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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1장 - 레슬리 뉴비긴 본문

The Missional Church

교회란 무엇인가? 1장 - 레슬리 뉴비긴

이참리 2020. 7. 14.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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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란 무엇인가? 레슬리 뮤비긴, IVP

1. 주제의 배경

 

기독교 세계의 붕괴

 

종교개혁의 신학은 선교적 상황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를 당연시하는 프리모던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몸 된 세계" 안에서 정립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비기독교 세계와의 접촉과 기독교 세계 안에서의 반기독교적 운동을 배경으로 한다.

 

근대 선교 운동이 시작될 때, 사람들은 선교 사역이 기독교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이들에게 그 혜택을 선사하는 것이라고 생각 했다. 대부분 선교사가 들고 들어온 복음과 함께 그들의 문화도 수용했다. 그러나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군도 등 여러 곳에 교회가 생겨남에 따라 복음과 서구 문화를 구분해야 했다. 이것은 어떤 문화적 환경에 있든지, 자신이 몸담은 사회로부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희를 구별하는 것이다. 교회와 세상을 구분하되 기독교 공동체를 지역 문화로부터 분리시키지 않는 구별을 말한다. 

 

기독교 세계의 붕괴를 통해 그동안 사람들에게 소속감을 주던 공동체의 유대 관계가 와해 되었다. 서구문명에서는 개인이 가족과 이웃 등 자연적인 배경에서 점점 벗어나 대체 가능한 사회적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는 일종의 원자화 과정이 나타났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도 서로 이름조차 모른다.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에서 점점 익명의 존재요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변해 가는, 합리주의적 인간 개념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인간이 참 공동체를 갈망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공동체가 없이는 인간다운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선교의 경험

 

교회가 유럽 바깥에 있는 비기독교 종교 문화들과 접촉하는 것을 계기로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실제적 질문들과 교회의 본질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서부 유럽에 있는 교회들은 대체로 교인들이 수행하는 세상 일이 교회와 직접 관련이 없음을 당연시 여긴다. 교육, 의료, 예술, 음악, 농업, 정치, 경제 들이 각각 별개의 영역으로 취급되며, 그 일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침을 교회가 아니라 그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제공받는다. 이런 활동들을 교회가 직접 관할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고, 아무도 이런 활동들을 기대하지도 용납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이 세속 문화에 참여하는 이들의 사고와 행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 문화가 애초에 단일한 기독교적 인생관과 생활 방식에서 유래하였고 아직도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회 직업을 가진 교인들의 사고와 행동에 기독교적 가치를 심어주며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종교적인 일에만 집중 할 수 있다. 그래서 교인들의 여러 관심사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 반기독교적 문화 내에서 느슨하게 결속된 친교 모임 정도로 바뀌고 있다. 

 

그렇다면 비기독교 문화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문화 전체와 철저히 결별하는 것을 뜻한다. 그 문화에 좋은 것이 있을 수 있으나, 개종자는 보통 그 문화와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고 느낀다. 반면 교회는 그 지역 사회를 위해 교육, 의료, 농업, 사업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온갖 봉사를 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런 봉사를 통해 이방 문화 속에 새로운 개인의 행동 양식과 폭넓은 사회적 행동 양식도 보여 주어야 한다고 느낀다. 비기독교 문화에 둘러싸인 교회는 규율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규율이 필요한 이유는 첫째, 개종자가 지역 사회 혹은 부족의 전통적 규율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그것을 대치하는 새로운 사회적 규율을 제공할 책임이 교회에 주어진다는 의미이며, 둘째 규율이 없으면 비기독교 세계를 대상으로 한 교회의 증언이 타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비기독교 세계에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가 바리잡는 상황에서 연합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대두된다. 선교적 상황에서 기독교가 분열한다는 것은, 어떤 면으로든 도무지 관용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모습이다. 교회가 분열되었을 때는, 세상의 주된 흐름은 점차 세속 권력에 맡기고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 생활을 연구하는 일에만 몰두 하였다. 

 

교회는 선교적 상황에 던져졌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광대하고 유서 깊은 종교 문화 앞에서 유일하신 주님이요 구원자를 증언하라는 부름을 받은 것이다. 만일 교회가 서로 적대적인 집단으로 분열된다면 복음의 진리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과거 기독교 세계 내에서는 교회들이 분열을 좌시했으나, 이제 선교적 상황에서는 그런 분열들을 용납할 수 없는 복음의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선교 경험 덕분에 교회들은 서로 존중하는 관계로, 협력하는 관계로, 더 나아가 유기적인 연합으로 진전되어 갔다.

