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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의학 2 (29-31) - 헤르만 바빙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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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의학 2 (29-31) - 헤르만 바빙크

이참리 2020. 5. 1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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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의학 2
국내도서
저자 :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 박태현역
출판 : 부흥과개혁사 20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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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의학 29-31

 

29장 하나님의 호칭들

 

[188] 모든 언어에는 신적 존재에 대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비록 하나님은 스스로 그 어떤 이름도 갖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그를 가리킬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다름 아닌 이름이라는 수단을 가진다. 만일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면, 사물들에 대한 지식은 소멸하기 때문이다.

 

[189] 그러나 높이 초월한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초월에서 피조물에게 내려온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일반적으로 모든 민족에게 자신을 계시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특별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알렸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 가운데 등장한 첫 번째 이름은 ‘샤다이’ 혹은 ‘엘 샤다이’이다. 이 이름이 나타난 곳마다 능력과 무적의 강력함의 개념이 전면에 등장한다. ‘엘로힘’이 창조와 자연의 하나님인 반면, ‘엘 샤다이’는 그 자연의 모든 힘들을 복종시켜 은혜의 사역에 사용하는 하나님이다. 또한 자비의 하나님으로서 등장하는 것은 ‘여호와’라는 이름에서다. 70인역에서는 ‘여호와’를 ‘아도나이’로 읽고 이 이름을 ‘큐리오스’로 옮겼다. 유대인들은 이 이름을 발음하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본래의 정확한 발음은 잊혀졌다. 만일 이 발성이 정확하지 않다면, ‘그 이름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출애굽기 3장 1~15절에서는 그 이름의 의미가 선명하게 주어져 있다. 그 이름 전체는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로서 주는 자신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나타났던 분과 동일한 분이라는 것을 말씀한다. “그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문장 안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첨가어는 일반적으로 막연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또한 풍성하고 깊은 의미를 지닌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제부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자 그렇게 계속 머물 것이며, 자신의 은혜와 신실하심에 있어서 변함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묘사와 보증이다.

 

[190]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에 대한 최상의 구약 계시이다. 더 이상 새로운 이름은 덧붙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결코 사용되지 않았고, 연계형으로, 복수형이나 접미사와 함께 나타나는 일이 전혀 없다.

‘엘로힘’은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와 보존자임을 가리킨다. ‘엘 샤다이’는 하나님이 자연을 은혜에 복종시키는 강한 자임을 보여 준다. ‘여호와’는 하나님을 자신의 은혜 가운데 영원토록 신실한 분으로 묘사한다. ‘여호와 처바오트’는 하나님이 자신의 정비된 천군 천사들로 둘러싸여 영광이 가득한 왕이며,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자신의 성전에서 자신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과 존귀를 받는 전능한 분임을 묘사한다.

 

[191] 이 모든 명칭들은 신약에서 보존되었다. ‘엘’과 ‘엘로힘’은 ‘데오스’로 표현되었고, ‘엘욘’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번역되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혹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의 명칭도 역시 신약에 전수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동격들은 주로 ‘나의’, ‘너의’, ‘우리의’, ‘너희의’라는 속격에 의해 대치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과 자기 자녀들의 하나님과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신약에서 수차례 “알파와 오메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으로 설명되었다. 이 외에도 이 명칭은 이미 ‘아도나이’로 해석한 70인역의 발자취를 따라, ‘큐로스’에서 파생한 ‘큐리오스’로 번역되었다. ‘큐리오스’는 능하신 분이요, 주님이요, 소유자요, 법적으로 능력과 권위를 소유한 통치자로서의 하나님을 알려 주었다.

신약에서 아버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한 특별한, 신정적 관계를 표현한다. 이 아버지라는 이름은 윤리적 관계를 표현하여, 하나님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모든 자녀들에 대해 갖는 관계를 보여준다. ‘아버지’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최고 계시다. 이 관계는 아버지의 유일한 독생자요 사랑받는 아들인 그리스도를 통해 신약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런 자녀 됨에 참여하며, 또한 그 자녀 됨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자신을 가장 풍성하게 계시했다. 처음부터 ‘엘로힘’ 안에 담겨 있던 풍성함은 점차 전개되었고,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이름 가운데 가장 영광스럽고 완벽하게 드러났다.

 

30. 비공유적 속성들

 

[192] 하나님의 본성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계시되고, 기독교 신앙에 의해 고백되고, 나중에 삼위일체론에서 드러나게 되듯이 삼중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하나님의 완전에 대한 교리에서 취급된다. 삼위일체론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동일한 신적 본성에 참여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신적 본성이 자신 안에 무엇을 포함하며, 어떤 점에서 모든 피조물의 본성과 다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알려 주는 첫 번째 사실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들과는 구별된 고유하고, 독립적이며, 자율적인 존재와 생명을 지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이 자존성을 자신에게 속하는 것으로 묘사할 때, 하나님은 이를 통해 자신을 절대적 존재, 절대적 의미에서의 존재자로 알린다. 하나님은 이러한 완전을 통해서 곧바로 본질적으로, 완전하게 모든 피조물들과 구별된다.

