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참리의 하루한장

교회란 무엇인가? 2장 - 레슬리 뉴비긴 본문

The Missional Church

교회란 무엇인가? 2장 - 레슬리 뉴비긴

이참리 2020. 7. 18. 03:35
반응형

2. 신자들의 회중

 

주님은 공생애를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일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메시지로 시작하셨다(막 1:14-15). 요한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요 6:29)이라고 했고,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을 한 마디로 믿는 자들이라고 언급한다(행 16:31). 신약 성경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거론할 때마다 거의 매번 '믿는다', '믿음'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성경적 기초

그리스도께 영입되는 조건으로서 믿음 - 할례를 둘러싼 논쟁

 

할례는 언약 백성의 역사 내내 그들의 표지가 되어 왔다(창17:10, 11, 14). 그것을 지키기 위해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다. 주님도 할례를 받으셨으며, 그것이 폐지되었다고 시사하신 적은 한 번도 없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 가운데 많은 조항을 고치셨지만, 할례의 법은 그리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할례의 문제가 거론된다. 베드로의 연설(행 15:7-11)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하신 성령의 역사를 증언하는 보고였다. 첫째, 베드로는 그들에게 가이사랴에서 일어난 사건을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택하셔서 고넬료 집안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가정에 믿음의 선물을 주셨다. 이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행위만큼 확실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였다. 둘째, 이것은 추상적 사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를 친히 승인하셨고, 자신의 증인으로 성령을 보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무차별적 은혜를 부어주셨다. 셋째, 하나님은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셔서,  타락한 이방인으로 취급받지 않게 하셨다. 넷째, 이러한 사실을 앞에 두고, 이방인에게 감당할 수 없는 모세 율법의 멍에를 지우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전인을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 위에, 그분의 자기 계시 위에 온전히 세우는 일이다. 다섯째, 그들이든 우리든 구원에 이르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행 15:11).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길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다. 베드로의 이 연설은 할례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율법을 전반적으로 다룬다. 여기서의 진짜 쟁점이 되는 것은 행위냐 믿음이냐의 문제이고, 논쟁의 계기가 된 할례는 그에 따른 부수적인 사안일 뿐이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새로운 하나님의 일은 그분이 행하신 이전의 일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옛 언약은 새 언약에 의해 완전히 폐기된 것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가의 언약을 끝내시고 완전히 새로운 인류와 새로운 조건으로 언약을 맺으신 것인가? 초대교회는 주저 없이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간주했고, 옛 언약이 담긴 책들을 자신의 성경으로 사용했으며, 거기에 나온 약속들과 경고들을 자기 것으로 취했다. 새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옛 이스라엘과 연속선상에 있다. 그러나 할례의 포기는 철저한 불연속성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면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이에 대한 잘못된 두 가지 응답이 있다. 첫째로, 할례를 계속해서 시행하지 않는 이유가 다른 의식으로 대치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옛 언약에서의 할례가 새 언약에서의 세례 혹은 견진 중 하나와 상응함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글에서 할례는 믿음과 대조를 이룬다(갈 5:6;롬 4:10-12). 영에서 난 것과 육에서 난 것을 대조시킨다(갈 6:13; 엡 2:11; 빌 3:3),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대조시킨다(롬 2:28-29). 할례가 세례와 대조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에, 할례를 받든 받지 않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 한 대목에서만 할례가 세례와 아주 밀접한 관계로 묘사되는데, 골로새서 2:11-12절이다.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런데 세례는 할례처럼 '손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는 세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와 비슷한 구절들(엡 2:11; 롬 2:28-29; 빌 3:2-29)에 비추어 보고, 또 옛 성전과 새 성전을 대조하면서 어구가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막 14:58; 행 7:48; 17:24; 고후 5:1), 이는 분명 하나님의 영이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 즉 성령의 보증인 마음의 할례를 가리킨다. 참된 할례는 그리스도의 죽음, 곧 그분이 스스로 육체와 그 권세를 벗어버리신 사건으로 인해 우리에게 가능해진 것이다(골 2:15). 결국 할례와 세례가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행한 육체의 할례와 성령께서 행하신 마음의 할례가 대조되는 것이다. 또한, 이방인 개종자에게 할례를 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데도, 사도행전이나 갈라디아서, 혹은 로마서를 봐도 그런 등식은 전혀 암시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를 펼칠 때, "당신들은 이미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라는 식의 말을 하지 않는다. 즉 할례는 새 시대에 다른 의식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폐기된 것이 아니다.

