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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3장 - 레슬리 뉴비긴 본문

The Missional Church

교회란 무엇인가? 3장 - 레슬리 뉴비긴

이참리 2020. 7. 26.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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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그리스도의 몸

 

성경적 기초

예수와 사도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핵심은 사도들을 택하시고, 훈련하시고, 파송하는 것이었다. 택함 받은 사도들이 받은 훈련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공식적인 교육 과정을 밟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과 친밀해지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성육신하신 예수와 함께 살며 성령이 충만한 그분을 보고 듣고 만짐으로써, 자신도 그 동일한 성령이 거하는 장소가 되고(요 14:17), 그리스도와 부활의 생명에 동참하고(요 14:19), 그분이 누구인지를 알고(요 14:20), 또한 모든 것을 알게 되는(요 14:26; 16:13) 과정을 밟았다. 예수와 그 사도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의 정신과 예수를 믿게 될 모든 사람과의 연합 정신은 주님이 고난당하시던 날 밤에 올리신 기도에 완전히 포함되어 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2-23) 

 

하나님의 백성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는 끈은 어떤 관념의 역사가 아니라 한 백성의 역사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자발적 협회로 표현한 곳은 한 군데도 없고, 순전히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자신의 권능으로 조성하신 백성이다. 이스라엘이 노예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 권능의 팔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약속의 땅에 그들을 심으셨다. 시내 산에서는 구속 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며 언약을 맺으신다(출 19:4-6). 그 백성들에게 요구된 것은 믿음가 순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 뒤에 따라오는 응답일 뿐이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칭된다. 복음을 믿은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가지로 묘사된다. 이런 면에서 복음서와 성경 전체는 한 백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 맥을 같이 한다.

 

인간과 사회

 

하나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사람을 몸과 영혼의 통일체로 만드셨으며, 또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즉 사람을 하나님과 홀로 있는 존재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그 삶의 배경을 이루는 모든 자연적, 심리적, 경제적, 생물적 유대 관계를 개인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개인을 그가 몸담은 다양한 유대 관계의 산물 정도로 취급하면 안 되는 것처럼, 그런 유대관계들을 수많은 개별적 결정의 산물 정도로 취급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실 때 개인적 책임뿐만 아니라, 가족, 집안, 민족과 같은 자연적 유대 관계에 비추어 다루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과 자연

 

성경적인 구원은 창조 질서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가시적 세계는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본질적으로 선하다. 인간의 타락이 자연까지 타락시키긴 했으나, 자연 그 자체는 악하지 않다. 자연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자연의 회복은 현재 모든 피조물이 신음하며 고통 가운데 갈망하는 그 마지막 완성의 일부이다. 사람은 살아 있는 전인적 존재로, 그의 영원한 미래는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몸의 부활에 있다. 만물의 최종적 완성은 창조 세계 전체의 회복, 사람의 몸의 회복,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는 잃어버린 인간성의 회복 등을 포함한다. 교회는 장차 도래 할 시대의 첫 열매를 현시대에서 미리 맛보는 영역이다.  또한 교회는 가시적 표지들을 특징으로 가시적 친교 모임의 형태를 띤 구원의 영역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가시적 교회에 구원의 능력을 전달하려고 물질적 수단을 사용하시며,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분과 조화로운 관계를 회복하고, 사람은 창조 세계와의 참된 관계를 회복하는 등 다가올 시대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부름 받은 영적 존재라는 말은, 성경 전체가 보여주는 인간의 본질 및 세상에서의 위치와 완전히 흐름을 같이 한다. 하나님과 교제로 들어가는 방법은 물로 세례를 받는 길밖에 없고, 하나님의 아들도 친히 그 낮은 문을 통과해서 지상 사역을 시작하셔야 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복음적 성례

 

성령으로 세례를 주도록 보냄 받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물로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아들 됨의 확신을 받으셨다. 그리스도의 행위로 인해 세례 자체가 변혁된다. 예수는 세례를 받으심으로 고난 받는 종의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셨고, 요단 강에서의 세례는 그분이 장차 갈보리에서 성취하실 세례, 온 세상을 위한 그 세례를 미리 보여 주는 것이었다. 복음 선포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참고 행 2:28)이었고,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것이었다(마 28:19-20). 즉 새 언약 관계에 들어가 그 모든 특권과 책임을 부여받는 길은 믿음과 세례뿐이다. 

