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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6장 - 레슬리 뉴비긴 본문

The Missional Church

교회란 무엇인가? 6장 - 레슬리 뉴비긴

이참리 2020. 8. 11.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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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모든 민족을 향한 선교

 

교회는 역사적인 실체일 뿐 아니라 종말론적 실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이 '두 시대의 중첩 기간', 곧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은 사도적 교회가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도록 주어진 시간이다. 참된 종말론적 관점의 함의는 선교 사명에 대한 순종이다. 우리가 신학자로서 세상에 관해 논할 때, 자신의 민족을 비롯한 실제 지구를 채우고 있는 민족들을 의중에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주 비성경적인 것이다. 

 

성경적 기초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종말이 계시되었다. 주님의 날이 도래하였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권세들은 영광의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배척하고 정죄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십자가의 연약함을 통해 그분의 영광이 십자가의 수치를 통해 그분의 의가 십자가의 저주를 통해 계시되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주적 주님이심이 계시되었고, 죽음과 부패와 타락이 모두 파멸되었다. 이 점을 깨닫자,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 1:6)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 나라가 이미 임했다면, 왜 승리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까?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들이 왜 가시적으로 성취되지 않았을까? 무엇을 기다리며, 얼마 동안 기다려야 할까? 이 종말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한 마디의 경고, 한 마디의 약속, 안 가지 사명의 위탁으로 응답하셨다(행 1:7-8), 이어서 재림을 약속하시고 가시적 임재를 거두어 가셨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초림가 재림 사이에 존재하는 교회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한 마디 경고

 

먼저 그리스도는 경고 한 마디를 던지셨다. 때와 시기는 완전히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 나라는 완전히 하나님의 것이다. 그 나라의 승리의 때와 방법도 전적으로 그분의 손에 달려 있다. 최종적 완성과 승리는 역사적 발전의 산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것이기에 그 결정도 주님의 몫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역사의 한계가 무엇인지 모른다. 이 말은 인간의 한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 역사의 한계는 죽음이다. 개인의 죽음, 인간의 공동체적 인격이 구현된 사회 구조의 죽음이다. 이러한 한계들 속에서 인간은 두 가지 헛된 소망을 두게 된다. 개인적으로 살아남으려는 소망 혹은 사회적, 정치적 혹은 문화적 업적이 영원히 남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각각 개인의 삶의 의의와 역사 전체의 의의가 하나로 묶이는 만물의 최종적 완성이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이 극복되었으므로 죽음은 더 이상 역사의 절대적 한계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된 종말과 마주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분 안에서 계시된 종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죽음이라는 한계에 머물러 있고, 믿음으로 육체 가운데 살고 있으며, 반드시 죽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 가운데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한다. 우리에게 그 때나 그 시가를 아는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경고는 우리에게 주어진 땅끝까지 이르러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과 연결된다.

 

한 마디 약속

 

증인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이 임할 것이라는 확신이 주어졌다(행 1:8). 최후의 승리가 아직 나타나진 않았지만, 성령의 선물을 그 승리가 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가 된다. 우리가 그분 안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다가올 시대의 권능을 미리 맛보는 일이다. 

 

한 가지 사명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있는 현 시대의 의미와 목적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사도적 증인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다. 때와 시기, 이 세상 역사의 한계에 관한 그들의 질문에 대한 응답은 한 마디로 사명의 위탁이었다. 

 

물러가심

 

사명을 주신 다음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 앞에서 떠나시면서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곁에서 다스리시기 때문에, 새 시대의 권능, 성령의 권능이 부어진 것이다. 그분은 왕좌에 앉아 계신다. 그러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된다. 이 전쟁에서 교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민족을 믿음의 순종에 이르게 하며, 세상의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는 도구로 활약한다(고후 10:3-5; 롬 1:5; 엡 3:8-11).

 

집합적이고 우주적인 구원의 함의

소망의 긴장

 

복음서가 말하는 구원, 교회의 본질과 기능을 결정짓는 그 구원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온전케 하는 것, 곧 치유라는 뜻이다. 이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만물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모습대로 사람과 하나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모두 회복하는 포괄적인 것이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완전한 사랑의 연합을 좇아 온 창조 세계가 하나로 회복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회복이다. 

