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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제나흐 - 바르트부르크 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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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제나흐 - 바르트부르크 성

이참리 2020. 6. 30.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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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제나흐는 루터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곳으로 15-18살 때, 이곳 성 게오르그 성당의 부속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루터가 15-18세에 살던 집

성 게오르그 교회(St. Georgenkirche, Eisenach)는 루터가 아이제나흐에 살 때 출석했던 교회이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이 곳을 지날 때, 성 게오르그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1540년에는 3주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말씀을 가르쳤다. 

성 게오르그 교회, Eisunach

 

요한 세바스챤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음악가 요한 세바스찬 바하가 아이제나흐 출생인데, 태어난지 이틀만인 1685년 3월 23일에 성 게오르그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근처에 바하가 출생하여 성장한 집이 있는데, 바하 박물관으로 사용되며, 그 집 앞에 바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521년 5월 4일 루터가 보름스를 떠나 비텐베르크를 향해 돌아가고 있었는데, 도중에 의문의 기병들에게 납치를 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루터가 행방불명이 됨에 따라, 루터가 죽었다는 소문이 난무하였으나, 사실은 삭소니 주의 현자 프레드릭이 루터를 보호하기 위하여 아이제나흐 인근의 바르트부르크 성(Warburg Castle)으로 인도한 것이었다. 루터의 밧모섬이라고 불려지기도한 이곳에서 루터는 이 곳에서 약 10개궐간 칩거하며,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매진하게 된다. 10개월 간 루터는 이곳에서 "기사 게오르게(Sir Knight George)"라는 가명으로 지냈으며 바르트부르크 성은 11세기 경 해발 400m 야산 위에 세워졌다.

바르트부르크 성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이 1534년에 출판되어 독일사람들은 자국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루터는 말과

글의 탁월한 능력이 있어, 어린아이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체로 성경을 번역하였다. 루터가 번역하여 사용한 독일어 문장들은 후대 독일 문학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성 내부는 사진촬영의 제한이 있어, 약간의 돈을 지불해야 사진기를 들고 들어 갈 수 있다. 성 안에는 고성 답게 매우 아름다운 문양들과 고품들이 감상할 수 있다.

 

음유시인 대회 장소

바르트부르크성은 중세의 음유시인(Minnesänger)의 대회 장소로 유명하다. 중세의 음유시인이란 약12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활약하던 시인이나 음악가로써 방랑시인이 이에 속한다. 주로 출세하지 못한 귀족이나 기사출신들이었다. 이곳에서 음유시인들은 우열을 가리는 대회를 자주 열었는데, 유명한 우승자로는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Walther von der Vogelweide), 볼프람 폰 에셴바흐(Wolfram von Eschenbach), 알브레히트 폰 할버슈타트(Albrecht von Halberstadt) 등이 있다. 음악 대회도 종종 있었는데, 특히 1206년에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가수들이 모여 이곳에서 가수전쟁(Sängerkrieg)이라는 대회를 열었고, 이는 훗날인 1842년에 여행중 이곳에서 잠시 머무르던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에게 오페라 탄호이저(Tannhäuser)를 구상하는 영감을 제공 했다. 작곡가인 리스트(Franz Liszt) 또한 이곳에서 개최된 바르트부르크성 800주년 축하연에서 성 엘리자베스에 대한 오페라인 엘리자베스(Elisabeth)를 초연했다.

 

또한 이 곳은 1817년 독일학생연합의 맴버 450명이 개최한 민족주의적 행사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이는 1871년에 일어난 독일 통일을 향한 최초의 중요한 첫 걸음이었다. 

 

 

루터의 방

루터가 앉았던 의자와 성경번역을 위해 사용했던 책상, 루터는 이 곳에서 마귀와 격렬하게 싸웠다고 한다. 자신에게 도전하는 마귀를 향해서 잉크병을 던지며 "나는 세례받은 신자야"하며 고함을 쳤다고 한다. 오늘날 잉크 자국을 찾을 수는 없지만 마귀와 씨름했던 루터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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