 

믿음과 세례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믿음이 있다면 굳이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는가? 믿음이 없다면 세례가 무슨 소용인가? 세례는 하나의 쓸모 있는 표지와 보증에 불과한가? 신약 성경의 저자들에게는 이런 어려움이 전혀 없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고 성령 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 당연시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이서에서 논쟁을 펼칠 때,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진리를 수호하며 동일하게 세례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영입된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설파한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6-28). 바울은 믿음에 대한 근거(칭의의 근거, 아들 됨의 근거, 성령을 받는 근거, 그리스도와 연합의 근거)의 강조와 동일하게 세례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 영입된다고 선포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영입된다고 할 때 극 몸은 어디까지나 가시적인 몸이므로, 그 속에 들어가는 것도 세례를 통해 가시적으로 표현된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삶의 중심에도 다함께 떡을 떼는 가시적인 표지가 있다. 세례가 예수의 지상 사역의 출발을 표시했듯이, 성만찬의 재정은 그 사역의 완성을 표시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 이후, 예수는 승리를 거두셨으나 제자들은 패배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때, 예수가 부활의 능력으로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신 것도 바로 떡을 떼는 행위를 통해 이루어졌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준 것은 바로 "이를 행하라"는 한 마디였다. 그 때 이후로 제자들이 예수의 몸과 피에 실제로 참여하는 자가 되고, 그분의 죽음에 동참함으로써 부활의 삶에도 영입되어 그 몸의 지체가 된 것도, 그분의 명령대로 주님의 식탁에서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교제 안에서 이루어졌다.

 

바울과 그리스도의 몸

 

이는 자연스럽게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묘사하는 바울의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고, 이는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묘사될 수도 있다. 그것은 현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다(골 3:3).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 안에 살고 계신다(갈 2:20).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아 육신의 몸을 벗어 버렸으며(골 2:11), 옛사람은 벗어 버리고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까지 새로워진 새 사람을 입었다(골 3:9-10). 율법에 대해 죽었고, 이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분과 하나가 되었다(롬 7:4). 

 

바울의 언어를 이해하려면, 그가 '몸'(body)이라는 단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깊이 탐구해야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몸과 영을 상반된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대립 관계는 영과 육신(flesh)의 관계이다. 몸이라는 용어는 육신의 몸(a body of the flesh)도 있고 영적인 몸(a spiritual body)도 존재한다. 육신의 몸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으며 십자가에서 우리 대속을 위해 드리신 몸이다. 영적인 몸(혹은 신령한 몸, 고전 15:44)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영원히 살 때 입은 몸인 동시에 그분이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생명을 담고 있는 것이다(고전 15:45).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라는 말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말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두 용어(영과 몸)는 한꺼번에 등장하기도 한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4). "우리가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엡 2:16-18).

 

이 '몸'이라는 용어는 어느 정도까지 은유적으로 또 어느 정도까지 그 이상의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바울은 자신이 말하는 것이 자연적인 몸이 아니라 영적인 몸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영적인 몸'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5)라고 말했다.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그분과 한 몸이 아니라 한 영이 되는 것이다(고전 6:17).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하는 것은, 일반적 의미로 기독교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말하는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의 생명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에 비춰봐야만 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며 그분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분의 죽음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그분의 부활하신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그분의 지체들이 서로 나뉘는 것은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이다. 영적인 삶은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 사는 삶이다. 공동체의 하나 됨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떡과 하나의 잔에 모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성만찬 곧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을 한 몸, 그분의 몸으로 만들어 준다. 

 

바울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그리스도의 몸 안에 사는 삶이고, 그것은 믿음과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자신을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동일시하시는 삶이다. 우리가 지체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은 자연적 몸이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세상에서 영위되는 교회의 가시적 삶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몸도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몸이요 생명을 주는 영이 된 마지막 아담,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공동생활의 가시적 중심은 그 지체들이 그분의 몸과 피에, 곧 성만찬에 참옇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공동 생활의 중심을 찾고, 당파를 만들어 서로 분열된다면 성만찬이 그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변할 것이다.