 

여기서 보편적이라는 단어는, 구원의 본질이 그 근원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손을 뻗치는 사랑,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려고 온갖 수고를 다하는 사랑, 갈보리의 열정으로 반역자와 배신자를 배려하는 그 사랑이 바로 그 근원이다. 둘째로, 사적인 '구원'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사랑의 열정이 모두 식을 때까지, 그분이 온갖 진통을 다 겪고 만족하실 때까지는 기쁨과 안식이 없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구원의 본질이 이러하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구원은 하나의 맛보기요 담보일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과 더불어 죄스러운 옛 질서에 몸담고 믿음으로 육체 가운데 살아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은 모든 형제와 더불어 의로운 새 질서에도 몸담는 것이다. 그분의 몸 된 교회가 다함께 구원을 누릴 때까지는 그것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옛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서, 옛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몸소 체험하는 그 긴장은 미완성된 선교 사역의 긴장이라 할 수 있다. 

 

선교의 과업

 

구원은 집합적이고 우주적인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역사상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 발생한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서만 계시될 수 있다. 집합적이고 우주적인 특성을 지닌 구원, 곧 인간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자연 등 모든 깨어진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는 일은 조화로운 관계를 실제로 구현하는 어떤 공동체를 세움으로써 전달되어야 한다. 화해의 복음은 화해를 이룬 모임에 의해서만 전달될 수 있다. 그 메시지는 먼저 가시적 중심지에서 시작하여 다음 중심지, 그다음 중심지로 퍼져 나갈 것이다. 이 과정은 각 중심지가 다음 중심지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가 되도록 선택받았다는 법칙에 따라 진행된다. 

 

담보와 증인으로서 성령

 

교회의 본질과 관련된 종말론적 요소와 선교적 요소의 상호연관성을 성령의 교리와 연관시켜 설명할 수도 있다. 우리가 아직 옛 아담과 유대하고 있는 기간인 현시점에, 새 시대에 받을 유산의 첫 열매요 담보로서 성령이 주어졌다. 성령에 힘입어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과 믿음 안에서 교제를 나눌 수 있고, 성자 하나님과도 교제를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장차 완전히 나타날 그 승리에 현재 참여하게 된 것도 성령을 통해서이다. 아울러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다. 성령이야말로 예수의 참 증인이시고, 권능의 사역을 불러일으키시는 장본인이시기도 하다. 우리를 땅끝까지 보내시는 분도 성령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그 구원을 어느 각도에서 보든, 거기에 함의된 바가 곧 세계 선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목적의 최종적 성취는 세계 선교의 완성을 통해 이뤄진다. 

 

교회의 본질적 요소로서의 선교

 

구원의 본질에 관한 이 진리는 교회론의 결정적 요소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그분의 재림 때 완성될 그 구원과 관련이 있다. 그 완성은 온 세상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교회는 그 구원을 지고 온 세상으로 가는 행위 속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선교로 존재하는 것은 불이 타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다."(-에밀 브루너) 그분 안에서 나누는 '코이노니아'는 세상을 향한 그분의 사도직에 참여하는 일이다. 

 

이 논재가 옳다면, 지금은 교회의 본질에 관한 에큐메니컬 토론의 함의를 현실적으로 직시해야 할 때다. 교회의 일차적 본질과 이차적 본질을 둘러싸고 이제까지 논의된 가톨릭과 개신교의 토론에서, 교회가 선교적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교회의 이차적 본질뿐 아니라 일차적 본질까지 상실하게 된다고 경고하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는 교회가 선교적 정체성을 상실하면 신약 성경이 말하는 그 찬란한 호칭들을 받을 자격을 잃게 된다고 말해야 한다.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역할을 실제로 수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호칭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교회와 선교회의 이분화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선교회'를 서로 다른 유의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예배와 교인들의 영적 보살핌 및 양육에 전념하는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선교회'는 복음 전파에 전념하는 공동체로 회심자를 '교회'라는 안전한 보관소에 넘겨주는 단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이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상징은 WCC와 IMC(국제선교협의회)가 나란히 공존하는 것이며, 이 둘은 대체로 일꾼은 공유하지만 하나가 되지 못한다. 이 둘이 하나가 되려면, 교회가 세상을 위해 그 모든 보물을 위탁받았다는 것과 선교가 교회의 삶의 핵심에 속한다는 진리를 깨닫고 일상의 삶으로 실천할 때 가능하다. 