 

둘째로, 옛언약의 할례는 외적인 표지이고 새 언약은 외적인 외적인 표지가 필요 없기 때문에 할례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물론 새 언약은 마음판에 새겨진 영적인 것임에 틀림없다(렘 31:33). 그렇다고 해서 외적인 표지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받는 성령의 인침이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중계됨을 당연하게 여긴다. 새 언약도 분명히 외적인 표지를 갖는다.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요구하면 안 된다는 결정을 내릴 때 사용된 가장 중요한 용어는 '믿음'과 '성령'이다. 

 

오직 믿음으로 - 갈라디아서의 가르침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복음을 받았다는 것과, 자신이 이방인들 가운데 행한 사역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의 사역과 완전히 맥을 같이한다는 것을 확증한 다음에(갈1:1-2:10), 안디옥에서 유대인의 음식 규례와 관련하여 베드로와 충돌한 사건을 언급함으로 이 문제에 뛰어든다. 이어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서로 배타적 관계에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은 모두 은혜에 보답하는 믿음의 삶이다. 거기에 율법의 행위를 더하는 일은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 율법과 믿음은 양립할 수 없다.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상반되지 않는다. 다만 그 목적은 믿음의 길 외에 하나님께 이르는 다른 모든 길을 봉쇄하는 것이다. 율법이 생명을 줄 수는 없으나 우리를 그리스도께 안내할 수는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임을 보여주는 표지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의 유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중요하며(갈 5:2-12), 표지가 된다. 즉 이방인 개종자에 대한 할례 요구는 그리스도와의 단절을 초래하기에 바울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믿음으로 인한 의를 율법의 의로 보완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인간이 몸담을 수 있는 영역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율법의 영역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그분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세계이다. 사실 이 영역은 저주하래 놓여 있다. 다른 하나는 은혜의 영역으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그분께 인정받기를 바라는 세계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다스리는 영역이다. 이 두 영역은 완전히 배타적이다. 은혜를 행위로 보충하려 한다면, 이는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율법이 하나님의 뜻에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은혜와 믿음의 길 밖에 없음을 깨닫도록 하셨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한다. 하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자는 다시 율법의 속박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는 것은 율법의 영역 전체를 수용하는 것과 같아서 율법에 따를 저주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단절되는 것을 뜻한다.

 

믿음과 언약 - 로마서의 가르침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것은 복음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의 배경은 진노다. 의로운 재판관은 악행을 처벌하고, 할례를 받은 자나 받지 않은 자나, 결국 모든 사람의 은밀한 일을 심판할 것이다(롬1:18-2:16). 마지막 심판 때에는 할례가 아무 소용없다. 참 할례는 내적이고 영적인 것이다(롬 2:17-29).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외적인 규례를 모두 벗어버린 순전히 영적인 종교뿐인가? 가시적 '에클레시아'에 속한 자들의 일부가 신실하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은 인간의 불성실함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분명한 것은 교회 안과 밖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다. 율법이 아닌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지는 값없는 의로움이다(롬 3:21-3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도 믿음을 근거로 그를 받아주셨고, 그 표지로 할례를 받게 하셨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모든 믿는 자(할례의 유무와 상관없이)의 조상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영입되어 모든 특권을 누리는 것은 모두 믿음을 통해 된 것이다(롬 5:1-11).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옛 사람을 무던 아래로 끌고 가셨다가 새 사람의 영광 가운데 다시 일어나신 것이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그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 사람들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께 합류한 지체는 율법과 이혼하고 그리스도와 결혼한 셈이다(롬 7:1-6)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우리가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되는 것도 오직 믿음에 의해서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및 그 자손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은혜와 아브라함 편에서 보이는 신뢰가 서로 만나는 관계였다. 할례가 상징하고 보증하는 관계가 바로 그런 관계였다. 그리고 극 언약을 전수받는 일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나 할례의 준수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최초의 언약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편에서 값없는 은혜와 인간 편에서의 순전한 신뢰에 의존한다.