 

경험에 기초한 논증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으로서 질서와 연속성

 

무엇보다 교회 역사각 증거 하는 교회 존립의 필수 조건은 영속적인 구조를 지닌 가시적이고 조직적인 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본질상 몸이 없는 영성이 아니고, 가시적 친교 모임 안에서의 삶, 모든 것을 바치라는 총체적 요구를 하는 삶이며, 그 목적을 이루려면 구성원 간에 가장 밀접하고 끈끈한 유대 관계가 필요하다. 교회임을 자처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전통에 반기들 들고 일어난 모임이더라도, 전통적인 구조상의 특징과 계승 구조를 반드시 개발하게끔 되어 있다. 개혁 운동이 일아날 때 반박의 대상이었던 요소들이 한 세대가 지난 후에는 교회의 일상 생활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루터는 원칙적으로 교회가 자신을 그리스도와의 교제로부터 축출할 수 없음을 말하였는데 나중에는 교황권의 사용을 말씀과 성례와 함께 교회의 본질적 표지에 포함시켰다. 칼빈과 녹스의 추종자들은 목사직의 계승이 참 교회의 표지가 될 수 없다고 부정하였는데 나중에는 장로들의 영속적 계승을 주장하였다. 존 웨슬리의 추종자들은 교권적 권위 없이 안수를 베풀었었는데,  오늘날 감리교인이 그와 똑같은 행위를 한다면 강하게 반감을 표시할 것이다.이것은 인간 본성의 변덕스러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인간과 교회의 체절에 심어 놓으신 불변성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교회가 본질상 가시적이고 영속적인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입증해 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가시적 사회에 영입되는 것을 뜻하며, 이 사회는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 때까지, 그리스도의 한 몸에 모든 사람과 모든 세대를 묶는, 분열되지 않은 연속적 공동체라는 점이다.

 

구조와 믿음, 구조와 경험의 관계

 

주님은 어떤 교리 체계를 만들어 놓고, 그 교리를 믿는 자들을 불러 모임을 조성하신게 아니다. 교회는 바른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 이상의 공동체이다. 믿는 자들이 나누는 인격적 교제의 장이고, 세상을 향해서는 그분의 대사가 되고, 그분의 교회에서는 주춧돌의 사명을 받았다. 주님은 어떤 공인된 신조도 주시지 않았다. 그 공동체에 소속 여부는 어떤 공식적인 신학에 대한 찬성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었다. 주님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두 가지 성례로 그 공동체의 경계를 정하셨다. 그리고 일단 그 경계 안에 들어가면 성령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되고, 성령께서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더 순수한 믿음이나 더 풍성한 경험의 이름으로 기존 구조를 타파해야겠다고 확신하고 질서보다 믿음이나 경험을 우위에 두었을 때, 그들의 자녀와 손자 세대는 특정한 신조나 경험에 근거한 새로운 구조를 물려받되 그 개혁자들이 당연시했던 영적, 지적 자유에 못 미치는 자유를 유산으로 물려받는다는 사실이다. 신약 성경에는 믿음과 질서가 함께 주어져 있다. 죄로 인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면, 믿음에 이론적 우위를 두게 되고 결국에는 어떤 부분적 신조에 바탕을 둔 새 질서가 성립되는데, 이 새 질서는 옛 질서에 비해 덜 보편적이기 때문에 덜 자유로운 성격을 갖게 된다. 질서에 우위를 두더라도 그와 똑같이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 

 

복음적 성례의 중심적 위치

 

개신교 역사 곳곳에서 성례가 약해지고 있다. 많은 교회가 성령들을 순전히 상징적인 것으로 그저 보존해야 할 오랜 관습 정도로 여기고, 교회의 생명이 달린 기관으로 중시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아주 영적이어서 이런 가시적 표지들을 통하지 않고도 그 의미를 통찰 할 수 있으므로 그 표지들을 없애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진실한 반응이 지닌 그 단순하고도 신비로운 특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란 그분이 주신 그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표지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은 자신의 교회를 파송하셨고, 교회에 자신의 영을 주셨으며, 교회에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수단을 제공하셨다. 가장 지혜로운 자라도 결국에는 어린아이가 되어 그분이 주신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자신이 파악한 성례의 의미는 아주 부분적인 것임을 알고 언제나 더 깊이 알고자 애써야 한다. 

