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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5장 - 레슬리 뉴비긴 본문

The Missional Church

교회란 무엇인가? 5장 - 레슬리 뉴비긴

이참리 2020. 7. 3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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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영광의 소망

 

그리스도의 몸으로 영입되는 것은 종말론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교회를 정의할 때 교회의 현 모습에 입각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롬 4:17) 하나님의 자비에 입각해야 함을 일러준다. 

 

성경적 기초

 

성경은 연합에 관해 묘사할 때 아주 풍부한 이미지들을 사용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다. 그분을 머리로 모시는 몸이다. 그분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다. 그분은 신랑이시요 우리는 신부다. 우리는 마치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것처럼, 한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영적으로 주님과 합했다. 우리는 성전이고 그분은 모퉁이의 머릿돌이시다. 우리는 한 가족이고 그분은 맏형이 되신다. 우리는 새로운 인류이고 그분은 새 아담이시다. 그분은 영생을 주시는 하늘의 양식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먹는 자들"이고, 그분은 실로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 이처럼 풍부하고 다양한 표현이 상기시키는 바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이 신약 메시지의 핵심에 속한다는 점과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따로 떼어 그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낸다고 해서 이 연합의 교리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 연합의 특징은 그리스도의 죽음 및 부활과의 연합이다. 마스칼 신부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인, 교회](Christ, the Christian and the Church)라는 책에서 인간 본성의 재창조를 인간의 본성과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그 말씀의 인격과의 연합에서 찾을지, 아니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의 죽음과 연합에서 찾을지를 묻는다. 아니면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의 죽음과의 연합에서 찾을지를 묻는다. 둘 다 필요하다고 답하지만, 대부분 전자를 더 강조한다. 하지만 신약 성경은 후자에 압도적인 비중을 두고 있다. 신약 시대 이래 현재까지 모든 그리스도인이 보편적으로 동의하는 바는 세례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죽음 및 부활과 연합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할 때, 그 중심에는 바로 죽음이라는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관념적인 역살이 아니고,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 아래 골고다에서 일어난 실제적인 죽음, 우리 속에 있는 옛사람의 죽음, 만물의 실제적인 해체이다. 

 

현재와 미래의 그리스도

 

성육신한 하니님이 말씀이신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셨고, 하나님의 율법을 맡은 공인된 선생들에게 정죄받으셨고, 자신이 선택한 사도들 중 하나에게 배신당하셨고, 나머지에게는 버림받으셨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에게 정죄받으셨으며, 이방인들에게 일반 범죄자로 처형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사건을 예견하시고 해석하셨으며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 이끌 것이라고 내다보셨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시대의 승리는 이 시대가 패배라고 부르는 것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성육신을 통해 새 시대가 현시대를 뚫고 들어왔고, 이로써 시작되는 구속의 움직임은 이 세상의 역사를 따라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성육신의 연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떠나심으로 그분의 모든 양이 흩어질지라도(막 14:27; 요 16:32) 떠나셔야, 그분의 사역이 지속될 수 있다(요 16:13-14, 20; 21:1). 

 

새 시대와 현 시대, 하나님의 통치와 이 세상 왕의 통치가 부딪히면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인간 본성을 취하고 인간의 삶을 영위함으로써 스스로를 이 어두운 세상의 권세들에게 노출하셨고, 그들은 힘을 합하여 그분을 파괴했다. 그러나 이로써 그분은 자신의 몸에 죄의 저주를 모두 짊어지셨고, 하나님의 의를 밝히 드러내셨으며, 우리를 쥐고 있던 사탄의 손아귀를 부숴 버리셨다. 

 

하지만 이 승리는 감춰져야 한다. 그래야만 믿음, 소망, 사랑의 자발적 반응을 보일 여지가 남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나타날 때는 모든 반대 세력을 말살시킬 것인데, 하나님이 자비롭게 그 날을 연기하시는 것은 사람들로 회개하고 믿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오실 그 날까지, 그분의 통치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완전한 향유가 아니라 맛보기로만, 완전한 계시가 아니라 자기보다 더 큰 실재를 가리키는 표적들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든 표적의 근거가 되는 궁극의 표적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다. 이는 신적인 사건으로, 이를 계기로 교회가 탄생했다. 그날 아침 무덤이 비어 있지 않았더라면 교회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장차 이루어질 추수의 첫 열매, 맛보기이기도 했다(고던 15:20; 행 26:23; 롬 8:11). 그곳은 우리가 거듭나서 장래에 유산을 받으리라는 산 소망을 품게 된 장소이기도 하다(벧전 1:3). 

