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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4장 - 레슬리 뉴비긴 본문

The Missional Church

교회란 무엇인가? 4장 - 레슬리 뉴비긴

이참리 2020. 7. 29.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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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성령의 공동체

 

가톨릭은 주어진 구조를, 개신교는 주어진 메시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양쪽 모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의 독특성, 충분성, 궁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수호하려고 한다. 현대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둘 다 이 동일한 진리에 충실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외에 또 하나의 흐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제3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흐름의 특징은 첫째, 성령의 능력과 임재를 체험하는 데 있으며. 둘째, 교리의 정통성이나 사도직의 완벽한 계승 중 어느 것도 이 흐름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정통 가톨릭과 개신교는 이제까지 복음의 불변적 요소들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종종 형태는 있으나 생명이 없는 교회를 낳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시는 곳은 어디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조지 폭스(George Fox)가 마가렛 펠(Margaret Fell)에게 던진 말로 도전하면 다음과 같다. "성경을 탄생시킨 성령께서 오지 않고 성경과 무슨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당신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고, 사도들은 저렇게 말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나?'라고 말하면 당신들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이 흐름을 묘사할 만한 더 나은 이름이 없기 때문에 오순절 운동으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성경적 기초

 

성령의 성물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영접하셨음을 보여주는, 가시적이고 금방 알아 볼 수 있는 분명한 표지였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하는 중에 성령이 임했다(행 10:44-47). 베드로는 이 사건을 형제들 앞에서 언급하였다(행 11:16-18). 신조에서는 창조, 성육신, 속죄 등을 다룬 후에, 성령론이 마지막 조항 일지 몰라도 신약 성경에서는 최초로 경험하는 실제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성령이 하나의 실제로,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인식 가능한 증인으로(예, 행 15:8) 등장한다. 따라서 선험적인 추론에 근거한 모든 논증보다 앞서는 우선권을 갖고 있다. 

 

사도들이 공의회 앞에 잡혀가서 그들의 권위를 보이라는 심문을 받자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겍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32)라고 응답한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질문은 분명한 응답을 요구하는 것이다(행 19:1-7; 참고 8:14-17),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 8:9).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율법과 믿음에 관해 논쟁할 때 이렇게 묻는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또는 믿음으로 들음에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2-3) 성령을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점임을 알 수 있다.

 

요한도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요일 3:24)라고 했다. 성령은 곧 교회의 생명이다. 교회에 거짓말하는 이들은 성령껙 거짓말하는 것이다(행 5:4). 성령은 교회 공의회의 결정에도 관계한다(행 15:28). 교회는 가장 정확한 의미에서, 성령에 동참하는 모임, 곧 '코이노니아'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가 형제들 앞에서 가이사랴에서의 자신의 행동을 변호할 때, 그들에게 오순절 날 일어났던 사건을 상기시킨다(행 11:15).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이미 완성되었고, 말씀과 행위로 아버지를 계시하는 일도 완수되었다. 그분의 교회를 이룰 핵심 멤버들도 선택되었다. 앞서 말한, 메시지와 구조, 믿음과 질서가 모두 완비되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다려야 했다. 모든 것이 완비되었으나, 동시에 아무것도 완비된 것이 없었다. 성령이 오셔서 그 새로운 인류에게 숨을 불어넣으실 때까지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그분에게서 능력을 받고 나가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에 이르는 세례를 줄 수 있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임재다. 성령과 교회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오늘날 신학자들은 '체험'이란 단어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신약의 저자들은 그런 두려움이 전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종교적 체험'이라 부를 만한 사건들을 주저 없이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로 돌렸고, 신학 논쟁을 벌일 때도 오랜 전통을 지닌 신념보다 그 체험에 더 우선권을 부여했다. 그들은 성령의 선물을 알아볼 수 있는 사건으로 여겼으며, 교회를 구성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간주했다. 성령의 오심은 과거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시켰던 할례라는 표지를 대치했다. 할례는 육신의 일로 보이는데 반해(빌 3:3; 갈 6:12), 새로운 인은 성령의 선물, 곧 전혀 새로운 신적인 생명의 선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 안에 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며, 손으로 한 할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참 백성임을 표시해 주는 마음의 할례다(빌 3장; 고후 1:22; 엡 1:13; 4:30; 골 2:11-12; 참고 행 7:51).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을 표시하는 인이고, 하나님의 자녀 됨을 가리키는 표지며, 그들의 상속을 보증하는 담보다. 신약의 교회론이 성령 체험에 결정적 위치를 부여한다는 사실은 도무지 반박할 여지가 없다. 

