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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시크릿(2장) - 권위의 문제(레슬리 뉴비긴) 본문

The Missional Church

오픈 시크릿(2장) - 권위의 문제(레슬리 뉴비긴)

이참리 2020. 10. 4.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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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권위의 문제(The Question of Authority)

 

오늘날의 선교사들은, "당신은 무슨 권리로 우리에게 이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까?라는 물음에 직면한다. 이 질문에 대해 성경에 나오는 대위 임명령을 인용하여 대답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교도들은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인류 역사에서 이룩한 업적을 가리켜도 소용없다. 역사적 기록은 애매모호할 뿐이다. 사랑에 이끌려 전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선교지 주민들에게 그들의 전통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촉구하는 일이 진정한 사랑의 행위라는 것은 반드시 삶으로 입증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첫 단계는 그 질문 배후에 있는 숨은 가정을 파헤치는 반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반대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그들이 제기하는 질문 자체에 인간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과 거기에 우리가 반응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어떤 신념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교의 타당성을 다른 어떤 신념-선교활동은 인류의 통일이나 발전이나 해방에 기여한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에 호소함으로써 입증하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선교사역의 권위를 말할 때, 선교사역의 토대가 되는 궁극적인 신념을 제쳐놓고 선교가 다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막 11:28). 예수님의 권위는 누군가로부터 파생된 권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역사의 한복판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권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과연 그 권위를 인식하는 역량이 있는지를 시험하려고 이런 반대 질문을 던진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바로 이것이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막 1:1-4). 

 

마찬가지로, 사도들의 선교사역을 시작하며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는 심문을 받게 되었을 때, 그들이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응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곧 궁극적인 권위를 가리키는 말이며, 그들이 결국은 그 권위에 헌신했다는 것을 밝히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1. 파스칼의 문구를 빌리자면, 나는 내 삶을 예수님이 궁극적 권위라고 믿는 신앙에 걸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신앙고백이다. 이것은 또 다른 헌신의 관점에 입각해서는 증명할 수 없는, 어떤 신앙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이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식으로 "나는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어떤 물리학 진술의 진실성을 믿는 과학자와 같은 입장에 서는 것이다. 화자의 바깥에 있는 실재에 관한 진리를 말하는 것은 바로 본인이 믿는 신앙에 관한 진술이다. 과학적 진술은 그저 수동적으로 화자의 마음에 임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물체의 상호관계에 관한 물체들의 의미를 완전하게 파악하려고 하는 과학 공동체의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 진술은 과학 공동체가 그들 방법의 타당성에 대한 신앙을 견지하면서 노력한 결과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것이 인류의 모든 경험의 의미에 관한 어떤 믿음에 헌신한 것이라는 점에 그 차별성이 있다. 그 의미를 예수그리스도-성육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으며 장차 만물을 다스리게 될-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신앙이다. 선교는 바로 이 공동체가 점점 더 넓은 경험의 영역에서 신앙을 삶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2. 예수님이 최고의 권위이다. 신약성경의 언어를 사용하면 "예수가 주님이다"라는 것이다. 이 고백은 인류의 모든 공적인 삶과 온 피조세계에 관해 하나의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믿음의 공동체가 복음의 이야기 안에 주어진 실마리를 쫓아간다면, 그 동동체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그 사물과의 바른 관계에 대한 참 지식에 도달할 것이다. 자기가 발견한 것에 대한 과학자의 주장과 같이, 이것은 현재 믿고 있는 내용의 진리성은 새로운 발견을 통해 확증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공동체는 그 초창기부터 인류의 공적인 삶 속으로 진입한 운동이었다. 교회는 개인의 구원을 제공하는 공동체가 아니었고, 또 그런 공동체가 될 수도 없었다. 교회는 처음부터 모든 민족의 충성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고 거의 일관되게 스스로를 '에클레이아'(ecclesia)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것은 도시의 공적 사안을 다루도록 부름받은 모든 시민들의 화합이라는 뜻이다. 이 화합의 특징은 그 도시의 장관보다 더 높은 권위에 의해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하나님께 부름 받은 화합(ecclesia theou)이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참석해야 하는 모임이었다. 만일 교회가 개인적인 종교(cultus privatus)의 하나로 취급받는 데 만족했더라면 로마 제국의 핍박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주님이다"라는 선언은 결국 제국의 공적인 종교(cultus publicus)와 충돌 할 수밖에 없는 공적이고 보편적인 주장을 함축하고 있었다. 이 고백은 개인적인 삶은 물론 세상의 철학, 문화, 정치 등을 포함한 삶 전체를 그 고백대로 살겠다고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선교는 세상에서 영위되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예수는 만유의 주님이라는 고백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다.

 

3.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에게 붙들려 그렇게 하라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고백은 위탁받은 것이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여 자신의 일을 하도록 부르시는 분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선택 교리가 나쁜 평판을 받게 된 것은 선택과 부름을 받는 사람들(택함 받는 자)이 스스로를 모든 민족을 위한 수탁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누리는 독점적인 수혜자로 보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선택하고 부르고 보내는 분은 하나님이다. 누군가 무슨 권리로 모든 민족 가운데서 예수를 주님으로 전파하느냐고 묻는다면, 단지 하나님이 선택하여 모든 사람을 위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일뿐이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다.

 

선교는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오해의 소지도 있다. 1952년 빌링엔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는 이 점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 집회 이후, 1960년 대에 나온 선교에 관한 글들은 '하나님의 선교'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다. 이 용어는 때때로 교회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기 위한 의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교회의 선교를 "하나님이 세상에서 행하고 계신 일"을 파악하고 그분과 힘을 합치는 일이라고 보았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종교적인 부분이 아니라 세속적인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치발전과 문화 발달을 지지하는 일과 선교활동을 동일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마오쩌둥의 '어록'이 새로운 경전이 되다시피 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2020/10/02 - [The Missional Church] - 오픈 시크릿 - 레슬리 뉴비긴(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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