 

인격적 관계의 진정한 맥락

 

흔히 로마 가톨릭을 공격할 때 펴는 논리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맺으시는 관계는 하나님 편의 은혜와 우리 편의 믿음으로만 형성되는 인격적 관계이므로, 비인격적 제도인 개념들이 교회에 관한 사상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성례와 제도적인 교회 생활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한다. 

 

교회를 하나님과 사람의 영혼, 사람과 사람 간의 진정한 인격적 관계가 개발되는 장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깊고 풍성한 인격적 관계는 비인격적 요인들이 극대화된 곳, 신체적, 생물학적, 경제적 요인들과 강하게 결속된 곳에서 맺어진다. 결혼 관계와 가정이 바로 그런 곳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시되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주시면서 그 가시적인 경계와 연속적인 구조까지 제공하셔서 그분과의 교제가 이루어지게 하신 것은 인간의 본성에 확실히 부합한다.

 

비판적 논평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영입되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주장이 성경적 교회론의 핵심인 것처럼, 그러한 영입이 고린도, 로마, 세계 곳곳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 곧 그 가시적 교회에 합류되는 세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핵심 진리에 속한다. 아울러 그 몸에 참여하는 것은 분열되지 않은 한 모임 안에서 같은 떡과 같은 잔을 나눔으로써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교회의 하나됨은 단순히 이념적이거나 영적인 것에 불과하지 않고, 가시적이고 사회적이며 유기적이다. 그 통일성은 한 식탁에서 나누는 교제를 통해 구현되고, 드러나고, 확인된다. 그 친교가 깨지면 성만찬은 심판의 도구로 전락한다.

 

연속성은 교회에 필수적인가?

 

하나됨이 낳는 자연스런 결과는 권위 전수의 연속성이다. 이 점에서 균열이 생겨도 교회의 중심이 영향을 받는다. 몸이 하나됨을 유지하는 한, 그 권위는 질서 정연하게 대대로 전수될 것이다. 만일 교회의 본질이 분열되지 않는 연속적인 친교에 있는 것이라면, 그런 연속성을 잃어버린 몸은 스스로를 교회라 부를 권리가 있을까? 그런 분열로 분리된 몸이 그 속에 생명이 없이 썩어 버린 본보기가 여럿 있지만, 모두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들 이래 목사직 계승에 균열이 생긴 공동체일지라도 복음 전파와 죄인의 회심과 성도의 성화에 기여했을 때는, 하나님이 그들의 복음 전파, 성례 사역을 풍성하게 하셨다. 가시적 교회 밖에도 은혜의 역사가 있다고 인정하는 동시에 가시적 연속성 있는 곳에만 교회가 존재한다는 확신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구속의 은혜를 교회 안팎에 무차별적으로 내리실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신다. 

 

신약 성경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지체들 가운데 살아 계신 실재적이고 가시적이고 인간적인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그분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는 공동체이다. 그분을 찾고자 한다면 교회에서 찾아야지 다른 곳에서 찾으면 안 된다. 교회와 대립 관계에 있는 이 세상은 악한 자의 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렇ㅎ게 생각해 볼 때, 가시적 연속성을 상실한 공동체에도 교회가 존재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신적인 삶에 참여하는 등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오로지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교회는 오직 그분의 순전하고 과분한 자비, 죽은 자를 일으키고 죄인을 의롭게 하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그 하나님의 자비 덕분에 존재할 뿐이다. 언약의 본질이 순전한 자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안에 있는 죄

 