 

무엇이든 인간적인 자격에 의존하는 일은 완전히 배제된다. 십자가 앞에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도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죄를 지었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과 자기 백성 사이의 관계를 성령의 선물이라는 새로운 도장으로 인준하셨다. 물론 새 언약도 가시적인 표지들이 있다. 예수께서 친히 경험하시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의 계기가 되었던 세례와 직접 제정하신 성만찬이 있다. 하지만 이 언약 자체의 본질은 언제나 은혜와 믿음에 있다. 

 

비판적 논평

교회의 구성 요소로서 말씀과 성례

 

루터는 "말씀이 전파되고, 믿어지고, 고백되고, 행해지는 곳을 보면, 그곳이 어디든 거기에 진정으로 거룩한 보편교회(ecclesia samcta catholica)가 있음을 의심치 말라"고 하였다. 또한 그 보편교회는 그리스도의 규례에 따라 바르게 집행되고, 가르쳐지고, 믿어지고, 사용되는 성례들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누가 말씀을 전하고 누가 성례를 집행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말씀과 성례는 하나님의 것이지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 그분이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서 역동적인 창조 사역을 하신다는 것, 살아 계신 주님이 진실로 자신의 교회 안에서 말씀과 성례들을 통해 임재하시면서 창조와 재창조의 사역, 회심과 화목의 사역, 뿌리째 뽑고 무너뜨리는 사역, 세우고 심는 사역을 하신다는 것 등을 받아들였다. 이 개념의 한계점은 교회의 연속성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보편 교회를 따로따로 발생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본다. 즉, 복음의 말씀과 성례의 사건이 발생하는 그때, 그 장소에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으로 인해 교회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칼 바르트가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발표한 교회에 관한 논문에서 중요한 대목을 시작할 때마다 "회중(ecclesia)은 하나의 사건(Ereignis)이다" 라는 어구로 시작한다. 교회가 그 실존의 순간마다 살아 계신 주님과 직접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이나 다른 장소와 시기에 속한 회중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사실 교회는 연속성과 광범위성을 그 특징으로 삼는 역사적 기관이다. 이 견해는 종말론적 특성이 역사적 성격을 완전히 밀어낸 것이다. 

 

말씀과 성례는 동떨어진 사건들이 아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복음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시행되는 것은 모두 기존의 교회나 모종의 친교 모임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씀과 성례를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핵심 메시지와 성례 준수의 필수 조건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조건을 발견하기 위해 엄청난 학문적 노력을 쏟아부었다. 예수님이 남기신 것은 하나의 친교 모임이었고, 그 모임을 자신의 대변인으로 임명하셨다. 예수께서 그 구원의 능력을 땅끝까지 확장하시기 위해 확실히 준비하신 장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그분이 부르시고, 훈련하시고, 능력을 주시고 파송하신 그 모임이라고 응답해야 한다. 