 

[193] 하나님의 자존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불변성이 흘러나온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것들 가운데 동일한 분이며, 모든 것이 변하지만, 하나님은 계속 존재하며, 항상 자신의 모습 그대로 머무른다. 하나님의 실재와 본질이 변하지 않기에, 또한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 하나님의 모든 계획들과 작정들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불변성은 이신론과 범신론 진영의 많은 반대를 받았다. 펠라기우스주의, 소시누스주의, 항변론, 합리주의는 하나님의 의지를 인간에게 종속시키고, 따라서 인간의 행위에 따라 변하게 만들었다. 또한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훨씬 더 심각한 반대는 범신론의 진영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반대의 공통점은, 생성의 관념이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선이 완전히 지워진 것이다. 이것의 근본 사상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고 생성된다는 것이다. 그는 다름 아닌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잠재적 존재로부터 한 과정의 형태 속에서 점차 자신을 실재화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불변성 교리는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모든 피조물은 생성되어 가는 중에 있다. 피조물은 가변적이고, 끊임없이 안식과 만족을 추구하며, 오로지 생성되지 않은 순수한 존재인 창조주 안에서만 그 인식을 발견한다. 스콜라주의는 하나님을 가장 순수하고 가장 단순한 행위로 말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비존재라든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는 어떤 잠재력을 갖지 않은 완전하고 절대적 존재라는 것을 가리키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자기 자신의 원인’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하나님의 의지는 지성보다 우월하며, 만물의 본질이 그 의지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실재조차 자기 의지의 산물로 삼았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효과적 원인”이다. 그는 “무한하고 참된 능력에 의해” 자기 존재를 갖는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자들은 자기 자신의 원인,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존재라는 표현을 오로지 부정적 의미에서만 이해하고자 했다. 긍정적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원인이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동일한 대상이 자신을 산출하는 한 같은 시각에 존재한다고 말해지고, 자신이 산출되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생성은 반드시 원인을 전제하는데, 원인 없는 생성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대적 의미에서 존재는 더 이상 원인에 대한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다. 절대적 존재가 존재하는 것은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신 관념은 자연히 불변성을 수반한다.

이러한 불변성은 단조로운 단일성, 고정된 부동성이 아니다. 성경 자체가 우리의 모범으로서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피조물과 가장 다채롭게 관계한다고 묘사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인간적으로 말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주변과 외부에 변화가 있고, 그와의 관계에 변화가 있지만, 하나님 자신 안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다. 여기에 바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광대함이며, 동시에 기독교 신앙고백의 영광스러움이 있다.

 

[194] 하나님의 불변성은 시간의 관점에서 영원성, 그리고 공간의 관점에서 편재성이라고 불린다. 이 둘은 ‘하나님의 무한성’이라는 이름하에 요약된다. 그러나 무한성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 불분명하다. 첫째, 그것은 끝이 없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견해의 오류는, 지성이 추상 작용을 통해 유한 존재로부터 획득한 가장 보편적인 공통분모가 무한한 것과 동일시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의 과정을 통해 보편적인 것에서 특수한 것을, 불특정한 것에서 특정한 것을, 무한한 것에서 유한한 것을 산출하려는 동일철학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무한은 부정적 개념이 아니라 긍정적 개념이다. 이 개념은 하나님이 피조물들과 구별된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어떤 유한한 것들과 피조된 것들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다른 한편, 범신론도 마찬가지로 영원과 시간을 혼합한다. 영원이란 시간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실체, 내재적 원인인 반면, 시간이란 마치 파도가 바다의 현상인 것처럼, 영원의 방식, 우연적 사정이다. 하나님 자신은 시간의 흐름 속에 당겨 내려져 시간 속에서 비로소 충만한 자기실현이 되었다.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이신론과 범신론 둘 다를 반드시 거부해야 한다. 영원 개념의 특징은 세 가지이다. 즉, 그것은 ‘시작’과 ‘끝’과 ‘순간의 연속’을 배제한다. 하나님은 ‘태어나지 않았으며’, ‘썩지 않고’ 또한 ‘변하지 않는’ 분이다. 영원과 시간 사이의 차이는 단지 양이나 정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과 본질에도 있다. 시간의 본질이란, ‘이전과 이후에 관해’ 유한하거나 무한하다는 것이 아니라, 순간들의 연속을 포함하며, 시간 안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담겨 있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로부터 시간, ‘내적 시간’ 이란 모든 피조된 것들의 존재 양식이며, 모든 유한한 것들의 본질적 속성이라는 사실이 흘러나온다. 시간이란 피조된 존재의 지속 기간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시간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한다.