 

메시지, 구조, 성령

 

교회 내에서 삶과 메시지를 분리시켜 놓고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인지 고민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런 분리 자체가 죄로 인한 결과이다. 주님께는 그런 분리를 찾을 수 없다. 그분은 메시지 그 자체이다. 그분은 육신을 입으신 말씀이다. 그분 안에서 말씀과 행위, 메시지와 존재는 서로 하나다. 그분께서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라고 말씀하셨다. 

 

가톨릭의 핵심적 신념은 교회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도 말씀하셨다. 이는 개신교가 믿는 영구적인 진리다. 교회는 자기 너머에 있는, 교회와 세상의 유일한 재판관이요 구원자이신 그분을 가리켜야 한다. 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증인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기도 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전하는 보고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나르는 수레와 같고, 그 자체가 자신이 전하는 구속 아야기의 일부이다. 

 

이 두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완전히 압도할 경우 문제가 생긴다. 한편에서 교회를 단순히 사도적 증언을 나르는 수레로 교정하면서, 진정한 증언이 있는 곳에 교회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 결과, 정통 루터교회처럼, 교회를 자세하게 정립된 교리에 대한 동의로 규정짓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를 단순히 사도직의 연장으로 규정하면서, 사도직 계승이 있는 곳에 교회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 결과, 교회는 부재중인 주님의 수탁자로서, 법적으로 유효한 수단에 의해 스스로를 영속화하는 법인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 

 

문제는,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성령의 임재을 고려하지 않고 응답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은 아볼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행 19:2)고 물었다. 그러나 오날날 바울의 후예들은 그런 질문보다 "너희는 우리가 가르친 그대로 믿었느냐?"라고 묻든가 "너희가 우리에게 안수를 받았느냐?"라고 묻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톨릭 입장과 개신교 입장의 긴장 속에서만 온전한 교회의 정체성을 발견하려고 애쓰면 안된다. 양자가 모두 잊고 있는 항목이 있다. 부활하신 주님이 교회에 사도적 사명을 주시며 자신의 사역을 계속 이어가도록 능력을 부여하셨을 때, 그 중심에는 성령을 주시는 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성령의 자유와 주권

 

교회에 관한 모든 사상은 메시지와 존재가 하나로 통일된 실체, 즉 '육신을 입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교회도 메시지와 존재가 늘 하나가 되어야 바람직하다. 하지만 죄가 이 둘을 갈라 놓기 때문에, 교회는 어느 하나만이 아니라 둘 다를 붙들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는 가톨릭의 주장이나 개신교의 주장 중 어느 하나라도 양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교회의 결정적 요소는 하나님의 영이 살아 있는 능력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교회는 메시지를 충실히 전한 덕택에 또는 사도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친교를 나눈 덕택에 생명을 유지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 거하거나 그분의 은혜를 증언하는 일도 이 성령의 살아있는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성령이 없이 행한 모든 일은 교회의 모양은 있으나 그 생명이 없는 모조품과 같다. 어떤 공동체가 겉으로는 교회의 모습을 모두 갖추고 바른 교회론을 전파하나, 실은 죽은 교회일 수 있다는 말이다. 성령은 어떤 면에서 교회의 질서와 가르침을 완전히 갖추지 않은 공동체에 자신의 생명을 주실 수 있다. 즉 성령의 임재를 보여 주는 뚜렷한 표지를 접하게 될 때는, 사도들이 했던 것처럼 그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명확한 원칙이 없으면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영적인 분별력을 사용하느라 끙끙거리지 않고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어떤 판단 기준을 갖고 싶어 하고, 우리의 실수나 개인적 책임을 모면하게 해주는 선명한 규칙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것은 타락한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신약 성경은 "영들을 분별하라"고 요구하며,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성령은 자유롭고 주권적인 분이라 우리의 전통적 범주들을 재고하도록 요구하는 방향으로 일하실 수 있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도록 교회에 필요한 은사들을 주시는 분(고전 12:10)이며, 교회의 일상적인 삶에도 성령이 함께하시고 그 삶을 다스리시며 우리는 그분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마땅하고(고전 12:4-11),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녀가 누리는 자유(갈 4:21-5:1), 곧 문자가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는 자유를 주셨다는 점(고후 3:4-6) 등이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영을 분별하는' 이 원리와 무관하게 오류와 분열을 피할 수 있는 다른 안전책과 판단 기준 혹은 삶의 규칙을 강구할 때, 또 진리를 추구하는 데 따르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서 오류를 피하려고 교회 질서에 안주하려 할 때, 하나됨의 대가로 값비싼 사랑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분열을 피하려고 할 때는, 성령이 아니라 육신에 따라 몸을 세우려고 애쓰는 셈이다. 우리는 교회가 성령 안에 있는 상호 교통이요, 성령은 어떤 부호나 추상명사가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이라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야 마땅하다.