 

개신교의 두가지 약점

첫째, '믿음'이라는 단어의 내용을 지나치게 지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애초에 말씀과 성례의 이론적 배경을 교회의 지속적인 삶과 동떨어진 데서 찾다가 초래된 결과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께 영입되는가? 이 질문의 답을 "오직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라고만 응답하고 복음이 우리에게 오는 그 친교의 맥락을 도외시한다면, 믿음을 지나치게 지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교리적인 동의를 기독교의 연합을 위한 토대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그리스도와 그리고 다른 신자와 하나가 되는 일은 지적인 동의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것이다. 본질적 성격은 우리를 사랑으로 묶어 주는 성령의 사역이다. 인간 편의 필수 조건은 그 사랑에 온 몸을 던지는 믿음, 그 사랑의 힘에 마음과 뜻과 목숨을 여는 믿음이다. 이런 통일성 안에서 지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일은 얼마든 가능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가 하나 되는 것을 교리적 동의 정도로 생각하는 일은 그 본지를 심히 왜곡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왜곡하면,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편향적인 교리에 기초한 당파로 나뉘어 경쟁하다가 결국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둘째,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이 지닌 결함 때문에 생기는 왜곡된 상이다. 교회를 가시적 연합체로 보던 개념이 사실상 사라졌다. 루터는 로마 교회의 거대한 영적, 정치적 권세에 직면하여, 그리스도께 영입되는 것을 그 권에 대한 복종과 동일시한 신학을 뒤집어엎어야 했다. 그래서 루터는 가시적 공동체로서 교회의 통일성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았다. 루터는 두 교회를 구분하며 하나는 자연적이고 본질적이고 진정한 내적인 기독교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만든 외적이고 유형적인 기독교 세계라고 한다. 루터 이후 개신교의 역사가 밝히 보여 주듯, 이 개념이 교회를 가시적 통일체로 보는 개념을 거의 파괴하였다. 신과 인간의 친교는 가시적 공동체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그 공동체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임재라 할 수 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교회는 교회의 구성 요소를 사도 교회와의 제도적 연속성에서만 찾았는데, 그에 대항하여 루터는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임재라고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말씀의 전파와 성례의 집행을 통해 일어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교회를 그리스도의 말씀 사역과 성례 사역에 의해 반복적으로 창조되는 그 무엇으로만 단순히 규정했을 때, 그것이 왜곡되고 말핬다. 말씀과 성례를 한 편에, 교회를 다른 편에 두고 볼 때, 이 둘은 후자가 단순히 전자의 창조물에 불과한 그런 관계가 아니다. 양자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결과, 교회의 가시적 연합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루터는 "교회의 본질, 삶, 본성은 유형적 모임이 아니라, 동일한 믿음 안에서 마음을 합하는 데 있다" 그리고 "영적인 연합만으로도 교회를 만들기에 충분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가 없는 영이 아니므로, 시각, 청각, 촉각의 경험을 통해서만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 있다. 한 몸은 한 성령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함의한다. 이 둘을 대립시키면 진정한 교회론의 정립은 불가능하다. 

 

교회의 권위에 관한 의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Augsburg Confession)의 제14조에서, 교회에서 합당한 소명을 받지 않고는 누구도 공적인 가르침을 베풀거나 성례를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이 조항은 모든 교회 공동체가, 어떤 교회론을 갖고 있든 상관없이, 실제로 수용하고 있는 사실이다. 즉, 교회가 말씀 전파와 성례 집행에 대해 특정한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가 말씀과 성례에 의해 계속해서 창조되는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말씀과 성례 사역의 권위를 줄지 안 줄지 결정할 수 있는 권위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개신교는 참 교리의 연속성과 역사적 유기체의 연속성을 서로 대립시켜 왔는데, 이런 관행으로는 인간의 모든 사회 집단을 지배하는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새로운 기독교 종파는 역사적 교회들의 특징을 더 개발하려고 애쓰며, 특정한 사회적 존재로서 역사적 연속성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를 걸친 하나님의 한 백성이라는 교회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심각하게 평가 절하한다. 교회는 단순히 복음 전파와 성례 집행이라는 사건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참된 본질은 그것이 연속성을 지닌 역사적 사회,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단 한 번 구성되고 파송된 사회라는 데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