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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설교 40(그리스도인의 완전)

이참리 2020. 4. 30.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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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그리스도인의 완전존 웨슬리(John Wes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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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를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그의 '완전'에 대한 교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전이라는 것이 그가 말하는 것처럼 perfection of degrees가 아닙니다...

그의 설교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요약하였습니다. 그의 설교를 직접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빌3:12)

1. 완전이라는 말처럼 마음에 걸림을 주는 표현은 성경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완전을 설교하는 사람은 세리나 이방인보다도 더 나쁘게 평가될 위험마저 있습니다.

2. 그리하여 이런 표현이 너무나 많은 반대를 초래하고 있다는 이유로 아예 사용하지도 말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조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완전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닙니까?

3.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이 사람의 말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기 때문에 이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뜻을 풀어 설명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내가 이미 완전해졌다 함도 아니요”라고 함으로써 자기 자신은 아직 완전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그 다음 15절에서는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하라” 함으로써 자신과 많은 다른 사람들이 완전한 것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4. 그러므로 이와 같이 모순되는 듯 한 문제를 제거하기 위하여 다음 두 가지 문제의 해답을 추구하려 합니다. 첫째로,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완전하지 못한가? 그리고 둘째로,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완전한가?

I

1. 먼저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하지 못한가를 살펴봅시다. 첫째로, 그리스도인들은 지식에 있어서 완전하지 못합니다.

2.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져본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완전히 알아낼 수 없습니다.

3. 그들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의 이유를 대부분 모르고 있습니다.

4.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무지에서 아주 해방될 만큼 완전하여 질 수 없습니다. 둘째로, 사람은 실수를 전혀 범하지 않을 만큼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실로 무지로부터 야기되는 불가피한 결과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은 본질적으로 구원에 대하여는 실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관한 지엽적인 문제들에 대하여는 빈번한 실수가 있습니다.

5. 그 뿐 아닙니다. 성경에 관하여도 실수가 많습니다. 비로 하나님의 자녀들일지라도 성서해석에 있어서 일치되지 못한 곳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이러한 의견의 차이가 곧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증거는 절대로 아닙니다.

6. 사도 요한이 믿음 안에 거하는 형제들에게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 만약 이 지식을 절대적인 의미로 말했다면 그는 제자가 주님보다 더 낫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둘째로, 이는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말로 입증됩니다.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썼노라”(요일2:26), 만약에 사람들이 무지하지도 않고 실수도 없다면 이런 말씀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7. 따라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무지나 실수에서 전적으로 해방될 만큼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셋째로, 인간은 연약성으로부터 완전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의 연약성은 신체상의 연약성(한계성) 뿐만 아니라 도덕적 성격에 속하지 않는 내적, 외적 불완전성 전체를 뜻합니다. 예를 들면, 이해력이 부족하고 더딘 것이나 생각의 조리가 없는 것, 우둔한 것 등입니다. 이런 연약성은 많든 적든 가장 훌륭한 사람들에게서도 다소간의 차이는 있으나 다 발견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영혼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런 약점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리라고 바랄 수 없습니다.

8. 넷째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완전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9.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무지도 없고 실수도 없으며 연약성도 없고 유혹도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진정으로 성결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뿐입니다. 완전과 성결이란 같은 사실에 대한 두 가지 명칭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자는 누구든지 성서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런 면에서 절대적인 완전이란 이 땅 위에서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말하자면 “완숙한 완전(perfection of degrees)란 없다는 말입니다. 즉 계속적인 성장을 허용할 여지가 없는 그런 완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어느 사람이 설사 어느 정도에 도달했든지 혹은 어느 정도 완전해 졌든지 그는 아직도 ”은혜 안에서 자라가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II

1.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완전합니까? 한 가지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육의 생활처럼 몇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오직 어린 아이와 같고 어떤 이들은 좀 더 성숙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요한은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어떤 이들에게는 “자녀(아이)들아”하고 불렀고, 어떤 이들에게는 “청년들아”하고 불렀으며 또 어떤 이들에게는 “아비들아”하고 불렀습니다. 이어 사도 요한은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저들은 저희의 깊은 영혼으로부터 성부 성자 성신을 알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분량에까지” 성장한 “완전한 사람”(엡4:13)인 까닭이라고 한 것입니다.