 

표적의 목표는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일이다. 장차 다가올 어떤 것을 열렬히 갈망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맛보기다. 그래서 주님은 승천하실 때 다시 오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시면서 그동안 모든 나라로 가서 회개와 믿음의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그들은 나가서 승리를 선포해야 하지만, 이 승리는 아직 베일에 가려 있다. 가려져 있으나, 믿음으로만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는 표적에 의해 현존한다. 

 

신자 -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사람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행위와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며 우리를 그분의 지체로 만드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의 오감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스스로 물러나시는 대신 그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셨으며 이 성령으로 그분은 새로운 방식으로 그들 가운데 임재하셨다. 제자들은 더 이상 그분을 눈에 보이는 대로 또 육신에 따라 알지 않으며, 그분의 영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성령을 '갖는' 것은 진짜 소유하는 것인 동시에 일종의 맛보기에 해당한다. 그것은 장차 이루어질 것을 미리 보여주는 담보다. 성령은 최후의 승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성령은 우리가 장차 나타날 그 나라의 상속자임을 보증하신다(롬 8:7).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쫓아 사는 삶은 시종일관 이중적 특질을 지닌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우리 생명은 그분과 함께 감춰져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땅에 속한 지체의 일을 죽이고 위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나, 여전히 부활을 고대한다. "아빠, 아버지"라고 외치지만, 여전히 자녀로 입양될 날을 기다린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지만, 여전히 혼인 장치를 갈망한다. 그분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외친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영위하는 교회의 삶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은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이 아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선포된,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며, 죄의 저주를 대신 짊어진 거룩한 사랑의 심판에 대해 영혼이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 설 때 내 영혼이 받게 되는 이 죽음의 선고는 동시에 육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신다. 나는 그분의 몸의 지체요, 그 부활의 생명에 동참하는 자다. 

 

이것은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삶이지만, 동시에 나의 삶이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고 있다. 여전히 보통 인간이다. 그러나 나는 믿음 안에서 살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신 셈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신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해야 마땅하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살아 있다. 그러나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지만,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서는 우리의 삶 혹은 우리 안에서 살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삶은 역설이 아니고는 도무지 묘사할 수 없다.

 

삼중적 역설

죽음을 통한 생명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그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그분의 부활에도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은 관념적 역설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실제적인 사실과 그에 상응하는 사실, 곧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죄스러운 자아를 죽을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미 가졌으나 아직 가지지 않은

 

성경은 하나님의 통치가 계시되는 것을 다가올 시대가 그 권능을 안고 현시대에 뚫고 들어오는 것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현시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다가올 시대의 권능이 작동을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가올 시대일 뿐이다. 따라서 이 두 시대가 이 세상과 각 그리스도인의 영혼 안에서 서로 겹치고 싸우는 것이다. 

 

기독교적 시간관은 무엇인가? 미래가 이미 현존한다고 말하면, 당연히 시간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라고, 또 소망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필수 요소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힌두교는 보편 역사에 어떤 목적이 존재할 수 없는 순환적 시간관을 갖고 있는데 반해, 성경은 직선적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만일 성경에서 미래가 현재를 뚫고 들어왔다면, 그 선이 적어도 심하게 뒤틀렸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기독교 학자들은 영원한 삶의 개념을 시간과 관계없는 삶으로, 역사상 모든 시점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마스칼 신부는 "영원이란, 시간의 양식이 우리에게 고유한 것처럼, 하나님께 고유한 삶의 양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요한이 뜻하는 '영생'이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피조물로서 신적인 영원한 세계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므로 시간을 실제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시간을 초월하기도 한다. 시간 안에 있으면서도 그 흐름 속에 머무를 수 없고,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시간의 길이를 수축하여 단일한 사고의 범위 내에 둘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실제적인 의미에서, 과거와 미래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분적이고 파생적일 뿐이다. 

 

하나님은 시간의 창조주이심으로 그분은 완전한 의미에서 시간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의 창조물이 그분에게 실재하는 것처럼, 시간도 그분에게서 실재한다. 물론 그분과 시간의 관계는 사람과 시간의 관계와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시기와 절기를 정하시고 마지막을 처음부터 예견하시는, 시간의 주인이시다. 