 

선교 사역의 확장에 대한 이해

 

범세계적으로 선교 사역을 의무로 받아들이는 교회마저도 선교의 의무를 교회의 일차적 필요를 충분히 채운 다음에 수행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나오는 전략은 한 지역을 완전히 끝낸 후에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기보다 단번에 온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기로 작정하는 식이다. 유대인의 회심이 이방인 선교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방인의 개종이 유대인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통로라고 확신했다. 이 모두는 기독교 선교를 보편적이고 종말론적인 구원의 표지요 도구로 보는 개념과 완전히 부합한다. 즉, 선교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다는 징표이다. 이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인 그 나라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향하는 교회

 

종말론적이고 선교적인 관심을 잃어버리면, 교회의 할 일은 각각 사람을 이 악한 세대에서 구출하고 다가올 세상을 위해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이 팽배해지면 교회의 일차적 의무는 자기 교인을 돌보는 일이 되고, 바깥에 있는 자들에 대한 의무는 이차적인 것으로 밀려난다. 교인 개개인을 그저 교회가 집행하는 은혜의 방편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는 존재로 보는 목회 개념이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근본적인 오류는 시종일관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구원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

 

처음 세례를 받은 신자의 경우 먼저 교인 교육을 받은 다음에 선교 책임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선교의 책임을 이행하는 가운데 교인 교육이 이루어진다. '신앙 강화'(Consolidation)는 진전의 대안이 아니라, 반대로 진전이 신앙 강화의 방법이 될 것이다. 

 

교회-수단인 동시에 목적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는 지나치게 교회 중심적인 선교 사역 개념이 위험함을 지적하였다. "교회의 본질은 그 기능으로 충분히 규정지을 수 있다. 바로 그리스도의 사도적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는 교회 자체를 하나의 목적으로 보는 관념을 반박하면서, 그것을 순전히 도구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의 맛보기이므로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로 그 유산을 증언할 수밖에 없는데, 교회의 삶이 그 진정한 맛보기요, 하나님 자신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또한 구원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수단은 구원의 본질 자체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구원이란 온전히 만드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치유하는 것이다. 

 

교회가 선교적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그 본질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참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지니지 않은 선교회는 하나님의 사도직을 대변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선교와 연합

 

교회의 선교와 교회의 연합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교회의 연합은 세상으로 하여금 믿게 하기 위한 것이고, 증언 행위는 교회를 그 분열된 모습 그대로 보여 주게 된다.

 

연합에 의존하는 선교

 

진리를 행정상의 편의에 종속시키는 종류의 연합, 성령이 주시는 감동이 아닌 다른 유의 감동을 세상에 주려는 시도는 본질상 잘못된 것이다. C. S. 루이스가 보여준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이 순전히 영적인 지옥의 눈에는 가장 충격적이고 저급한 에피소드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바로 교회의 본질을 지배한다. 교회는 곧 성육신의 사명에 세상에서 계속 수행하는 기관이다. 주님은 교회와 하나님 그리고 교회와 세상을 서로 뗄 수 없도록 묶어 주신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교회 연합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곧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하나로 통일하는 그 구원의 표지요 도구인 것이다. 

 

교회가 분열되어 있는 한, 그 삶은 공공연하게 복음에 정면으로 배치될 수밖에 없다. 주님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대속 행위도 하니요, 우리를 그 대속에 참여하게 하는 세례도 하나뿐이다. 이 믿음과 세례를 공유하는 우리가 다함께 한 친교 모임으로 묶이기를 합의하려 하지 않거나 그 능력이 없다면, 그 대속의 충분성을 믿지 않는다고 공공연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를 위해 완전히 버림받은 장소에까지 내려가신 그분과 함께 기꺼이 내려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믿을 수 있도록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교회의 근원인 그리스도께 돌아가자고 요청하는 것이다. 

 

선교에 의존하는 연합

 

선교 명령에 대한 순종은 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그 분열상을 확연히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현대의 교회 일치 운동이 현대 선교 운동의 부산물이고, 그 주된 추진력이 선교 운동의 확장으로 옛 기독교 세계 바깥에 설립된 교회들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선교 사역에 참여할 때는 진정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도적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로, 모든 교회가 온 세상을 그리스도께 순종시키기 위해 선교의 책임을 새롭게 받아들이도록 요구해야 한다. 둘째로, 힘이 닿는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 과업을 수행할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협력하도록 그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 셋째로, 모드 곳에서 교회의 재연합 운동을 지치지 않고 열심히 추진해야 한다. 이는 곳곳에서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이 가시적 연합을 이루는 일, 곧 아버지와 성령과 더불어 모든 영광을 돌릴 그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하나로 통일되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요 표지인 한 교회로 연합하는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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