 

성령과 우리의 구원

 

성령과 그리스도의 사역

 

신약성경은 한결같이 하나님이 주신 성령은 선물은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완수하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말씀 및 성례에 단단히 묶여 있다고 가르친다. 누구에게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듣고 믿는 일과 세례를 통해 그분이 보내신 가시적 공동체에 영입되는 일 외에 성령의 교통에 동참하는 길은 없다.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이와 똑같이 믿음에 관해 들음으로써 성령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복음 전파와 세례 둘 다 성령에 의해 실효성을 갖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이 양자는 기름부음 받은 분의 완성된 사역이 신자에게 전달되고 그에 따라 신자도 그 동일한 기름부음에 참여하게 되는 유일한 통로다.

 

세례 받기 전에 성령의 선물을 받았던 고넬료 집안이나 세례는 받았으나 성령을 받지 못했던 사마리아 개종자들, 이러한 사례들은 성령의 사역이 기계적인 확일성에 따라 시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곧 성령의 선물은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믿는 일과 세례를 받아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일 등 양겹줄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묶여 있다는 진리를 결코 약화시키지 않는다. 

 

성령과 선택의 문제

 

구원을 집합적이고 우주적인 것으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구원 수단이 그 목적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하나님이 선택의 원리에 따라 우리를 다루실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한 인종이 선택을 받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다른 이들 사이에 구원의 매개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즉, 그 인종을 구속된 새 인류의 핵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물론 선택의 문제는 신비로운 요소가 있다. 왜 어떤 사람은 택함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은 받지 못했는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왜 선택되었는지 모른다 할지라도, 무엇을 위해 선택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그가 선택된 목적은 참 포도나무의 가지로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며(요 16:16), 그의 증언을 통해 다른 이들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이 선택 교리의 선교적 특성을 망각할 경우, 즉 우리가 선택받은 것은 보냄받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잊을 경우 신자가 '선택'에서 앞으로 나아가 그 목적 - 증인이 되는 것 - 을 탐구하기보다 뒤로 물러나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에서 그 이유를 탐구하는 데 관심이 더 있는 경우, 또 선택의 목적이 세상의 구원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위탁받은 것을 저버리는 셈이다. 

선택교리는 성령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논하는 맥락에서 다뤄야 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논한 다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복을 누리는 것은 성령의 비밀스러운 역사 때문이라고 말하고(3권 1:1), 이어서 성령의 사역으로서 중생에 관해 그리고 성령의 주요 열매의 하나로서 믿음에 관해 길게 설명한다. 말씀과 성례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매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도록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모두 성령의 사역 덕분이다. 이것은 모두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롬 11:5)된 일이다.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중생의 유일한 근거이다. 

 

그러나 이 진리를 성육신과 무관한 독자적인 진리로 간주한다면 복음을 완전히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을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이 그분의 뜻대로 누구든 선택하여 성령의 신비한 능력으로 중생시키실 수 있다는 진리로부터 시작한다면, 역사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실제 사역은 중심의 자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분이 세우신 가시적 공동체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비가시적인 선민의 숫자에 중심을 양보하게 될 것이다. 그분이 주신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성례는 갈수록 구원의 필수 조건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선교 사역도 더 이상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 없이도 이방인을 택하여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퀘이커교의 경우처럼 극단적 형태를 띠게 되면 성경도 더 이상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직접 주어진다고 믿으면 다른 출처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선택의 교리는 땅 위에 있는 가시적인 교회의 삶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 땅 위의 교회는 비가시적인 천상의 실체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의 첫 열매요 수단인데, 이는 그분의 목적이 정확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재창조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가시적 교회의 삶이라는 맥락에서만 성령의 교리를 이해햐야 한다. 성령의 여러 은사로 그 몸이 사랑안에서 세워지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는 공동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하다.