 

영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실미라 하나를 안식일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완수하셨을 때 안식을 취하신 날이다. 시간은 하나님의 노동의 양태이고, 영원은 그분의 안식의 양태이다. 둘 다 똑같이 실재한다. 하나님은 일이 완수될 때까지 쉬지 않으신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영원은 아직 장래에 속한 것임이 분명하고, 우리는 그것을 갈망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갈 안식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히 4:3, 10). 이것은 끊임없는 노동과 긴장 가운데 있는 안식이며, 그 긴장을 이른바 소망이라 부른다. 이것은 현시점에서 영생의 경험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시므로, 그분 안에는 다가올 시대의 권능과 죄인들의 반대를 견디는 일, 영생(다가올 시대의 삶)과 현시대의 삶에의 완전한 참여가 모두 존재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도 양자에 모두 참여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인격적 관계의 문제이다. 그분과 진정한 교제를 나누는한,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할 안식을 고대하는 일에 동참한다. 동시에 이 시대에 살면서 그분의 고난에도 동참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소망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인간적 갈망이 아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 자신의 삶에 뿌리를 두고 그분의 약속에 기초한다. 그분이 그것을 약속하셨다는 것을 알기에 소망하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살기 위해 죽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려면 죄스럽고 자만한 자아가 죽어야 한다. 새로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옛 생활의 소생이 아니다. 그것은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삶이다. 그때가 되면 그리스도 중심적인 자아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말살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인간의 진정한 모습이다. 참된 형상으로, 마지막 아담의 모습으로 재창조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실제로 죽어야만 성취될 수 있었던 것처럼, 옛사람이 죽는 것으로만 묘사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재창조된 자아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자아이므로 참된 자아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다운 사람의 진정한 삶은 자신의 바깥에 중심을 둔 삶,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다. 이를 자기중심적인 자아의 관점에서 묘사하자면 역설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신 삶, 신자의 삶과 그리스도의 삶이 서로를 침투하는 삶이다. 그분과 나의 인격적 관계, 곧 나를 위한 그분의 사랑으로 형성되었고, 내가 그분을 믿고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그분과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게 되는 관계이다. 

 

교회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와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되는 공동체다. 그 사랑에 의해 별개의 존재인 그들이 사랑 안에서 서로를 침투하는 공동체, 아버지의 영광이 되는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교회의 궁극적인 역설은 서로 자아를 잃어버림으로써 사랑받는 상대방 안에서 그것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침투하는 관계인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이해할 때만, 종말론적 중첩(eschatological overlap)의 역설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다가올 시대의 능력을 맛보는 일, 영원한 삶을 미리 맛보는 일이 가능하다. 장차 올 것을 미리 맛볼 수 있는 이유는 현재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 육체 가운데 형성된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가시적인 것이 아니며, 믿음으로 맺어진 것이다. 

 

육체 가운데 사는 삶은 그분을 믿는 믿음의 삶이어야 하고, 그 믿음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몸을 내어 주신 그분에 대한 신뢰인 동시에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믿는 확신이다. 이 소망은 바라는 것의 실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을 보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

 

교회의 삶 - 믿음, 소망, 사랑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삶은 아주 독특한 초자연적인 삶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의 진정한 특징은 거룩해질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더 깊이 깨닫고, "모든 성도와 더불어" 완전한 성화에 도달하기 위해 더욱더 갈망하고 달려가는 모습이다. 이 역설은 교회의 존재가 지닌 역설도 잘 보여준다.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야 말로 교회를 세우거나 넘어지게 하는 신조라고 말했다. 교회는 거룩한 동시에 죄스러운 공동체다. '육체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참된 거룩함은 자기 의를 모두 포기하고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던지는 데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교회를 거룩하면서도 죄스러운 것으로 보는 성경적 교회관을 , 영적인 교회와 물질적인 교회 혹은 비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로 구별하는 교회관으로 대치했는데, 이는 자신의 놀라운 통찰을 저버린 것이다. 교회를 이런 식으로 구분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르스도 안에서 그분의 것으로 용납되는 동시에 여전히 죄인이라는 종말론적 긴장을 완화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바른 교회 개념을 율법주의적이고 바리새주의적인 개념으로 대치하고 만다. 

