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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시크릿(5장) - 성자 하나님의 삶에 동참하는 일 (레슬리 뉴비긴) 본문

The Missional Church

오픈 시크릿(5장) - 성자 하나님의 삶에 동참하는 일 (레슬리 뉴비긴)

이참리 2020. 12. 10.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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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_ 성자 하나님의 삶에 동참하는 일

행동하는 사랑으로서의 선교

Sharing the Life of the Son: Mission as Love in Action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했고, 제자들을 보내어 똑같은 일을 하게 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으나 예수님과 다른 점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뿐 아니라 그 나라의 현존에 대해서 보고 있는 것이다.

 

I.

 

예수님의 선교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뿐 아니라 그 인격 속에 그 나라의 현존을 구현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성경이 유대 환경에서 그리스 환경으로 전환되면서(예수님에게서 제자들로 전환 되면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로부터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으로 언어의 전환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나라의 현존을 자기 인격으로 구현했다"는 증거가 있는가? 예수께서는 이사야 35:5-6과 61:1-2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응답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6)라는 경고를 덧붙이셨다. 주님의 날은 구원의 날인 동시에 심판의 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바로 예수라는 인물의 현존 속에 풍성한 구원의 가능성과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모두 담겨 있었다.

 

모두가 고대하던 구원의 날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이라는 약속에 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약속의 성취를 구현하는 인물이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고 말씀하신다. 세례 요한의 금욕주의와 너무도 대조적인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물음에 혼인 잔치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말씀으로 응답하신다(마 9:14). 선지자들이 약속한 그 잔치가 이미 시작되었으므로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마 10장)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선포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사역을 수행하라는 사명을 주신다. 동시에 믿지 않는 동네나 집안의 먼지를 발에서 털어 버림으로써 그 나라와 함께 오는 심판을 전하는 권위를 그들에게 부여하신다. 예수의 메신저로 보냄받은 행위  속에 그 나라가 현존하고 있고 이는 마침내 축복이나 심판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예수의 현존과 하나님 나라의 현존은 동일시 된다. 즉 예수를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영접과 배척의 문제가 좌우 된다.마 10:32-33)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도 그 나라의 현존을 전하는 자들이다(마 10:46).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마태복음 11장의 말씀이 셈족 언어를 구사하는 환경에서 나온 것임을(언어와 양식과 구조를 근거로) 확증함으로 "요한"의 담론이 마태복음 속으로 영입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논증하였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위탁받은 자로서 그 나라의 축복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 모두를 초대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의 선교와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현존하고 있음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선지자들과 시편 기자들이 내다보았던 "주님의 날", 하나님이 축복과 심판을 위해 결정적으로 개입하는 날이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나라의 현존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의 마감과 함께 끝나는 것인가? 예수 안에 있는 그 나라의 현존은 역사 내내 계속되는 것인가? 

 

1. 예수님이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날이 임박했다고 보았다는 것과, 이는 당장의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2. 신약성경의 가장 초기 문헌은 질서 정연한 교회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 바울은 "말세(종말)를 만난 우리"(고전 10:11)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가장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교회)이 오랫동안 존속되어 온 것은 여전히 종말이라는 것이다.

4.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전수된 그분에 관한 전통에서 가장 오래되고 확고한 요소를 살펴봐야 한다. 고전 11:26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공동체가 맞이할 장래를 미리 내다보고 있다. 그분은 그들과 헤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떡을 떼는 일을 계속하라는 권면을 받고 있다. 그들이 떼는 떡은 그들을 위해 주어진 그분의 몸이 될 것이다. 그들이 나누는 잔은 그들을 위해 흘린 피가 될 것이다. 그들이 공동식사에 반복해서 참여하는 일은 그분의 죽음에 계속해서 참여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분의 승리에도 동참하는 것이다. 

 

제 4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스스로를 아버지께 거룩하게 하고 또 제자들을 거룩하게 하여 자신의 사명을 계속 이어가도록 그들을 세상에 보내는 위대한 기도(요 17장)로 이어지는 긴 담화(요 13-16장)를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섬긴 것과 같이 서로를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요 13:1-20). 그들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그분의 사명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요 17:15-19). 이 담화의 "위치"는 떡과 잔을 놓고 하신 말씀이다. 이것은 만찬의 의미를 잘 설명한 것이고, 만찬을 제정하실 때 하신 말씀을 통해 이 운동의 장래에 대한 그분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분은 이 운동의 장래를 제자들에게 위탁했고, 그분 자신을 그들에게 완전히 내어 주었고, 그들이 그분과 아버지와의 친밀한 연합 속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하셨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선포될 뿐 아니라 그것이 현존하게 될 것이다. 

 

5. 이런 맥락에서 제 4복음서의 저자는 교회가 선교를 위해 파송받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요 20:19-23).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그분의 선교는 곧 그들의 선교가 된다. 그분의 영도 그들의 영이 될 것이다(요 20:22). 예수께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은 그분에게 기름을부었고, 갈보리에서 완성되었다. 십자가는 곧 세례의 성취이다. 예수의 지상사역 기간에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9). 그러나 이제 그 세례가 완성되었고 제자들이 거기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의 선교의 핵심에 있는 권위, 곧 죄를 용서하는 권위(요 20:23)를 위탁받게 된 것이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의 평안을 선물로 얻을 수 있는 길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화, 샬롬,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뿐 아니라 삶으로 그 나라의 현존을 증언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공동체다.

 

II.

 

어떻게 교회를 하나님의 통치가 현존하는 장소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 믿음의 중심에 있는 십자가에서 시작해야한다. 십자가는 신앙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통치가 밝히 드러난 곳이다. 연약함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어리석음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난 곳이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야 말로 복음선포의 의미가 밝히 드러난 곳이다. 여기서의 복음선포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이다. 

