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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지를 가다

루터쉬타트 비텐베르크

이참리 2020. 8. 1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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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회, Schlossplatz, Castle Church, Wittenberg

비텐베르크 성 교회는 삭소니(Saxony) 주의 주지사 현자 프레드릭(Frederick the Wise)의 주도로 1489-1503에 건립된 르네상스식 성당이다. 이 곳은 비텐베르크 대학과 함께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본거지가 되었다. 만성절(All Sanits' Day, 11월 1일) 전야인 1517년 10월 31 밤에 루터가 95개조를 성당 출입문에 못을 박아 게시함으로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던 곳이다. 

 

 

청동문에 라틴어로 새겨넣은 루터의 95개조

원래는 나무문이었는데, 1760년에 전쟁으로 인한 회재로 손실되었다가, 1858년에 청동문으로 대치하면서 그 위에 라틴어로 95개조를 새겨 넣었다.

 

비텐베르크 시청사와 광장, 시교회 Stadikiche

시청사의 건물 앞에 마틴 루터와 필립 멜랑히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교회당이 비텐베르크 시 교회인데, 성모 마리아 교회라고도 불리운다. 이 교회는 비텐베르크 주민들을 위한 교회로서 루터와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이 자주 설교했던 곳이다. 주의 만찬 예배에서 성도들에게 떡과 함께 처음으로 포도주도 나눠준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루카스 크라나흐의 제단화

비텐베르크 시 교회의 전면에는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제단화 4점이 걸려 있다. 왼쪽에는 유아세례를 베풀고 있는 멜랑히톤, 중간에는 주의 만찬을 받는 사람들 그리고 오른쪽에는 공적인 고백을 듣는 부겐하겐이 그려져 있다. 아래에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한가운데 모시고 루터가 곁에서 설교하는 모습이 있다. 

 

루카스 크라나흐는 루터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운데 두고 청중들에게 설교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루터의 개혁사상이 그리스도 중심적임을 강조한 것이다. 

 

 

비텐베르크 루터의 집, 박물관

비텐베르크 루터의 집은 현자 프레드릭이 비텐베르크 대학을 세우면서 1502년에 건립한 것이다. 1508년 당시에는 성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지어졌지만, 종교개혁운동이 활성화 되면서 수도원은 폐쇄되고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이곳은 루터의 아내 카나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와 여섯 자녀들의 생활 터전이 되었다. 루터는 집을 개방하여 종교개혁운동에 동참하는 모든 자들의 휴식처이자 숙박처로 사용하였다. 이 집은 현재 루터의 종교개혁과 관련한 많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루터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카타리나 폰 보라의 동상

루터의 집 마당에는 그의 부인 카타리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카타리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세 살때 로마가톨릭 수녀원에 보내졌다. 10대의 사춘기 시절부터 루터를 비롯한 개혁가들의 활동에 대해서 듣게 되었고, 수녀원 밖의 자유로운 생활을 동경하게 되었다. 루터는 수녀원에 생선을 배달하는 친구와 공모하여 12명의 수녀들을 생선수레에 싣고 수녀원을 탈출하게 하였다. 11명의 수녀들은 짝을 찾아 결혼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카타리나만 홀로 남았다. 결국 1525년 6월 13일에, 그녀의 나이 26세에 42살의 루터와 결혼하였고, 둘 사이에는 6명의 자녀가 있었다. 1546년 루턱다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47세의 카타리나는 혼자 자녀들을 양육하였고, 6년후 전염병에 감염된 카타리나는 "식물의 가시가 옷에 붙어 있듯이 나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리라"(I will stick to Christ as a bur to cloth)라는 최후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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