 

[195] 공간에 제한되지 않는 무한성이란 하나님의 편재성이다. 하나님의 편재성 역시 성경에서 아주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모든 실재하는 것은 절대적 의미에서 항상 그의 소유다. 그러나 기독교회 안에 하나님의 능력의 편재성은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존재의 편재성은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기독교 신학은 여기서 다시금 이신론과 범신론을 회피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공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그것들에 의해 한정되거나 결정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과 시간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듯이, 하나님의 광대성과 공간 사이에도 본질적 차이가 있다. 공간과 장소는 모든 유한한 존재의 속성이며, 유한한 존재 자체와 더불어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유한한 존재는 자연적으로 공간에 존재한다. 유한 존재의 제한성은 장소의 개념을 수반한다. 유한 존재는 항상 어디에 존재하며, 또 다른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간은 칸트가 주장하듯 지각 형태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존재 양식이다. 시간과 공간 모두 모든 유한한 존재의 내적인 존재 방식이다. 이 사실로부터 시간뿐 아니라, 공간도 역시 무한자인 하나님에게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존재를 사물들의 실체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신적 존재를 공간적으로 만드는 범신론을 회피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본질과 본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능력을 통해 편재한다는 이신론 역시 거부해야 한다. 마치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장소에 거주하고, 거기서 자신의 전능을 통해 만물을 다스린다는 이신론적 개념은 하나님의 본질과 모순된다. 이 개념은 사실상 하나님의 모든 미덕들, 즉 하나님의 단순성, 불변성, 독립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레고리우스 1세가 표현했듯이, “본질, 현존, 능력을 통하여” 존재한다. “하나님은 여기에 그리고 어디에나 본질적으로, 지금, 강력하게” 만물 가운데 임재한다. 하나님의 편재성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이다.

 

[196] 비공유적 속성들 중 마지막은 ‘단일성’으로, 이는 ‘유일성’과 ‘단순성’으로 구분된다. 전자가 의미하는 바는 단지 단 하나의 신적 본질만 있으며, 하나님은 그 본질로 인하여 단 하나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고, 따라서 그 외 모든 존재들은 단지 그로 말미암았고,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에 대하여 실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속성은 신적 본질의 내적, 질적 단일성을 표현하는 단순성과는 다른 하나님의 절대적 단일성, 독특성, 유일한 수적 단일성을 가르친다. 이 속성은 성경에서 거듭 명백하게 선포되었고, 모든 다신론에 반하여 주장되고 견지되었다.

 

[197] 그러나 하나님의 단일성은 단지 유일성뿐만 아니라, 단순성도 포함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단지 진리, 정의, 생명, 빛, 사랑, 지혜를 지닐 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 자체이며, 따라서 모든 속성은 그 절대적 완전으로 인해 하나님의 본질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신학은 나중에 성경의 이 가르침을 ‘하나님의 단순성’이라는 명칭 하에 취급했다.

신학이 가리키는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포함하는 존재, 절대적으로 충만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 단순한 존재는 다양한 이름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들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아주 풍성하여서 우리는 오직 많은 이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풍성함에 대한 어떤 개념을 얻을 수 있다. 각각의 이름은 동일하고, 온전한 신적 존재를 일컫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다양성 가운데 단순하고, 자신의 단순성 가운데 다양하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각각의 규정, 각각의 이름은 부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단순성은 또한 삼위일체와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단순성이란 이중, 삼중에 대립된 것이 아니라, 복합성에 대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신적 존재는 세 위격으로 복합 구성된 것이 아니며, 또한 각각의 위격은 그 존재와 위격들의 특성으로부터 복합된 것도 아니다. 단 하나의 동일하고 단순한 존재는 삼위로 존재하며, 각 위격 혹은 위격적 속성은 그 존재로부터 실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성적으로만 구별된다. 각 위격적 속성은 과연 실재적 관계이나, 본질에 실재적인 어떤 것을 더하지는 않는다. 위격적 속성들은 “복합하지 않고 오로지 구별만 할 뿐이다.”

 

31 공유적 속성들

 

하나님의 영적 본성

 

[198] 하나님의 단순성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적 본성을 취급하도록 한다. 하나님은 피조물 가운데 임재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는 것은 자신의 영을 통해, 따라서 영적인 방식으로 한다. 하나님의 영적 본질은 신약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가 하나님을 영이라 부르고, 따라서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요구했을 때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하나님의 영적 본성이란 하나님이 세계의 존재와는 구별된 독특한 실체이며, 이 실체는 비물질적이고, 육체적 감각이 지각할 수 없으며, 복합이나 연장을 지니지 않는다고 이해되었다. 영적 본성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알려주는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부정적으로는 천사들의 영과 사람의 영혼과의 유비 가운데 비물질적이며 비가시적인 존재로 이해되어야만 하며, 또한 긍정적으로는 모든 피조물, 즉 육체적 존재와 영적 존재의 숨어 있고, [복합되지 않은] 단순하고, 절대적인 근거로 고려되어야만 한다.

 

[199] 이 하나님의 영적 본성으로부터 하나님의 불가시성이 직접적으로 뒤따른다. 종교개혁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보는 것에 대하여 다양한 입장을 취했다. 루터파 신학자들은 단지 정신적으로만 아니라 심지어 육체적으로도 ‘본질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을 수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아주 커서, 그가 구원받은 자들에게 빛을 비추어 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은 심지어 육체의 눈으로도 본질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신자들을 위해 준비된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영광을 주장하고, 스콜라주의의 ‘곤란한 문제들’을 제쳐 두거나, ‘본질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했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 완전하게 알려질 수 없고 불가해한 분이라면,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 보일 수도 없다. 본질을 통해 보는 것과 철저한 깨달음은 결국 전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무한한 분이며, 인간은 영광의 상태에서도 항상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하나님을 단지 유한하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개혁자 신학자들이 인간의 영광의 상태를 얼마나 높이, 그리고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했든 간에, 인간은 거기에서도 여전히 인간으로 머무른다. 인간은 언제나 유한하고 제한된 본성으로 감당할 수 있는 그런 바라봄 가운데 있다.

