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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언어 - 1장_중생_생물학의 언어(사망에서 생명으로)

이참리 2022. 4. 13.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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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언어

'구원 받음'의 언어적 풍요로움을 찾아서

 

1장 중생 생물학의 언어(사망에서 생명으로)

 

헬라어 팔린케네시아(palingenesia)(팔린은 다시’, 게네시아는 낳다’)새로운 탄생또는 존재로의 회귀를 뜻한다. 게네시아는 일상 헬라어에서 태어난 날(생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중생이란 단어에는 새 피조물(new creation), 재탄생(rebirth), 거듭남(born again) 같은 개념이 모두 들어 있으며, 회개(repentance), 회심(conversion)도 중생이란 맥락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중생한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이며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을 설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거듭남에 대한 오해

거듭남에 대한 오해는 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온다. 거듭남의 의미를 희석 시켜 그리스도께 인격적으로 헌신하는 것, 그 헌신이 그들의 삶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을 믿는 것으로 여긴다.

 

영적 암

죄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구원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죄에 대한 논의를 기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드물지 않게 발견한다. 그들에게는 긍정적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긍정의 힘을 역설하는 설교자들은 누군가의 자존감을 무너트리거나 스스로 비루하다는 생각을 갖게하는 모든 이야기들을 적극적으로 걸러낸다.

 

그러나 로마서 3:10-18에서 바울은 인류에게 내재한 사악함을 단도직입적으로 논증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모든 사람이 죄와 죄의 권세아래 있다. 이 문제는 보편적이며 누구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죄와 죄의 권세아래 있다. 누구도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죄는 죄인이 의와 선을 행할 능력을 파괴해 버렸다.

 

1) 로마가톨릭 :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구분(터툴리안이나 이레니우스의 견해를 따름)
- 하나님의 형상 : 인간이 가진 자연적 본성(타락 후에도 남아 있음)
- 하나님의 모양 : 초자연적인 본성(인간의 타락으로 상실됨)
  즉, 타락한 인간이 자연적 계시로부터 이성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음.

2)
루터, 칼빈 : 하나님의 형상의 자연적인 본성을 포함한 전적인 타락(어거스틴의 견해)

- 자연계시를 인정하지만 그 자체로 불완전하다. 즉 자연계시에 대한 성경이 말하는 바를 알아야 하고, 인간이 성령의 조명하심이 있어야 한다. 성경이라는 특별계시로부터 출발하고 항상 성경이 모든 교리들을 분멸하고 확정하는 기반이 된다.

3)
웨슬리 : 전적인 타락, 그러나 하나님의 선행 은총으로 어느 정도의 자유의지 회복

- 선행은총은 구원받는 은혜는 아니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반응할 수 있는 의지를 말함.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행 은혜를 상실한 채로 살아감.

 

우리의 교만은 인류의 전적 부패에 대한 인식이 있을 때만 그 근원까지 파괴된다. 우리는 뼛속까지 부패했고 우리를 치유할 방법은 새 출발밖에 없다. 몸 전체가 죄라는 암으로 뒤덮여 있다. 육신을 통째로 폐기해야만 새 육신이 세워질 것이다.

 

오늘날 인본주의 정신(자아존중, 자기 의존)이란 세속적 개념은 너무나도 쉽게 기독교 안으로 침투했다. 인류에게 스스로 회복하고 되살아날 능력이 있다는 뉘앙스의 문구들이 교회 안에서 들려온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과 같은 것이다.

 

구원은 협업이 아니다

거의 모든 종교가 인간 노력에 기반해 있다. 로마 가톨릭 역시 유사하게 인간 공로에 대한 의존을 역설한다.

- 죄용서와 형벌의 개념, 잉여공로(39p)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오직 은혜로만 가능하다.

 

죽은 육신

만일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 있었다면 중생하거나 거듭날 필요가 없다. 이미 죽은 존재만이 다시태어날 수 있다. 영적으로 사망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죽은 자는 악이나 이와 유사한 일을 행할 능력만 있을 뿐이다. 구원은 결코 인간의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 구원은 백 퍼센트 하나님의 역사이어야만 한다.

 

모든 것은 아담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인간은 죄의 흔적을 지니고 있고 이를 신학적으로 원죄”(original sin) 또는 물려받은 죄”(유전된, 전가된 죄, inherited sin)라고 칭한다. 병을 제대로 진단해야 적절한 치료제를 처방할 수 있다. 인류는 죄의 삯으로 사망의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시는 것 같은 극적인 치유책이 요구된다.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

요한복음 3:8을 보면 거듭남이 성령의 역사임을 알게 된다. 성령의 활동은 주권적이다. 성령의 속성은 죄인의 마음속에 임하는 성령의 일방적 활동에서 발견된다.

- 찰스 피니 : 구도자 중심 예배, 미국 제 2차 대각성운동, 부흥은 인간적 기술과 프로그램으로 가능, 성령의 초대, 결단의 초대.

 

성령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부는 바람과 같다. 중생은 영적으로 죽은 죄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철저한 주권적 행위다.

 

중생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암시한다.

중생거듭남이란 용어는 전후 상태가 극적으로 달라짐을 암시한다. 회심이란 것 자체가 창조 행위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재창조행위다. 바울은 중생한 죄인들 안에 일어나는 변화를 창조의 언어를 사용해 표현했다(고후 4:6).

 

스스로에게 정직하라

오직 내 안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만이, 즉 자신의 영적 곤고함을 인식하고 예수님 발치에서 자비를 구걸하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구원은 근본적으로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죄인은 중생이 필요하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공허한 죄의 삶에서 예수님을 믿는 삶으로 돌이키시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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