피조물 전체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구원은 온전케 하는 것인 만큼 전체와 연관이 있다. 이를 자기 자신의 영적인 사람에 적용하면 이렇다. ㄱ. 나는 결단코 나 자신의 구원을 하나님의 온 세계의 구원과 분리시켜 생각해서는 안된다. ㄴ. 어느 시점에서든 이웃에 대하여, 이 세상의 일부에 대하여 등을 돌려서는 안된다. ㄷ. 내가 바라보고 갈망하고 장차 기뻐할 목표는 내가 구원받은 사실이 아니라 나의 주님이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게 될" 그것이다. 

다음 두 가지 오류 사이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좁은 길이 있다. 한편으로,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자기 중심적인 불안에 빠지게 하여 온갖 활동과 경건한 습관으로 자신의 운명을 확보하려는 방향으로 나가게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은 잘못된 안심으로, "완악한" 마음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평생 동안 경건한 두려움과 경건한 확신 사이의 긴장을 안고 사는 인생이다.

 

2. 성경의 형식은 우주 역사의 형식이다. 성경에는 기도, 시, 법률, 윤리적 교훈 등과 같은 여러 장르가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담론을 세속적인 역사책에서 읽는 세계의 역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경은 이야기의 세계 속에 몸담고 있다.. 파스칼의 말을 빌리면, 성경의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 성경은 유일무이한 이야기, 우리 인생이 그 일부를 이루는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들이 인생의 일부라는 말이 아니고 인생이 한 이야기의 일부라는 말이다. "영원한 진리들"은 이야기 속 특정 시점에서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사물의 실상을 파악하고 진술하려고 시도한 결과물이다. 즉, 세계의 창조 이전에 시작하고 세계의 종말 이후에 끝나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모세, 아모스, 바울 그리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예수의 이름으로 채색되어 있는 좁은 길로 인도하는 이야기이다. 

현대의 과학적 역사학은 모든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 이야기의 출처는 어디인가? 그것은 목격자로부터 나온 것인가, 아니면 간접적으로 알게 된 것인가? 그 모든 도구를 다루고 정보를 정리하는 일은 인간의 작업이고, 이 작업은 본인의 이해관계는 물론 시대와 장소와 문화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E.H.Carr의 말을 빌리자면, 역사가 계속해서 다시 쓰일 필요가 있는 것은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의 영속적인 대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는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데 어떻게 보편적인 역사가 있을 수 있는가? 한 장소에서 일어난 한 사건의 중요성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것이 될 수 있는가? 이런 일은 그 취지가 계시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계시되었다" 것에는 '조사', '연구', '관찰'과 같은 개념은 적실성이 없다. 모든 자료를 조사하는 일로 시작되는 귀납적인 방법이 여기서는 전혀 쓸모가 없다. 겨시가 아니면 그것을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이런 계시에 기초하여 역사를 보편적으로 보는 일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우리 각자가 몸담고 있는 특정한 문화, 시대, 장소를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결코 판단할 수 없다. 사실상 보편적 역사의 개념은 성경으로부터 우리 문화에 유입된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이런 성경의 틀이 서서히 다른 틀로 대체되기 시작했는데, 목적지향적인 인간이라는 성경적 개념을 계속 유지하면서도 역사의 의미의 담지자를 하나님 대신에 인간으로 바꾼 사상이었다. 그 결과 역사를 인간의 지식과 기술의 점진적인 발전으로,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점차적인 정복 및 옛 전통과 관습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인류 역사의 의미는 결국 이성의 지도를 받는 인간의 과학과 기술이 점차적으로 과거나 현재 인류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옛 전통과 도그마를 이기고 승리를 거두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종교'라고 불리는 인간사의 한 부분에 속하게 된다. '종교'가 중요한 인간 활동으로 인정되는 한(비록 공적 부분이 아니라 사적 부분에 속하지만),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에 관한 이야기는 교과과정 가운데 '종교학' 과목에 위치할 것이다. 반면에 '세계사' 과목에는 그리스 과학과 철학의 발전, 로마의 법률과 정치조직, 혹은 현대의 테크놀로지와 같은 주제보다 훨씬 덜 중요시 될 것이다. 그리고 18세기 이래 계속 그래왔듯이 성경 이야기 자체도 재해석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성경 이야기는 별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전반적인 인류 역사와 동떨어진 특별한 역사("구원의 역사")가 아니다. 인류의 이야기는 상호 연관된 사건들로 구성된 한 덩어리이고, 성경의 이야기는 그 덩어리의 일부이다. 구약학은 메소포다미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등지의 초기 문명을 연구하는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작업과 연결되어 있다. 신약학은 1세기 로마 제국의 종교와 정치와 문화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의 연구와 중요한 발견들(사해사본 등)을 떠나서는 도무지 연구할 수 없다. 그러니까 성경의 이야기 둘레에 따로 울타리를 칠 수가 없다. 그 이야기는 인류 이야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 이야기는 역사학의 모든 비판적 탐구에 열려 있고, 또 열려 있어야 마땅하다. 만일 우리가 신앙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비평가들이 못 들어오게 막는다면, 우리는 사실상 성경 이야기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복음을 하나의 신화로 변질시키는 셈이다. 그러므로 역사학자는 모든 도구를 들고 들어와야 한다.

 

ㄱ.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인류 역사 전체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신앙 고백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안에 계시된 것과 다른 목적을 바라보는 모든 역사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게 된다.

ㄴ. 그리스도인은 성경 이야기를 전반적인 인류 이야기의 일부라고 믿는 만큼, 이 이야기가 모든 역사 기록에 제기되는 비판적 질문에서 제외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ㄷ.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접근할 때 전재는 예수의 첫 제자들 이후 이제까지 신자 공동체를 빚어낸 것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전제를 그 공동체의 삶과 예배와 순종에 동참하는 일을 통해 얻어 낸다,.

ㄹ. 기독교 신앙은 인류 역사 전체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신앙이므로, 이 신앙은 오늘의 실제적인 세속 역사의 맥락 내에서만 고백 될 수 있는 법니다. 성경 이야기와 인류 이야기의 간계에 대한 질문은, 역사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오직 구체적인 행동(그리고 고난)으로 구현될 때에만 다른 모든 역사관에 비해 그것이 진리라는 유효성을 갖게 된다. 

 

믿음의 공동체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선택 받고 부름받고 보냄받은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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