 

지성적 속성들

 

[200] 성경 전체는 하나님이 의식과 지식을 가진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순전한 ‘빛’이며, 어떤 사람도 접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며, 자연과 은혜 가운데 있는 모든 빛의 근원이다. 이 빛이라는 은유적 명칭에는 지적인 의미가 전면에 부각된다. 왜냐하면 빛은 일차적으로 감추어진 것, 어두움 가운데 숨어 있는 것을 계시하고 드러내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이 지성적 의미는 자연스럽게 도덕적 의미가 된다. 우리가죄로 오염되었을 때, 우리는 숨고, 어두움을 좋아하며, 감히 빛 가운데 나아오지 않으며,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빛이라는 명칭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꿰뚫어 보고 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빛이며, 빛 가운데 거하며, 모든 빛의 근원이다. 또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생명도 전적으로 의식적인 생명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식하고 안다. 하나님의 지식의 대상은 모든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지식은 모든 것을 포함하며, 엄격한 의미에서 전지다. 이 같은 하나님의 지식은 관찰을 통해 후험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선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201] 그러므로 사실상 하나님에게 있어서 예지란 언급될 수 없다. 하나님에게는 시간의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이미 존재했던 것처럼 본다. 만일 하나님의 지식이 사건들 자체를 안다면, 그 사건들은 그에게 미래가 아니라 현재다. 따라서 이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예지가 아니라 다만 지식이라고 불러야 한다. 하나님의 전지를 예지, 현재 통찰의 지식 그리고 기억으로 구분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적인 표현이다. 신학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전지가 어떻게 인간의 자유와 조화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만일 하나님이 미리 앞서 모든 것을 안다면, 모든 것은 영원부터 확정되었기에 자유롭고 우연한 행위들을 위한 여지는 남지 않는다. 그래서 키케로, 마르시온, 소시누스파도 하나님의 전지를 부인하였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능하고 우연한 것으로 안다. 즉 하나님은 미래의 사건이 인간에게 달려 있다는 범위에서 그것을 안다는 것이지, 확실하고 오류가 없이 미리 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오류 없이 미리 안다면, 자유의지는 사라지고, 하나님은 죄의 저자가 되고, 자기 스스로 필연성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전지에 대한 제한성은 성경과 대단히 모순된다. 기독교 신학은 해결책을 위해 두 가지 방법이 제시되었다. 한편으로, 오리게네스는 예지와 예정 사이를 구분했다. 하나님은 과연 사물들을 미리 알지만, 이 예지는 그것들이 발생한 원인과 근거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그것을 단지 확실하게 미리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지와 자유의지의 모두를 견지하고자 했다. 인간의 의지란 자신의 본성 전체와 그 모든 결정들과 더불어 예지에 포함되었기에, 그 의지는 이 예지로 말미암아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제되고 견지된다고 진술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의지를 미리 알기 때문에, 그것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안다. 그러므로 의지가 장차 있게 되는 것은 그가 그 의지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예지를 지닌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가 수행할 능력을 갖고 있고 수행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회는 하나님의 전지성을 인간의 자유와 조화시키기 위해 반펠라기우스주의와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중간 지식을 작정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하나님의 지식, 즉 조건적인 미래의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작정으로 말미암아 분명히 발생할 것도 아니며, 어떤 조건 아래 실현될 수 있는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조건이 인간에 의해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못할 때, 자신이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지금 미리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경우에 준비되어 있다.

중간 지식 이론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를 자신의 존재, 자신의 작정에서가 아니라, 피조물의 의지로부터 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세상에 의존하게 되고, 스스로 가질 수 없거나 획득할 수 없는 지식을 세상으로부터 얻는다. 그 결과 하나님은 자신의 지식에 있어서 유일하고, 단순하고, 독립적인 존재, 즉 더 이상 하나님이 될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들의 종이 된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고, 인간이 결정한다. 사람들 사이를 구별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중간 지식을 거부했다. 피조물의 의지는 그 속성상 중립적이다. 그 의지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 의지는 당연히 하나님의 작정과 조화될 수 없다. 그 의지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작정으로부터 독립적이다. 하나님은 이 의지가 무엇을 할 것인지 지켜본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가능성, 모든 우연한 미래 사건들과 또한 절대적 미래 사건들도 미리 알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특정한 상황에서 은혜를 수용할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를 생명으로 선택했고, 만일 그가 믿지 않을 것이라면, 하나님은 그를 유기했다.