 

에큐메니컬 운동

 

에큐메니컬 운동은 근대 선교 운동이 낳은 하나의 부산물이다. 그것은 본래 옛기독교 세계 바깥에서 이루어진 선교 경험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교회가 기독교 세계 안에서도 새로운 이교도 사상들에 직면하는 일종의 선교적 상황에 처하자 훨씬 심화되었다. 에큐메니컬은 그 뿌리에 해당되는 선교의 맥락에 계속 충실하지 않으면 타락 할 수밖에 없다. 에큐메니컬의 어원인 신약 성경의 '오이쿠메네'가 범세계적인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보냄을 받은 곳, 즉 인간이 거주하는 온 땅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결정적 특징은 WCC의 결성에 있다.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첫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이 WCC를 결성하기로 언약을 맺었다. 우리는 반드시 함께할 것을 다짐한다. 우리는 곳곳에 있는 기독교 회중들에게 이 상호 언약을 승인하고 그대로 이룰 것을 요청한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장래를 그분께 의탁한다." 
-Finding and Decisions,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WCC 1차 총회, Section I Report, para. VI.

 

이 선언은 교회 간의 관계에 원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시사한다. 첫 대회는 에큐메니컬 운동이 이처럼 서로 연합하도록 도와주심에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권능으로 역사하신다고 믿으며, 우리가 희미하게 볼 수 없는 저 목표들을 향해 계속 인돟하실 것을 믿는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이미 이루신 것이나 그것이 우리의 가는 길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는 아직 완전히 알지 못한다"

교회의 본질에 관한 자신들의 교리는 옆으로 제쳐두고 그저 이차적인 중요성만 부여하기로 한 것인가?

암스테르담 대회가 열리고 2년이 지난 후(1950년), 토론토에 모인 WCC 중앙 위원회는 회원 가입의 의미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성명서에서 회원이 된다는 것은 다른 회원 교회들을 완전한 의미에서 교회로 취급할 의무가 있다든가, 자신의 교회론을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든가, 교회 연합의 가시적 형태에 관한 특정 견해를 반드시 수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였다. 

 

WCC 회원 가입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모든 회원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몸 된 교회의 유일한 머리가 되신다는 것과 따라서 교회는 하나라는 것을 인정한다. 각 회원 교회는 보편 교회가 어떤 의미에서 WCC의 경계를 뛰어넘는다는 것과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는 함께 연구하고 대화할 주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과 다른 교회들이 지닌 참 교회의 요소들을 인정한다는 것은 상호 대화의 의무를 짊어진다는 의미이다. 또 자신들이 세상에서 다함께 증언할 것이 무엇인지,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서로 영적인 관계로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등을 그리스도로부터 함께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WCC는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제도적으로 구현한 것이지만, 그 연합의 형태에 대해서는 중립적 입장을 취한다. 따라서 교회 연합에 관한 다양한 견해는 풍성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준다. 

 

WCC가 존재하게 된 것은 회원 교회들이 서로를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분열되어 있으나, 분열되지 않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만드셨다." 회원교회들은 어떤 교회론을 가지고 있든지, WCC 안에서 함께 하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안에서 함께하는 것이라는 선언에 담긴 함의를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교회 연합은 적어도 다음의 형태를 지녀야 한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가 모인 곳에는 사도의 가르침과 교제 가운데 함께 거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는 가시적인 모임이 있어야 하며, 그 모임의 초점은 말씀, 성례, 사도적 사역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웃으로 주신 자들로 구성된 가시적 친교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마디로 곳곳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곳이기에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는 곳이다. 각 사람 속에 있는 옛 사람이 말씀, 세례, 성찬을 통해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학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이 날마다 새롭게 되는 곳이다. 그것은 지역적이고 회중적인 공동체이기에 그 하나됨은 범세계적인 연합을 이룬다. 

 

이러한 믿음 때문에, 연방(federation)의 형태로 재연합을 시도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연방은 죽음과 부활을 요구하지 않는다. 여러 종파를 하나로 묶되 각 지체에게 일상 생활의 모든 면에서 대가를 치르도록 요구하지 않고 자신의 영성을 자유로이 즐기도록 내버려 둔다. 연방 개념의 치명적 오류는 회개가 없는 재연합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입장

 

교회란 순례의 길을 걷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해 서둘러 땅끝까지 이르고, 만인을 하나로 모을 그 주님을 만나기 위해 끝까지 서둘러 길을 재촉하는 행진을 계속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을 결코 정적 언어로 묘사할 수 없으며, 오직 그 종착점의 견지에서만 규정할 수 있다. 교회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선교적인 관점과 종말론적인 관점을 동시에 가져야 하고, 이런 관점에 입각해야 교착 상태에 빠진 에큐메니컬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위치한 현 시대는 장차 도래할 시대의 권세가 현재 그 능력을 발휘하여 만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이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교회가 연합하지 않고 선교적 성격을 버리는 것은 본질에 어긋나는 자가당착이다. 교회는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지향하는 종말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종말의 능력은 현재 교회 안에서 작동한다. 이는 장차 완전히 드러날 유업의 보증인 성령의 능력을 일컫는다. 우리는 선교의 방향과 연합의 방향 모두를 지향해야 한다.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의 양 측면이다.

