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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시크릿(6장) - 성령 하나님의 증언을 전하는 일(레슬리 뉴비긴) 본문

The Missional Church

오픈 시크릿(6장) - 성령 하나님의 증언을 전하는 일(레슬리 뉴비긴)

이참리 2020. 12. 11.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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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소망으로서의 선교

Bearing the Witness of the Spirit: Mission as Hope in Action

 

선교는 모든 인간 역사와 온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왕권을 선포하는 일이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께서 세계와 인류를 창조하실 때 시작하신 모든 일을 완수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선교의 관심사는 부분적이지 않고 총체적이며 보편적이다. 또한 선교는 예수와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와 왕권이다. 이런 면에서 제한적인 것, 특정한 것, 우발적인 것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왕권은 교회 안에 현존한다. 선교의 능동적 행위자는 교회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고 교회보다 앞서 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 나라의 현존만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고, 그 나라의 선행에 관해서도 말해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모든 선교사상의 성령의 사역이 중심적 역할을 차지한다. '영'(Spirit)은 '바람' 혹은 '숨'이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루아흐(ruach)를 번역한 것이다. 한 사람의 숨은 생명의 비밀이고, 주님의 영(ruach Yahweh)은 인간에게 생명과 능력, 지혜와 말, 지식과 이해력을 주기 위해 표출되는 주님의 생명 극 자체이다. 신약성경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오심과 그분의 언행이 모두 성령의 능력과 직결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첫 대목은 요한의 세례로 시작된 일이 완성되는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한다(행 1:5). 요한의 세례는 다가올 그 나라의 현존을 가리키는 표지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에서 표지와 실제가 만났다. 예수님의 세례는 물과 성령으로 주는 세례였다. 이 둘은 이제 하나이며(요 3:5), 하나님이 합쳐 놓은 것이 다시 나뉘지 않을 걳이다. 그들은 때가 이르러 완전한 세례에 동참하게 될 것인데, 곧 세상의 죄를 위한 세례이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행 1:6)라는 질문은 타당하다. 예수님은 하나의 경고와 하나의 약속으로 대답하신다. 경고란, 죽을 인생들이 그분의 약속을 미리 처리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행 1:7). 약속이란, 제자들이 그 나라의 맛보기요 보증인 선물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선물은 성령의 임재다(행 1:8, 고후 1:22, 엡 1:14). 이 구절들에 사용된 아라본(arrabon)이라는 단어는, 나중에 완전한 액수를 지불하겠다는 약속으로 미리 지불하는 보증금을 뜻하는 상업적 단어이다. 제자들은 현재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승리의 약속은 받지 못하지만, 그 보증금을 주겠다는 약속은 확실히 받는다. 이 약속은 오순절에 성취된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세례 때에 받았던 그 기름부음을 똑같이 받게 된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날이 선지자들이 내다보았던 그 "주님의 날"임을 알고 있다. 마침내 "말세"가 시작된 것이다(행 2:17). 

 

이처럼 교회 선교의 출범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의 활동에 의한 것이었다. 그것은 여전히 성령의 선교로 남아 있다. 선교에서 성령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는 성령이 선교에서 주권적인 사역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도행전 11장에는 베드로가 교회 앞에서 자기 행동을 변호하는 장면이 나온다. 베드로는 성령에 이끌려 그분이 행하는 활동을 목격한 것을 이야기 했고,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 11:17)라는 말로 결론을 내린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선교는 세상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교회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고넬료의 회심과 더불어 교회의 회심도 일어난다. 선교는 단지 교회의 확장이 아니다. 선교는 성령께서 자유로이 세상을 책망하고(요 16:18-21), 또 교회를 완전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요 16:12-15), 성령이 행하는 활동이다. 사도행전 10-11장 이후에는 교회가 전의 모습과는 다른 공동체로 변모한다. 전에는 이스라엘의 문화와 세계 속에 갇힌 공동체 였으나, 지금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은 엄청난 간격을 뛰어 넘어, 이스라엘 언약 밖에 있었던 모든 민족을 포용하는 전혀 다른 공동체로 변한 것이다.

 

성령과 선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의 다른 대목들도 신학적으로 다루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작은 묵시록'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증언 때문에 시련을 당하겠지만 어떻게 변호할지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때에 적절한 말이 주어질 것인데 그것은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기 때문이라고 한다(막 13:11, 마 10:20, 눅 21:14-15). 재판받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변호인으로 요한복음에서는 더욱 발전되어 나타난다. 제자들을 보호하던 예수님이 사라진 뒤에 그들의 곁에 서서 변호할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요 14:16-20). 그분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과 행하신 모든 일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 14:26).

 

이와 같은 선교의 그림은, 강력한 공동체와는 너무도 동떨어 진다. 정반대로 교회는 연약하다. 교회는 논박할 논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차분하게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교회는 스스로 자기를 변호할 필요가 없다. 이 작업을 하고도 남을 만한 자격을 가진 변호인이 있다. 바울은 이 점을 알고 있긱 때문에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10)는 확신을 품고 기뻐하였다. 복음의 진정한 승리는 세상적인 의미에서 교회가 강할 때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멸시와 배척을 받는 등 연약한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킬 때 얻는 것이다.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에 속하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의 현존이지만 그것이 완전히 성취되지는 않은 상태이다. 그것은 말세가 시작되었다는 징표이며(행 2:17), 따라서 우리에게 그날이 올 것임을 확신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성취를 열렬히 고대하게 만들어 준다. 이렇게 성령의 임재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강력한 증언이다. 성령의 선물은 우리에게 장차 완전한 추수가 있을 것임을 보증해 주는 "첫 열매"다(롬 8:22-24).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게 해주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임을 알고 앞으로 완전한 상속을 받을 날을 고대하고 있다(롬 8:14-17). 성령은 하나님의 우주적 사역이 완성될 것을 바라보게 하는 소망의 근원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롬 8:24). 그래서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고(벧전 3:15) 선교적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교를 "행동하는 소망"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교회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통치는 진정 교회의 삶 속에 현존하고 있으나, 그것은 교회의 소유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앞서 가며 우리에게 따라올 것을 요구한다. 길을 인도하며 새로운 문을 열어 주는 분은 성령이고, 교회는 순종하는 자세로 거기에 들어가는 불꽃을 일으키는 일이 필요하다. 선교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므로 교회는 신실함으로 따라가야 한다.

 

선교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이고,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며, 하나님 나라의 선행이다. 교회는 만물을 다스리는 성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이 진정한 만유의 지배자라고 믿는 신앙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모든 인류를 향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에 연합하여 얻게 된 생명 속에 감춰진 하나님 나라의 현존의 비밀에 동참하고자 초대함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이끄는 대로 순종하며 따라감으로, 하나님 나라의 맛보기인 성령의 임재에 의해 주어진 소망을 행동으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에 대한 삼중적 이해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본성에 뿌리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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