 

[202] 하나님의 지식은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지혜’라는 이름을 갖는다. 참된 지혜는 인간의 지성의 열매가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살고, 도덕적 생활 가운데 드러내는 도덕적 견실함이다. 성경에서는 지성과 지식만이 아니라 지혜도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여겨졌다. 신적인 말씀과 신적인 지혜에 대한 이 같은 성경의 가르침은 특히 필로에 의해 이데아들과 연관되었다. 이로 인하여 로고스론의 기초가 놓여졌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해한] 이데아들은 하나님과 나란히, 그리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기 세계, 지적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으며 하나님이 사유하는 내용을 구성한다. 그 원리들은 창조 이전과 이후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며, 따라서 영원하고 불변하다.

‘이데아’라는 용어는 현대 철학에서 의미상의 변화를 겪었다. 과거에 사람들은 이데아를 하나님의 창조적인 정신 가운데 있는 사물들의 양식으로 이해했던 반면, 현대철학에서 이데아는 감각적 관찰을 통해서가 아니라, 순수 사유를 통해 획득되는 개념들에 대한 명칭이 되었다. ‘이데아’란 용어는 특히 예술영역에서 객관적 양식, 원형, 따라서 이상적 완전에 대한 사상을 포함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자유, 예술, 학문, 진, 선, 미등에 대한 개념 [이데아]를 언급한다.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 개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혜로 만들었으며, 지혜는 하나님의 행하심의 시작이며, 창조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표현한다. 예술가가 자신의 개념을 예술 작품에 실현하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신이 형성한 개념들에 따라 만물을 창조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예술 작품이다.

 

[203]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지성적 미덕들 가운데 하나님의 진실성이 포함된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미 표현한다. 그는 진리이기에 거짓과 불의가 없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진리와 신실한 하나님으로서 언약을 지키며, 자기의 모든 백성들이 전적으로 신뢰하는 피난처가 된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 참된 하나님, 즉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참되고 실재하는 하나님으로 불린다. 그가 계시한 모든 것은 순전히 진리다. 그의 신실함은 언약의 하나님이며 항상 그러한 분으로서 구원을 온전히 베푼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성경은 진리라는 용어를 다양한 의미로 상용한다. 철학도 일반적으로 진리를 세 가지 개념으로 구분한다. 형이상학적 진리, 윤리적 진리, 논리적 진리이다..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진리는 자신의 본질에 속하는 모든 것으로서, 어떤 대상, 사람 또는 관계된 일이다. 진리는 존재로서의 모든 존재의 한 속성이며, 진리는 실체와 동일하다. 하나님은 순수한 본질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진리다. 두 번째로 윤리적 의미에서도 진리다. 윤리적 진리란 누군가의 본질과 그의 말로나 행위로 나타난 계시 사이의 일치를 말한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계시는 완전하게 일치한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논리적인 의미에서도 진리다. 이 진리는 생각하는 것과 실재 사이의 일치, 지성과 사무의 일치 혹은 부합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식에 있어서 진리 자체다. 하나님의 지식은 살아 있고, 절대적이며, 적절한 진리다. 그 지식은 사물에 대한 탐구와 숙고로부터 획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이며 사물들에 선행한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본질과 동일하며, 따라서 실체적 진리이다.

 

도덕적 속성들

 

[204] 하나님의 선하심은 윤리적 속성들 가운데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다. 선의 일차적인 본래 의미는 내적인 성질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를 지시하는 듯하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선이란 상대방에게 유익한 것, 좋고, 사용할 수 있고, 유용한 것과 동일했다. 따라서 절대적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상대적 선만 있을 뿐이다. 유익과 손해는 선과 악의 척도다. 우리는 또한 선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도덕적 선 또는 미덕으로서의 선은 이에 대한 의미상 전이를 형성한다. 도덕적 선은, 모든 이롭거나 해로운 결과와 상관없기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완전함의 총채다. 모든 미덕은 절대적 의미에서 하나님 안에 현존한다. 성경은 항상 이 선의 미덕이 절대적 의미에서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지식, 지혜, 능력, 사랑, 공의 등이 전적으로 독특한 방식으로, 즉 신적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속한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선함은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과 동일하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복된 분으로서 자신의 피조물들의 위한 최고선이며, “만물이 추구하는 최고선, 모든 선의 원천, 모든 선 중의 선, 하나의 필연적이며 충족한 선, 모든 선의 그치다.”

 

[205] 선하심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개신교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정의는 윤리적 완전, 순결이다. 어떤 때에는 보다 더 하나님의 공의와 연관되었고, 다른 때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연관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지혜와 연관되기도 했다. 그러나 거룩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다른 견해를 불러일으켰다. 신구약 성경에서 거룩의 개념은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거룩이 과연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가리키는가에 대한 커다란 견해차가 있었기에, 다른 학자들은 이 개념이 전적으로 내적이고 본질적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순전히 그리고 오로지 관계 개념일 뿐이라고 여겼다. 또한 거룩이란 관계로 완전하게 묘사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학자들조차도, 일반적으로는 그 개념 정의에서 출발했다.