 

1. 우리의 지적 능력으로는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한 실재이다. 신앙의 눈은 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그분의 사랑, 하나님의 심판과 그분의 자비, 하나님의 저주와 그분의 축복을 모두 목격한다. 신앙의 눈은 결정적인 사건으로 모든 것이 변하게 되었고, 절대권력을 자부했던 (국가와 법과 전통의) 권세들의 각면이 벗겨져 그 합법성을 잃었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통치가 확림되었다는 것을본다. 교회는 이 사건의 신비를 표현하려고 수많은 상징들을 사용해왔으나-희생제물의 그리스도, 대속물이신 그리스도, 정복자이신 그리스도 등-어느 것도 그 핵심을 완전히 표현할 수는 없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통치가 현존한다는 것이다.

 

2.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므로 역사의 일부이다. 인간사의 광대한 구조 속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시간에 발생한 사건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대상은 영원히 공유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독특한 단일체로 간주되는가, 아니면 그 속에서 인생이 그 의미와 운명을 갖게 되는, 서로 맞물린 단일한 실재로 간주되는 인류 역사 전체인가? 만일 전자가 옳다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우발적 사건은 모든 인간 영혼에게 궁극적인 중요성을 지닐 수는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 속으로 들어가는 길은 모든 사람에게,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 처한 각 사람에게 똑같이 열려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후자가 옳다면, 하나님의 통치 대상이 인간 (그리고 우주)의 역사 전체라면, 그분의 통치 행위는 우리 각자를 우리 모두에게 묶어 주고 그 특성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난 단 하나의 사건이 모든 사람에게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닐 수 있게 된다.

 

3. 예수의 죽음곽 부활이라는 특정한 사건, 곧 한 시대와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은 역사적 사건의 흐름 속에 들어가서 그 과정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통치가 한 덩어리를 이루는 총체적인 역사와 관련이 있다면, 그 사건이 발생한 지 이천 년이 지난 뒤에 사는 우리는 그에 대해서 들을 때, 교회 공동체의 삶에 참여함으로써 그 능력을 공유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르침을 글로 기록하지 않았다. 단지 여러 그룹의 다양한 기억과 해석을 통해 걸러진 형태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예수님의 주 관심사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을 증언할 살아 있는 공동체를 불러내어 자신에게 묶어 놓는 일이었다. 그가 역사 속에 도입한 새로운 실재는 책의 형태가 아니라 공동체의 형태로 역사 내내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뿐 아니라 죽음과 부활의 형태로 그 나라의 현존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것은 단지 어떤 가르침을 계속 전수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 안에 감춰진 동시에 드러난 그 나라의 현존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공동체의 삶 속에 감춰져 있고 또한 삶으로 드러나는 가운데 역사 내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4. 감춰지고 동시에 드러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신약성경이 교회 안에 존재하는 죄를 혹독하게 말하고 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교회의 죄나 배신이나 타협은 맨 처음부터 교회의 중심에 존재하고 있었다. 만일 교회가 역사 내내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반영하는 공동체라면, 그것은 분명 죄 많은 세상에 존재하는 의인의 공동체로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존은 감춰진 현존, 곧 예수의 십자가 속에 감춰진 현존이고, 바로 그 감춰진 상태에서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믿음의 선물을 허락하신 자들에게 드러나게끔 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 안에 현존하고 있었다고,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 속에 현존하고 있었다고 말한다면, 그의 이름을 반영하는 공동체,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고, 예수의 죽ㄱ음과 부활의 역사로 살아가는 공동체 속에도 현존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 공동체는 물론 죄 많은 공동체이다. 그러나 이 고옫ㅇ체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으로 살고 그것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로 연존하고 역사의 한복판에서 활동하며 예수님의 사명이 성취되고 있는 장소이다. 한분이신 성부 하나님과 한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한분이신 성령을 믿기 때문에,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한 교회를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죄 많고 연약하고 분열된 공동체 속에 현존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공동체가 지닌 어떤 능력이나 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이 공동체를 그분의 선물을 전하는 자로 부르시고 택하셨기 때문이다.

 

교회의 중심에는 성찬식이 있다. 이 의식을 통해 그분의 희생적인 행위 속으로 들려 올려지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고, 그분 안에서 또 그분을 통해서 아버지께 거룩하게 구별되고, 세상의 삶을 통하여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증언하도록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는다. 성별 기도(요 17장)에서 성찬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교회는 이 세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현존을 나타내는 공동체인데, 이는 승리주의적인 의미("성공적인" 운동으로서)에서나 도덕주의적인 의미("의로운" 운동으로서)에서가 아니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 속에 있는 그 나라의 비밀을 지금 여기에 존재케 함으로써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속에 있는 그 나라의 비밀을 지금 여기에 존재케 함으로써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죄인들의 공동체 안에서 밝히 나타나는 곳이다. 교회는 예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곳이다. 교회는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서 사랑을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이다. 

 

교회의 공공연한 복음선포나 공적인 봉사를 금지하는 지역은 언제나 있었다. 구소련의 경우 매주 정교회에서 거행된 성찬식과 침례교와 오순절에서 진행된 성경 읽기와 설교는, 하나님의 통치를 부인하는 세계의 한복판에서 그 통치의 현존을 증언한 것이다. 중국의 문화혁명이 한창 진행되는 시기에 기독교 공동체들은 몰래 들판에서 모여 기도하곤 했다. 조용히 하나님의 통치의 현존을 증언하는 일을 통해서 많은 남녀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고 교회는 이전보다 더 강한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선교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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