 

비판적 논평

 

열심과 질서의 대비

 

또 하나의 왜곡상은 교회를 성령의 공동체라는 진리를 따로 떼어내어 이것만이 교회의 본질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소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존 매케이(John Mackay) 박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열심을 질서와 대비시키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고린도전서에서 보듯 뭔가 특별한 것에 대한 선호, 준비 없이 하는 즉흥적인 것을 더 영적이라고 믿는 믿음, 질서와 조직을 성령의 삶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다. 이 모든 것은 신약이 아닌 구약의 성령의 개념에서 오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나오는 성령은 주로 특정한 때에 개개인에게 임하셔서 그들로 기적을 일으키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며, 그분의 뜻을 분별하게 하는 역할을 하신다. 반면 신약의 성령은 특정 개인에게 이따금 찾아오시는 방문객이 아니라, 그 교제 안에 항구적으로 거하시는 생명의 원리이다. 성령의 최고의 선물은 몸을 세우고 서로를 엮어 주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랑이다. 따라서 성령의 임재를 가리키는 결정적인 표지는 공동체를 하나로 유지하려는 온유한 관심고, 그리스도만이 차지하셔야 할 자리에 어떤 인간 지도자나 무리를 올려 놓은 행습을 혐오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 사는 삶은 하나뿐인 그리스도의 몸 아넹 사는 삶이며, 그 중심에는 '나', '우리'가 들어설 여지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 가운데 계신 모든 것이 되신다. 가장 근본적 원리는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사랑일 것이다.

 

친교의 범위

 

신약성경에 나오는 교회가 지역별로 모이는 신자들의 회중이거나 하늘과 땅에 있는 신자들을 모두 포함하는 공동체이며, 다른 의미로 '교회'를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회를 여러 단위로 나눌 때 지역 교회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이 옳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동일한 떡과 동일한 잔을 나누는 신자들의 몸, 그 안에서 말씀이 선포되는 가시적 공동체, 서로 믿음을 세워 주고 사랑으로 바로잡으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공동체야 말로 일차적 친교 모임이다. 회중의 삶에 실제로 동참하는 일, 곧 각 지체가 성령께 받은 은사로 공동체의 삶에 기여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을 목회 사역과 성례만큼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우리 시대는 기계화와 관료제의 폐단을 수반하는 대규모 조직을 지향하는 흐름이 강한데, 교회도 그런 흐름에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가 예배, 증언, 상호 사랑과 섬김,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에 강요되어 그 삶을 왜곡할 수 있는 위험이 실재한다. 신약 성경에서는 그런 조직을 지역 교회에 강요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재통합 운동은 교회 조직의 규모와 상관이 없다. 그것은 교회의 참 본질 및 특질의 회복과 관련된 것으로 곳곳에서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의 가시적 친교 모임이 되는 것을 지향한다. 

 

그리스도의 의도가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이끄시는 것이라면, 그 의도는 어떤 가시적 표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이 은혜로운 사역이 지역 교회의 하나됨을 통해 표현될 뿐 아니라, 기독교 가정을 통해 그리고 기독교 국가와 에큐메니컬 모임을 통해 표현될 것을 기대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의 쟁점

 

현대 에큐메니컬 운동은 지금까지 주로 가톨릭의 흐름과 개신교의 흐름이 서로 만나는 장소가 되어 왔다. 대체로 오순절파는 그 바깥에 위치해 있었다. 에큐메니컬 대화가 적당한 열매를 맺으려면 오순절파의 기여가 필요하다. 에큐메니컬 운동에 성령의 역사를 분명히 보여주는 표지가 있음을 인정하도록 요청해야 한다. 에큐메니컬 대화를 나누려면, 그들의 신념을 버릴 필요는 없고, 다만  동일한 성령을 소유하는 동료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도 동시에 배우려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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