거룩하게 디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까닭은, 하나님이 그 민족을 자기 소유로 삼아, 그 민족에게 다가오며,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룩해진 것은 독특한 삶에 참여하고, 독특한 특성을 지니며, 일반적인 삶과 일반적인 규례와 구별된다. 하지만 거룩하게 하는 것은 단지 구별 이상의 것이다. 반드시 어디서나 지니고 드러내야 하는 독특한 성격을 부여한다. 단지 도덕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독특한 율법 제정이 완전함을 포함한다는 전반적인 의미에서, 즉 종교적, 윤리적, 의식적, 내적 그리고 외적 의미에서 완전함이다.

 

[206]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움이다. 의로움의 일차적 의미는 법정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의라는 명사는 주장이나 선언의 정확함이나 진실됨을 지시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이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재판 소송이나 법정에 서지 않더라도 옳은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는 정당성을 지니고, 의롭고 선하며 법을 준수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일차적으로 역사에서, 세상 통치와 이스라엘의 인도 가운데서 나타났다. 그 의는 온 세상에 계시된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심판자다. 하나님의 공의란 하나님이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보응하고, 의로운 자들과 악한 자들을 구별하여 취급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참된 재판장으로 오로지 공의로 판단하며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는다. 메시아도 언젠가는 이렇게 정의롭게 판단할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특히 하나님이 의로운 자의 의를 인정하고, 밝히 드러내고, 승리하게 한다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의의 구원론적 특성은 이사야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스라엘이 진실로 범죄한 백성이며, 따라서 심한 징벌을 받을지라도,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 대조적으로 의롭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모든 범죄에도 불구하고 의로운 명분을 갖기에, 궁극적으로 의로운 자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충분히 징계를 받았을 때, 하나님의 의가 일깨워지고 ,이스라엘의 이러한 의가 인정받으며, 그 모든 하나님의 비참함에서 구출될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그렇게 적용된다.

주는 이방인들에게 공의를 베풀 메시아를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자기의 의를 부여할 것이며,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다. 자기 백성에게 대한 주의 의는 그들에게 자기의 의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의 의의 개념은 신약 성경으로 옮겨졌다. 하나님의 의는 메시아가 자기 백성에게 의를 베풀고,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의 수단을 제공하는 데 있으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며, 또한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며, 더 나아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을 베푼다.

 

주권적 속성들

 

[207] 하나님은 창조자이며, 따라서 만물의 주인, 소유자, 주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없이는 존재할 수도 없고, 어떤 것을 소유할 수도 없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절대적 권세를 갖는다. 하나님의 뜻이 항상 어디서나 결정을 내린다. 하나님의 뜻이 만물의 존재와 그 처럼 존재하는 것의 최종적 원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된다. 선택과 유기, 중생, 성화, 신자들의 고난, 우리의 삶과 운명, 심지어 가장 사소한 것들까지 그러하다.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뜻을 모든 존재하는 것의 최종적인 원인, 모든 모순의 종국으로 존중했다.

하나님 자신이 자기 피조물들과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최고의 선이다. 하나님 자기 자신 외에 다른 데서 안식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기에, 오로지 자신을 통해 그리고 자신 안에서만 복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사랑이며, 절대적이고 신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그 절대적 자기 사랑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며, 그의 의지의 최상의, 절대적, 신적 에너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의 대상은 하나님 자신이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 의지의 산물인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존재하게 했고, 자기 자신의 원인이었다는 것처럼 이해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성과 추구, 따라서 불완전을 하나님에게 돌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향과 피조물에 대한 경향으로 구별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고, 피조물과 연관하여 자신의 의지를 거듭 언급한다고 명백하게 가르친다. 그러므로 창조는 하나님을 떠나서, 그리고 하나님과 대립하여 존재하는 대상으로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또한 그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피조물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적이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이 피조물들을 의지하는 것은 그들 또는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 목적이다. 하나님은 피조물 자체를 지향하지 않고, 피조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피조물들에 관해서도 하나님의 의지는 결코 여전히 획득해야 할 어떤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 어떤 불완전과 불행의 표시도 아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항상, 피조물들 안에서 그리고 피조물들을 통하여, 절대적인 자기 즐거움, 완전한 복, 신적인 안식이다.

 

[208] 하나님이 단 하나의 동일한 단순 행위로 자기 자신과 피조물들을 의지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다양한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주목함으로 구별해야 한다. 이러한 구별은 범신론에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성경은 피조물들이 독립적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존재와는 구별된 고유한 존재를 가진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와 더불어 대상 자체인 것처럼, 동일한 의미와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의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의도하는 하나님의 의지는 “목적으로서 자신을 향한 경향이다.” 피조물들을 대상으로 삼는 의지는 ““수단으로써 피조물을 향한 경향이다.”

성경은 이러한 의지가 절대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는 모든 것을 행한다. 하나님은 자기 행위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 신학에서 피조물들을 대상으로 삼았던 ‘하나님의 의지’ 역시 이러한 근거들에서 ‘통찰의 지식’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자유로운 의지’라고 불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뜻이 만물의 최후의 근거와 궁극적인 근거라고 말했다.