교회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실제로 영입되는 것이다. 그분의 생명이 그들 속에, 그들의 생명이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그들 속에, 그들의 생명이 그분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이 사람들에게 실제로 전이되는 것이다. '실제로'라는 것은 단순한 귀속이나 약속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가 '성육신의 연장'으로는 거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문구는 육신(sarx)과 몸(soma)을 혼동해서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은 육신적인(fleshly) 것이 아니라 영적인(spiritual)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분이 육신을 입은 상태에서 자신을 내어 주시기 전에는 성령이 오실 수 없다(요 16:7. 참고. 요 7:39) 우리가 그분의 부활의 생명에 영입된 것은 무엇보다 그분의 죽음에 영입된 것이며, 이 심오한 역설은 교회의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따라서 교회는 이 땅에서 일종의 전쟁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육신을 따르는 삶과 영을 따르는 삶이 그 안에서 서로 싸운데. 육신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신을 거스른다. 이 싸움은 개인의 삶 속에 일어남과 동시에 교회의 삶에서도 일어난다. 신자는 개인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반대로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시인할 경우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된다. 마스칼(Mascall)은 교회의 "경험적 모습"은 "종종 그 진정한 본질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 하였다. 교회의 지체들은 죄를 짓지만, 교회 자체는 죄로부터 자유로우며, 그들의 죄를 다룰 수단-참회의 성례-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시적 제도로서의 교회가 과거에 오만, 탐욕, 나태, 비난받아 마땅한 무분별한 죄를 지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와 그 지체들을 뚜렷하게 구별한다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개별적 그리스도인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존재할 뿐이므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은 죄를 지을 수 있으나 그분의 몸은 지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신약 성경 자체가 교회도 분명히 죄를 짓는다는 점을 의심의 여지 없이 밝히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공동체를 향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여러분은 아직 육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한 교회를 향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라고 말씀하신다.

 

육신의 모양을 갖고 있는 한, 교회는 십자가의 표지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육신의 모양을 가진 교회가, 현 시대의 조건 아래서,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승리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하면서도 죄를 이길 능력이 없을 때, 바로 '육신에 속한', 즉 육신적인 것이 되고 만다. 육신 가운데 영위되는 참된 교회 생활의 특징은 바로 십자가에 있고, 죽음을 통해 생명에 이르는 것이며,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고후 4:10) 삶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교회의 소망

 

가톨릭의 교회론이 빠지기 쉬운 기본적인 오류는 [윌리엄 니콜스(Willian Nicholls)가 명료하게 입증한 것처럼] 종말론적 측면을 역사적 측면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물론 재림에 대한 믿음을 공식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지만, 소망과 하나로 묶인 그 분위기를 잃어버린다. 그래서 교회는,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스스로 지닌 것으로 취급된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자신의 은혜를 교회에 예치해 두고, 교회가 '그 은혜'를 베풀도록 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갈 5:5, 새번역) 믿음으로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은 철저하게 소망의 긴장감이 있다. 성령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시켜 주는 맛보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은혜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알기에 그것을 갈망하게 만든다. 

 

성경적인 의미에서 육신의 특징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기만의 그 무엇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교히ㅗ가 그 속에 충만한 은혜를 갖고 있다고 주장할 때는 이미 성령을 버리고 육신을 취한 셈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은 믿음 안에서 살고, 자기 속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 선하시다고 고백하고 모든 영광과 지혜를 그분께 돌리려고 간절하게 원하며,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실로 영적인 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맺으시는 언약의 본질은 순전한 자비요 은혜에 있다. 그 언약을 근거로, 인간이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은혜 수여자와 죄인의 관계가 아닌 다른 어떤 관계라고 주제넘게 주장한다면, 그 언약을 크게 왜곡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은혜의 법 이외에 다른 법이 없다.

 

교회는 처음 시작될 때부터 자기 본질을 거스르는 방식으로 살고 행하여 우리에게 어두운 죄의 신비를 직면하게 했다. 본질적으로 하나인 교회가 나눠진다. 본질적으로 거룩한 교회가 불결해진다. 본질적으로 사도적인 교회가 자신의 선교 사명을 망각한다. 만일 어떤 교회론이 교회 안에 있는 이 어두운 죄의 신비를, 하나님의 은혜의 교리와 조화시키지 않는다면, 즉 죄로 인해 자기 본질을 부정하는 그 공동체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용납을 받아 그분의 은혜의 방편으로 사용되는 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교회론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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