 

최후의 심판은 마지막 날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 때가 이르기 전에는 아무것도 심판하면 안 된다. 교회 안에 일종의 참 교회가 있다고 추정함으로써 종말론적 긴장을 완화하려는 시도는 모두 숨겨진 바리새주의와 마찬가지다. '위선적인 신앙고백자'나 '명목상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라는 식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창조된 존재이므로 그분과 관계를 맺을 때에만 참 인간이 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의로움이 전가되는 것인지 부여되는 것인지(imputed or imparted)에 관한 교회 본질의 논의는 아무 쓸모없는 말싸움에 불과한 것이다. 교회의 삶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으로, 교회는 스스로 서로에게 내어 주는 삶으로 충만하고, 아무도 자신의 소유를 자기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법이 없는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존재하는 곳이다. 교회의 궁극적인 신비는 사랑의 신비, 곧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다. 교회에 관한 모든 사상에서 교회를 규정하는 가장 규범적인 용어는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을 이보다 더 깊이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이 사랑을 만나고, 서로 영구히 사랑을 주고받는 사랑의 환희다. 따라서 사랑을 '아가페'(agape)와 '에로스'(eros)로 절대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잘못이다. 완전한 사랑은 쌍방적이며, 완전하기 때문에 이해타산이나 제한이 없다. 반면에 사랑이 자기애로 변질된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오직 십자가의 형태로만 계시될 수 있다. 십자가는 생명을 주는 신적인 사랑의 물결이 인간의 헛된 자기추구라는 황무지에 흘러넘친 곳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완전히 성취되는 날,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생명 그 자체인 그 상호 사랑의 환희 속을 빨려 들어갈 것이다. 

 

구원이란 단어 자체가 온전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서로에게서, 그리고  창조 세계로부터 단절시키는 그것을 온전히 치료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자비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 재연합의 참된 맥락

 

우리는 복음을 믿어서 그분의 지체가 되었고, 성례를 통해 가시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었으며, 이 둘 다 살아 계신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만 가능케 된다. 그리스도께 영입되는 것은 믿음과 소망의 종말론적 긴장에 입각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 둘은 사랑 안에서 그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아직 육체 가운데 살고 있으나, 믿음으로 그분의 삶에 동참한다. 소망 안에서 우리는 현재 감춰진 그리스도의 승리의 삶이 완전히 나타날 날을 향해 달음질친다. 이처럼 믿음과 소망이 이 시대를 사는 새로운 삶의 특징이지만, 그 속에 담긴 영원한 실체는 바로 사랑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 곧 사랑이다.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그 사랑은 우리 안에 믿음과 소망을 창조하고 그것들을 지탱하는 것으로, 모든 성도와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참여하게 될 것과 우리 존재가 아버지와 아들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될 것을 보증하는 담보다. 

 

교회의 삶의 진수는, 하나님의 목적 성취와 그분의 영광의 계시를 향하여 진력하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기뻐하면서 땅끝까지 세상 끝날까지 전진하는 것이다. 교회의 삶은 부활이라는 추수를 믿고 그것을 소망하는 가운데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지는 삶이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다면,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 존속할 뿐이고, 회개하고 믿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삶에 영입됨으로써 그 참된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 육체 가운데 있는 교회의 삶은 이 은혜의 역설 안에 존재하며, 교회는 스스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롬 4:17) 하나님의 자비로 존재한다. 교회는 엄연히 존재하며, 그 존재는 우리의 정의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주권적 자유로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그 아들과 교제하도록 부르셔서 교회를 창조하신 곳이면 어디에나 존재한다.

 

최후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는 그전에 심판을 내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집합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보이는 공동체와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기를 거부한다면, 참으로 위험한 일을 하는 셈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접하신 것처럼 서로 영접해야 한다. 

 

교회가 지금 여기에서 그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교회를 실재적 종말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아직 믿음과 소망 가운데 그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현재 이 죄 많은 시대에 몸담은 채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 살아가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실재적인 종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교회의 삶이 시간 안에서 영위된다는 것과 우리가 교회에 대해 "교회는 현재 무엇인가"라고 물을 뿐 아니라 "교회는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서로를 현 상태로 내버려 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바로잡아 주고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하는 과정을 시작한다는 뜻인데, 이는 먼저 서로 형제로 대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교회가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존재한다면, 그것은 또한 그분의 뜻을 행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권능의 사역을 행하고,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고,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 한 공동체로 만들며 그분의 증인이 되는 삶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교회의 현재 모습에 기초해 상호 비난과 자기 방어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 왔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갖추지 못했음을 참회하는 심정으로 서로를 인정할 때다. 

 

우리의 유일한 확신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자비다. 그 자비가 아니면 그분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즉, 서로의 현재 모습을 보고 판단하기를 중단하고, 서로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세워 주며, 그분의 부르심을 쫓아 바람직한 모습을 갖추어 가도록 격려하기로 결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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