많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에서 출발하여 중세 유명론의 노선을 따랐다. 둔스 스코투스는 절대적 무관심으로서의 펠라기우스적 자유의지의 개념을 시종일관 하나님에게 적용한 학자였다. 세상 전체와 모든 부분은 우연한 것이며, 세상은 하나님에게 불필요한 것이다. 스코투스는 온 세상이 우연이라면, 세상의 이러한 성격은 오로지 제일 원인인 하나님이 세상을 우연히 존재하게 했다는 주장으로만 변호될 수 있다. 그러나 우연적인 것이 의지에 선행하는 한, 우연이란 하나님의 지성 안에 놓일 수 없다. 왜냐하면 지성은 “순전히 자연적으로, 그리고 자연적 필연으로 깨닫기” 때문이다. 지성은 반드시 의지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의지는 모든 실재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작정을 영원부터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절대적 자유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했다. 그러므로 스코투스는 당연히 인간의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의지는 더 높은 선이나 더 낮은 선을 선택할 수 있다. 의지 자체가 유일하게 자기 행동의 완전한 원인이다. 게다가 대상의 어떤 선이 필연적으로 의지의 승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어떤 선이든 자유롭게 승낙하기에, 따라서 크고 작은 선을 자유롭게 승낙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그 자체를 고려할 때, 하나님은 죄인에게 그리스도의 공로 없이 구원을 제공할 수도 있었고, 만일 하나님이 죄인의 공로를 충분한 것으로 여기기를 원했다면, 죄인도 역시 자신을 위해 속죄할 수 있었다.

비록 기독교 신학이 아우구스티누스와 더불어 하나님의 뜻이 만물의 궁극적 근거라고 말했을 지라도, 이러한 의지가 모든 본성으로부터 제거되어 순전히 자의적인 것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했다. 제일 먼저, 신론에 있어서 기독교 신학은 그 출발점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 두었다. 모든 가능성들은 단순한 지성의 지식에 포함되어 있으며, 통찰의 지식이 그것으로부터 그 가능성들을 이끌어 내고 의지가 그 가능성들을 실현시킨다. 따라서 사물의 실재는 과연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고, 사물들의 본질은 하나님의 지성에 달려 있다.

신학은 세상을 필연적으로 만드는 범신론의 유혹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의 필연적 의지와 자유로운 의지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을 우연의 산물로 만드는 이신론에 의해서도 유혹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온 세상이 하나님의 지혜를 계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은 이 두 가지(범신론과 이신론)에 대해 세상은 하나님의 자유롭고, 주권적 뜻에서 나온 행위이며, 이러한 뜻에 대한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롭고 선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209] 하나님과 세상이 구별되고,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자기 자신에 대한 경향과 피조물들에 대한 경향으로 나누듯이, 마찬가지로 세상의 피조물도 다시금 온갖 종류로 구별된다. 그 구별은 하나님이 자신의 본질, 자신의 지식과 의지로 피조물들과 맺은 다양한 관계에 기초한다.

우리는 피조물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을 규정하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말하는 하나님의 뜻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초기 신학에서 이 하나님의 두 가지 뜻에 대한 구별이 곧 등장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감추어진 높은 뜻과 낮거나 작은 뜻을 말했다. 아우구스티수스는 하나님이 자신의 선한 뜻을 자주 인간의 악한 뜻을 통해 성취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선행적 뜻과 결과적 뜻의 구별 그리고 절대적 뜻과 조건적 뜻, 유효한 뜻과 무효한 뜻의 구별이 있다.

로마교는 사실상 오로지 선행적 뜻과 결과적 뜻만을 구별하지만, 개혁파는 선행적 뜻과 결과적 뜻의 구별을 거부하고 단지 기뻐하는 뜻과 드러난 뜻(작정한 뜻과 규정적 뜻, 감추어진 뜻과 계시된 뜻)만 구별했다. 그 차이는 다음과 같다. 로마교, 루터파, 항변파 등은 드러난 뜻에서 출발했다. 이 계시된 뜻이 참된 뜻으로, 하나님은 죄를 원하지 않지만 단지 허용하며,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고, 모두에게 은혜를 제공한다. 그래서 만일 인간이 결정한다면, 하나님은 그 결정에 따라 행하고 인간이 원하는 것을 결정한다. 결과적으로 뜻은 인간의 결정을 뒤따르며, 참되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처신에 따른 하나님의 행위다. 이와 대조적으로 개혁파는 기뻐하는 뜻에서 출발하여 이 뜻을 참되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여겼다. 이 뜻은 항상 계속되고, 언제나 그 목적을 성취하고, 영원불변하다. 반면에 드러난 뜻은 율법과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규정, 우리의 행위의 규범이다. 성경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고, 불변하며, 독립적이고, 유효하다고 가르친다.

펠라기우스주의는 부당하게 이런 가르침의 노선을 버리고, 하나님의 힘없는 욕구, 성취도지 못한 소원을 의지의 수준에 올려놓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본질 전체, 하나님의 모든 미덕을 부당하게 취급했다. 왜냐하면 만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참되고 본질적인 뜻이라면, 하나님은 자신의 전능, 지혜, 선하심, 불변성, 독립성 등을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통치전체는 하나님의 섭리와 결별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도와 세상 역사의 결과 사이에는 조화될 수 없는 이원론이 생겨난다. 즉 세상 계획은 실패하고, 사탄이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된다.