 

정의 

 

교회는 인간이 모인 사회로서 여러 인간 공동체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의 가시적 공동체이다. 물론 교회는 믿음 안에서 죽어 현재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우리와 함께 심판과 부활과 승리의 날을 기다리는 이들도 포함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가시적 회중을 인식하고 거기에 합류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이 회중은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령에 의해 조성된 것이므로 믿음으로만 알려진 공동체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가시적 회중이다. 

 

성경 역사의 중심에는 가시적 공동체를 부르시는 이야기가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다.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는 지상의 가시적 무리가 있다. 주님께서는 신조, 사상, 삶의 규율이 아니라 가시적 공동체를 남겨 놓으셨다. 그 공동체는 주님의 의도적인 선택에 의해 다함께 부름받아 그분 안에서 재창조된 공동체이며, 또 단계적으로 그분이 누구시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밝히 드러냈고, 현재도 드러내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실제하는 공동체가 먼저이고 그 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부차적이다. 교회는 무엇보다 주님이 친히 조성하신 가시적 실체로 존재하며, 그 실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부차적이다. 이 가시적 실체, 이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의 교회이다.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회중 혹은 하나님의 총회(ecclesa theou)의 본질적 의미가 '하나님의'(theou)라는 말이 언제나 따라온다는 사실에 달려 있다. '에클레이시아'는 '모임' 혹은 '집회'라는 뜻밖에 없다. 누가 그 모임을 주관했는지 혹은 누가 거기에 참석했는지가 중요하다. 이 모임의 특성은 회원들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모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슈미트가 설명하듯,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 나오는 것처럼 단수와 복수가 혼용될 수 있고, 어느 경우든 소유격 '하나님의'가 붙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에 있는 하나님의 모임, 서머나에 있는 하나님의 모임이란 식으로 지칭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예로, '나라'(kingdom)라는 단어의 용법이 있다. 신약에서 '바실레이야 투 데우'(basileia tou theou)라는 어구는 주로 하나님의 왕권의 임재와 행사를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데우' 혹은 '크리스투'(christou)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곳곳에 모으시는 교회 혹은 회중이다. 하나님이 정말 일하신다. 그래서 회중이 실제하는 것이다. 바로 이들이 하나님이 모으신 백성이요, 하나님의 교회이다. 

 

비가시적 교회 개념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각자가 내키는 대로 자격을 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격 있는 회원이라고 간주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이상에 따른 교회이다. 이런 식으로 그려진 교회는 당연히 우리의 영성에 덧붙여진 부속물일 뿐이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가 아닌 하나의 관념으로, 인간 영성의 종류만큼 잡다하고 들쑥날쑥한 모양을 지닐 것이다. 물론 비가시적 교회의 개념에 아주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교회를 구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이며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진리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과 교제하도록 부르신 사람들로 구성된 가시적 모임이다. 바울이 교회를 지칭할 때,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 하나님의 성전 등, 죄 많은 회중들을 지칭할 때 사용한 것으로 다양한 죄악과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쓴 편지에서 사용되었다.

 

비가시적 교회의 개념이 나온 배경은, 가시적 교회안에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터가 가톨릭과 논박할 때 이 개념을 활용하였다. 이신칭의 교리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동시에 적용된다. 우린은 어떻게 그리스도께 영입되는가? 첫째,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영입된다. 둘째, 역사적 연속성을 지닌 교회에서 성례에 참여함으로 영입된다. 셋째, 성령을 받고 그 안에 거함으로 영입된다. 이 셋은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며, 어느 하나라도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이다.

 

이 질문에 세 가지로 응답할 수 있고, 이 셋은 교회의 삶 속에 깊이 구현되어 있다. 첫째 고전적 개신교, 특히 루터교는 성례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한다. 하지만 주요 강조점은 믿음에 둔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기인하므로 설교가 교회의 삶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다. 성령의 사역을 알며 그것을 거론하지만 상당히 유보적인 태도를 표명한다. 둘째, 가톨릭의 경우 설교를 중시하고 믿음의 필요성도 인정하지만 종교 생활의 중심을 성찬에 둔다. 성령께서 행하시는 성화 사역을 인정하지만 교회의 성례에 결정적 중요성을 부여한다. 셋째, 오순절은 설교와 성례를 모두 인정하고 소중히 여기지만, 그 판단 기준을 자신의 체험에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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