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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언어 - 2장_칭의_법정의 언어(유죄에서 무죄로)

이참리 2022. 4. 16.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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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칭의 : 법정의 언어(유죄에서 무죄로)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justified)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8)

 

불신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죄에 과도하게 집착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죄 사함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복음적 확신을 불쾌하게 여긴다. 관용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죄를 부각시키는 것은 억압적이며 시대에 역행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 복음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우리는 정확히 말해 죄의 결과로부터 구원받았다.

 

외부에서 온 의

일반적인 헬라어 용례에서 칭의는 법정 전문 용어였다. 여기에는 법정 심문 절처와 하나님의 무죄 선고 등이 포함되어 있다.

 

로마 가톨릭의 주입된(infused) ’ : 의의 씨앗이 죄인의 내면에 심기운다음 죄인이 노력해 그 씨가 자라게 한다고 주장한다. 주입된 의는 바른 행위를 독려하는 데 유익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가 자신의 선행에 의해 좌우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주입된 의는 성도를 공로 주의와 교만으로 이끈다. ‘내면에서 비롯된 의는 또한 이기심을 조장한다. 감사한 마음에서가 아닌 개인의 유익을 위해 선행을 한다. 궁극적 초점이 다른 사람들이 아닌 자신에게 맞추게 된다.

 

주입된 의에 대한 대안으로 전가된(imputed) 가 있다. 상거래와 회계 언어에서 유래한 용어 전가는 신용을 쌓지 못한 누군가의 계좌에 그가 벌지 않은 금액을 입금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에 대한 복음적 관점이다. 이것을 마틴 루터는 외부에서 온(alien) 라고 했다. 이 의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임한다.

 

하나님이 불공평하신가?

어떻게 하나님은 예수님에 관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실 수 있는가? 하나님은 정말 불공평한 분인 것 같다. 성경은 이 사안을 드러내놓고 다루는 구절은 없다. 그러나 어떻게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인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실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자신이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인간은 교만하게 재판석과 피고석을 뒤바꾼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신이 재판관이고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힌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거부한다. 성경에서는 고귀한 이교도또는 죄없는 사람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분노에 차서 하나님께 공의를 요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누군가를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가 하고 물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어떻게 하나님은 나같이 부패하고 참담한 죄인을 영원한 낙원에 들어가게 하시는가?”를 물어야 한다.

 

칭의는 오직 믿음을 통한 은혜로만 된다. 죄를 수십 번 지었든지, 수만 번 지었든지 당신은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은혜가 진실로 은혜라면 그것은 과분해야 한다. 받은 만한 것이 때에는 은혜가 아니라 노력으로 얻어내는 공로가 된다.

 

은혜에서 은혜로

우리는 다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공의에 미치지 못하며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6:23).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영생, 즉 하나님의 선물(은사)를 통해 우리는 죽음이 아닌 생명을 받았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것에 놀라 어쩔 줄 몰라야 한다. 우리는 구원을 은혜로 얻는다고 선포하면서, 돌아서선 구원을 공로로 얻는 것인 양 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 사이에서 균형 잡기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간과하고 그걸로 끝내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거룩하고 의롭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이 우리 죄로 말미암아 다른 누군가를 징벌하셨다면 이 역시 동일하게 불의한 처사가 될 것이다. 죄를 죄로 다루면서도 하나님의 공의를 보존하는 방법은 하나님 자신이 형을 감당하시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은혜다~

 

율법과 선행은 어떻게 되는가?

에덴 이후 하나님이 인류를 다루는 방식은 늘 은혜였다. 율법은 구원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의 저주”(3:10-13)에 관해 이야기를 한 것이다. 만일 율법이 죽이는 것이라면 어떻게 바울은 율법이 선한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7:12) 율법의 핵심 목적은 말 그대로 죽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율법의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방편을 모색하거나 선행을 토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암시하는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율법은 한 번도 죄인을 의롭게 하려고 주어진 적이 없다. 만일 율법이 그럴 수 있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없었다.

 

법적 거래

칭의’(justification)’(righteousness)를 가리키는 성경 단어는 헬라어로 같은 어근인 디크’(dik)에서 유래한 것으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죄인들이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누리기 위해서는 의롭게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이 죄사함이 우리가 칭의를 말할 때 가장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에게 의로워지기 위한 요구조건들을 부과하셨다. 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 그것을 충족시키기엔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비를 구하는 지경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에 다다르기는커녕, 율법은 그저 우리를 난도질할 수밖에 없다. 율법은 악인을 의롭다 할 수 없고, 단지 악인을 정죄할 뿐이다.

법적으로 유죄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전가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단순히 용서받은 것뿐 아니라, 그와 더불어 의롭게 되었다. 한때 빚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계좌는 완전히 지불되고 청산되었다. 소위 의의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이 거래는 율법을 통해서는 일어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바를 믿을 때만 일어난다.

 

법정에서

구원의 사법적 언어는 중재자’(intercessor)고발자’(accuser) 용어에서도 발견된다. 성경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를 공격하는 대적(벧전 5:8)으로 그려지는데, 헬라어에서 대적’(adversary)이란 단어는 법정 소송의 반대편을 지목하는 일반 용어였고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이런 식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

마귀’(devil)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 고발자또는 비방자’(slanderer)를 뜻하므로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너희 대적, 고발자라 말하고 있다.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의 잘못을 처벌해 달라고 고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사법적 언어에는 중재’(intercession)도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 언약의 제사장들과 새 언약의 대제사장을 비교하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중재(간구)하신다고 말한다(7:23-25). 재판에서 예수님은 피고가 고발당한 죄목에 대해 무죄하다고 진술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그들이 받아 마땅한 형벌을 자신이 받겠다고 중재하신다.

 

문제가 제거되다

루터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과하신 율법의 무게를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다. 한동안 이 자각은 하나님에 대한 증오를 촉발했다. 그러던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값없는 선물임을 깨달은 후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두려움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안항ㅆ다. 구원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얻는 값없는 선물이라면, 하나님의 의는 그저 받으면 되는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미래를 놓고 의심할 필요가 없다. ‘행위-의로움체계가 야기하는 두려움이 제거된 것이다.

행위에 기반한 구원의 두 번째 문제점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우리 선행의 동기는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면 우리가 행하는 선행의 동기가 우리 자신이 되어서는 안된다.

성경은 구원이 획득하는 것이 아닌 주어지는 것, 선물이라고 말한다.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는 어떻게 칭의가 결정될지에 관해 발언권이 없다. 재판장께서 그 아들을 통해 값없이 칭의를 제공하기로 하셨다.

만일 구원이 우리의 선행에서 비롯될 수 있다면 우리에겐 자랑거리가 너무 많을 것이다.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새인도 똑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믿음의 거장인 아브라함 조차 자기를 자랑할 근거가 없었다(4:2).

 

나를 용서한다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당신의 죄가 사함받고 의롭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성취 불가능한 율법의 의에 대한 요구 조건으로 가득한 무거운 짐이 제거되고 그 자리를 은혜의 생명이 대신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죄에서 무죄로 옮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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