2. 이 설교 후반부에서 중요하게 말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들만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의미에서 완전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저들은 죄를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요일5:18)

3. 하나님의 말씀은 명백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 최저의 의미에서 거듭난 자들일지라도, “죄를 계속하지는 않습니다.” 저들은 죄 가운데 더 살 수는 없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답아 연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4. 이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적어도 위에서 말한 사람들 즉 참 그리스도인 혹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외적인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5. 우리가 잘 아는 요한일서 3장 8절 이하의 말씀에 더욱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범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6. 이 말씀은 참으로 오해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즉 이는 단지 고의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 습관적으로 범죄하지 않는 것, 다른 사람들이 범죄하는 정도로 범죄하는 것이 아닌 것을 뜻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7. 하나님의 자녀들이 계속하여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실례들을 흔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끌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그의 생활 전체에 있어서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둘째로 유대인들 가운데서 가장 거룩했던 그 사람도 어떤 때는 범죄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살고 있는 한 범죄할 것이요, 또 범죄를 피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8.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나라”, 곧 누가가 표현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위의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이 나라에는 진실되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참 그리스도인 모두가 속하여 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두 가지 점을 명백히 선언하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는 이 땅 위에 세례 요한보다 큰 자는 없다는 것, 둘째로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가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더 많이 받고 있다는 뜻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이전에 유대인들이 누렸던 것에 비해 우리의 특권을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유대인에게 주어진 역할(섭리)이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은 더욱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9. 잠언 24장 16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넘어진다는 것은 범죄한다는 뜻이 아니라 일시적인 고통에 빠지는 것을 뜻합니다.

10. 솔로몬은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8:46; 대하6:36)라고 하였고, 또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고 하였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솔로몬 시대에는 그랬습니다. 아담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세에서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솔로몬에서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때에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습니다.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율법 아래 있었던 것이 어떤 상태였든 이제는 복음이 주어졌으니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사도 요한과 함께 장담할 수 있습니다.

11. 유대교의 시대와 기독교의 시대 사이에는 광대한 차이가 있음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12. 죄에서 구원을 받는 이 큰 구원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야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베드로도 역시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벧전 1:9,10)

13. 이와 같은 사실들을 숙고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특권은 결코 유대적 섭리 시대 아래 있던 사람들에 관한 구약성경의 기록에 의하여 평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14.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말, 곧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요일3:9)라는 말씀을 구약에 뜻에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야 한다는 필연성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참으로 충족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충족합니다. 그리하여 시험이 임박할 때 우리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런 까닭에 죄를 짓도록 유혹을 받아도 굴복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하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15. 사도 바울이 주님께 세 번이나 간구하였음에도 시험에서 피할 수 없었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고후12:7-10)

16. 첫째로 여기서 언급된 ‘가시’라는 말은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결코 바울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것임을 뜻하지 않습니다. 둘째로 초대 교부들은 이것이 육체적인 고통이었다고 말합니다.

17. 성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이 범죄할 수 없다는 주장을 직접적을 부인하고 있다고 반문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다”(3:2) 여기서 실수한다는 말은 죄를 짓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시지 아니한 선생들입니다. 결코 사도나 참다운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20. 사도 요한의 모든 주장을 한 견해로 집약할 때,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둘째로, 아무도 나는 범죄치 않았으며 깨끗함을 받아야할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의 죄를 용서하실 뿐아니라 또한 장래에 범할지도 모르는 죄에서도 우리를 구원할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누가 범죄할 수밖에 없다거나 혹은 범죄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계속하여 죄에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요한의 교리나 신약성서의 전체적 취지와 일치하게 한 결론을 내릴 수 있으니 그것은 곧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을 만큼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21. 이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에 불과할지라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악한 생각이나 성품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의미에서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주 안에서 강한 자와, “악한 자를 이긴 자”(요일2:13),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자”(13)들 뿐입니다.

22. 그렇다면 주인과 같은 종에게 있어 악한 생각은 어디로부터 생기는 것입니까?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악한 생각이 나옵니다”(막7:21) 따라서 사람의 마음이 악하지 않는 한 악한 생각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24.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생각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처럼 악한 성품으로부터도 해방됩니다.

25.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사도 바울과 함께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갈2:20) 이 말씀은 외적인 죄와 함께 내적인 죄에서도 해방 받은 것을 명백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26. 그러므로 참된 신자들 사이에 살고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써 그의 마음이 정결하여진 것입니다.

27. 이와 같이 예수님은 그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외적인 죄에서만이 아니라 마음의 죄로부터도 구원하십니다. 악한 생각으로부터 그리고 악한 성품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29. 주님께서는 이와 같이 태초부터 있었던 거룩한 선지자들의 말씀을 성취시켰습니다.

30.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과 선지서에 이와 같이 약속되었고 또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은혜로우신 우리 주님과 사도들이 확증시켜 주셨으니, 우리 가운데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직 한 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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