기뻐하는 뜻과 드러난 뜻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째, 하나님의 명령과 규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드러난 뜻 가운데,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 뜻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법이 아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반드시 행해야 할 것을 규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우리가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말한다. 그 뜻은 우리의 행위의 규범이다. 따라서 그 뜻은 단지 은유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불린다. 둘째, 그러므로 드러난 뜻은 또한 진실로 하나님의 기뻐하는 뜻과 조화된다. 즉, 드러난 뜻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행하기를 원하는 것을 가리킨다. 기뻐하는 뜻과 드러난 뜻은 서로 정면으로 대립되지 않기에, 전자에 의하면 모든 사람 하나님은 과연 죄를 원하지만, 후자에 의하면 죄를 원하지 않으며, 전자에 의하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하지 않지만, 후자에 따르면 과연 그것을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기뻐하는 뜻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죄를 기뻐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뜻은 거의 서로 대립되지 않으며, 드러난 뜻은 바로 기뻐하는 뜻이 성취되는 수단이다. 또한 이 둘 사이의 구별이 유지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드러난 뜻을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거룩, 도덕법의 위엄, 죄의 심각성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누구든지 기뻐하는 뜻을 부정하는 자는 하나님의 전능, 지혜, 독립성, 주권과 상충될 것이다.

 

[210]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의 전능에서 나타난다. 또한 하나님의 전능은 하나님의 모든 사역에서 드러난다. 창조, 보존, 출애굽 등 이스라엘의 역사는 크고도 분명하게 하나님의 전능을 선포한다.

성경은 한편으로, 하나님이 많은 것들을 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 없고, 후회하지 않으며, 변하지 않으며, 시험을 받지 않으며, 자기를 부인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본질과 동일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다른 미덕들로부터 분리하는 ‘절대적 능력’은 다름 아닌 헛되고 용납될 수 없는 분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능한 것은 실재적인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미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은 그의 본질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소유가 무엇이든,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가 무엇이든 동일 실체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존재하는 방식과 할 수 있는 방식은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존재와 능력을 동시에 가지는데, 하나님이 의지와 행위를 동시에 갖기 때문이다.

 

완전, 복됨 그리고 영광

 

[211] 모든 하나님의 속성들은 하나님의 완전, 최고의 완전함으로 요약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완전이란 단지 도덕적 완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선이나 거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최고의 완전함이란 하나님이 모든 완전의 총체이며, “그보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나은 존재란 생각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존재임을 가리킨다. 또한 피조물은 완전하다. 즉, 피조물의 규범인 개념이 피조물 가운데서 온전히 실현될 때, 피조물은 그 종류와 피조물적인 유한한 방식으로 완전하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역시 완전한 까닭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하나님의 본질과 완전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각 속성은 신자에게 소중하다. 신자는 그 어떤 속성도 놓칠 수 없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하나님도 갈망하지 않으며, 차례로 하나님의 모든 미덕들을 찬양한다. 우리가 이제 하나님에게 최고의 영광을 돌릴 때, 이로써 우리는 피조물들로부터 부정적이나 긍정적으로 알게 되는 모든 완전이 최상의 의미에서 탁월하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다고 인정한다.

하나님이 이처럼 절대적으로 완전하기에, 성경에서 또한 하나님은 복된 하나님이며 그렇게 일컬어진다. 하나님이 복되다고 할 때, 여기에는 세 가지가 포함된다. 첫째, 이것은 하나님이 절대적 완전이라는 것을 표현한다. 왜냐하면 복됨이란 각 존재의 몫이기에, 그러한 범위에서 완전하다. 하나님이 절대적 완전, 모든 미덕들의 총체, 최상의 존재, 최고선, 최상의 진리 등이므로, 그가 절대적 생명, 모든 생명의 근원이기에, 또한 절대적으로 복된 하나님이다. 둘째, ‘복된 하나님’이란 명칭에는 하나님이 이러한 자신의 절대적 완전을 알고 사랑한다는 것이 포함된다. 하나님은 절대적 지식으로 자기 자신을 알고, 절대적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사랑 없는 지식과 지식 없는 사랑은 둘 다 상상할 수 없으며, 그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상석을 차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섯째, ‘복된 하나님’이란 명칭은 또한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을 즐기며, 자기 자신 안에서 안식하고, 스스로 절대적으로 충족하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지성을 통해 자신의 완전을 알고, 의지를 통해 최고로 사랑한다. 하나님은 그 완전 가운데서 평화롭게 만족하며, 그 평정으로부터 기쁨이 일어나는데, 그 기쁨으로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말하자면 최고선 가운데 즐거워한다..

 

[212] 내적으로 복됨의 근거인 하나님의 완전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광을 외적으로 드러낸다. 주의 영광은 하나님의 모든 미덕들과 자연, 그리고 특히 은혜 가운데 나타난 자신의 자기 계시 전체와 분리될 수 없는 광채와 영광, 하나님이 어디서나 피조물들에 대해 나타나는 영광스러운 형태를 뜻한다. 모든 피조물이 가리키는 최상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최상의 존재, 최상의 진리, 최상의 선”이며, 또한 불변하는 최상의 미 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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